평소 워낙 문화생활과는 담을 쌓고 살아서, 연극을 보러가며 가장 최근에 본 연극이 뭐였지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지가 않았다.
예전 경험을 뒤적이기를 포기하고 어떤 내용일까 생각을 해 보았다.
‘늙은 부부 이야기’. 나이 드신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이야기겠지 하며 역시 대충 생각하고 말았다.
연극의 내용은 짐작한 대로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이야기였다. 하지만 보통의 사랑이야기 와는 다른 성질의 것을 내포하고 있는 사랑이었기에 서글펐고, 애틋했고, 따뜻했다.
그들의 사랑은 마지막 사랑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그들의 사랑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사랑이었기 때문에 보는 나로 써는 그들의 말투나 표정 하나하나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복점을 하나 물난리로 망했지만, 나름대로 전문직이라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박동만이 신림동에서 국밥집을 했던 이점순 집을 찾아가면서 연극은 시작된다.
아들 내외와 떨어져 혼자 살기위해 박동만은 이점순과 월세방의 값을 가지고 실랭이를 하는데, 꼭 후에 그들의 사랑의 깊이가 더해가는 마냥 월세 값은 높아지기만 한다.
막은 다음으로 넘어 간다. 어느덧 한 집에 살게 된 그들은 옆집 부부싸움이나 그들의 사소한 것들에 대해 이점순 할머니는 욕을 섞어가며, 박동만 할아버지는 능글맞은 말솜씨로 옥신각신 다툰다. 박동만이 여러 여사한테 전화를 하는 중간에 이점순의 혼잣말 ‘ 송여사 덕분이라면 그리 가지 왜 이리 기어들어와’에서 다투는 와중에 이점순의 박동만에 대한 애정이 새겨나고 있음이 은연히 들어난다.
정전은 그들 사이의 마음의 벽을 허무는 매개체가 되어주어 서로의 솔직한 이야기 속에 서로에 대한 애정은 커져 간다.
다음 막에서 욕쟁이 이점순 할머니가 순한 양이 되어버린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완전히 부부가 되어버린 그들은 젊은 연인들 못지않은 서로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마음 막. 시간은 흘러 가을 무렵이 된 듯 했다.
이점순은 박동만에게 줄 옷을 뜨개질하기 시작한다.
신혼 여행지를 결정하면서 서로 전 남편, 전 부인에 대한 추억들 때문에 질투하기도 하지만,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려는 마음도 드러난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서로가 첫사랑은 아니지만, 그래서 샘도 나지만, 그런 감정 위에 이점순에게는 박동만이, 박동만에게는 이점순이 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실망하기 보단 이해하고 모든 걸 끌어안아주는 그런 것.
연극으로 돌아와 박동만은 신혼여행지까지 스스로 몰고 가겠다며 꼭 면허증을 따겠다고 약속한다.
저녁 무렵 박동만과 이점순은 서로에게 반지를 끼워주고 그들만의 짤막한 식을 끝낸다.
이점순은 본인의 죽음을 예감한다. 그들의 행복의 정점인 결혼식과 이점순에게 찾아 올 죽음이 마치 한 우산 아래 두 명이 있는 모양이어서 서글펐다.
박동만의 등을 쓰다듬는 이점순의 모습, 이점순을 업고 있는 박동만의 모습에서 곧 이점순은 죽고 박동만은 저렇게 나머지 인생을 이점순과의 추억을 업는 채 살아가겠고, 이점순과의 추억은 저렇게 박동만을 외롭지 않게 계속해서 등을 쓰다듬어 주겠구나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느덧 겨울이 오고 박동만은 5번 만에 면허증을 따지만 할머니는 이미 이승에는 없고 사진이나 박동만의 마음속에서만 있다. 그리고 또 하나에.
이점순의 막내 딸 김인순에게서 소포가 오고 상자 안에는 완성된 스웨터가 있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죽음 또한 안 보이게 되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스웨터는 혼자 지낼 박동만에게 보이는 사랑, 안 보이게 된 할머니를 의미하기 때문에 할머니의 죽음으로 그들 사이가 단절 되는 것은 아니다. 박동만 할아버지의 의식 속에, 스웨터의 한 올 한 올에서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은 때늦은 사랑이라 평소에 생각해 왔었는데 그들의 사랑도 정말 순수하고 진심어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인생의 많은 것을 경험한 후에 하는 사랑.
그것은 분명 젊은이들의 그것과는 다르겠지만, 젊은이들의 그것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색을 지닐까 궁금해진다. 그 색은 아마 안에는 맛있는 크림을 가지고 있지만 겉에는 구어지고 오래 된 듯한 노란색을 가진 카스타드의 색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