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ㅁ^ 문학의 이해 수업 중에 기회가 닿아서 극단 오늘과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번 학기에 <늙은 부부 이야기>와 <사랑에 관한 다섯가지 소묘> 이렇게 두 편을 보았습니다. 무대라는 건 참, 그 위에 올라선 사람 뿐 아니라 그걸 보는 관객들도 함께 흥분과 감동으로 몰아가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막 힘이 납니다ㅋ. 앞으로도 좋은 인연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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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부부 이야기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은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황지우 시인의 "늙어가는 아내에게"라는 시의 일부이다.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라니. 아직 세상을 덜 살아서 그런지, "사랑"이라고 하면 뜨거운 열정이 쉬 떠오를 뿐, 늙어가는 이들의 수더분한 사랑에 대해서는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늙은 부부 이야기>는 자칭 동두천 신사 박동만 할아버지와 욕쟁이 이점순 할머니의 말 그대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처음에 박동만 할아버지가 할머니네 집에 찾아왔을 때는 옥신각신 하더니 이내 두 사람은 부부마냥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게 된다.
할아버지가 미끈한 백구두를 신고 처음 등장해서 걸프랜드 얘기를 주욱 늘여놓을 때까지만 해도, 이순재 아저씨의 칼칼한 목소리와 어울려 그렇게 뺀질해 보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점차 극이 진행되어 가면서 이는 안쓰러움으로 변해갔다. 할아버지의 큰소리가 연락 한 번 없는 매정한 아들들과 일찍이 사별한 부인 탓에 정이 그리워 스스로 힘이라도 얻으려는 듯한 과장된 몸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점순 할머니와의 짧은 사랑에 더욱 안타까움을 더했다.
모진 세상에 혼자 힘으로 국밥집을 하면서 자식들 학비에 보태고 이제 당신은 집과 몸만 남은 이점순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혼자 힘으로 장사를 하며 세상에 지지 않기 위해 느는 것은 욕이었다. 그것은 세상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하는 수단이기도 했고, 마땅히 힘든 몸과 마음을 호소할 방안이 없어 찾아낸 배출구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욕쟁이 할머니도 사랑하는 할아버지 앞에선 고운 입을 가진 순한 존재였다. 수줍음을 알 새도 없이 모질게 늙어 온 할머니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만은 영락없는 새색시 모습이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얻은 건 그 뿐 아니었다. 병을 얻어 뒤늦게 다시 만난 사랑도 두고 세상을 먼저 등져야 했다. 할머니는 자신이 몹쓸 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할아버지 스웨터 짜는 손길을 놓지 않는다. 스웨터는 결국 할머니가 떠난 뒤에 완성되지만, 그 스웨터를 입고 할머니가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눈이나 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충분히 할머니에게까지 가 닿았으리라.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와의 신혼 여행을 위해 운전면허 시험에 준비하고, 또 이미 할머니는 없지만 늦게나마 딴 면허증을 할머니 사진 앞에 가장 먼저 보여 주는 할아버지. 아들이 있어도 혼자 나와 살게 된 할아버지와, 학비마련에 빠듯한 삶이었지만 아직도 딸 집안 걱정을 하는 할머니는 자식들 눈치 보랴, 동네 사람들 눈치 보랴 식도 제대로 올리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하지만 흰머리가 검은머리 될 때 까지 할머니를 사랑하겠다는 할아버지의 선서와, 수줍에 이하 동문을 말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보는 우리 모두가 하객이 되어 박수를 치며 두 분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랐다. 이것이 소극장만이 가지는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관객과 배우가 하나의 공간에 있다는 것.
뭐,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는 아주 자명한 진리를 새삼 다시금 가슴에 새길 수 있었다. 나이도, 주변의 시선도, 죽음까지 다. 할머니도 하늘에서 행복하시리라. 할머니 할아버지 숨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소극장 공연도 좋았고, 사랑도 사람도 좋고, 연극 끝나고 산낙지에 쏘주 한잔도 좋앗던 날이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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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다섯가지 소묘
먼저 독특하게 꾸며진 무대가 눈에 들어왔다. 침대가 가운데 놓여 있고 양쪽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특이한 구성이었다. 극이 점차 진행되고 나서야 그 의미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단순히 두 개의 방을 한 무대에 올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사랑, 愛, liebe 등 세상에는 “서로를 애틋하게 그리는 감정”을 나타내는 수많은 단어들이 있다. 하지만 언어는 현상을 제한한다. 일종의 살해 행위로 비유되기도 한다. 언어는 우리가 그것을 듣고 떠올릴 수 있는 만큼만의, 팔다리 잘려진 채의 실재만을 준다. 우리가 흔히 쓰는 “사랑”이라는 말 또한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감정을 온전히 드러낼 수는 없다. 언어를 대신해 그러한 감정 자체를 드러낼 수 있는 가장 보편화 된 기호는 “하트 모양♡”일 것이다. 하트 모양을 반으로 접으면 꼭 들어맞는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은 이렇듯 두 사람이 서로에게 더하거나 덜함을 느끼는 일 없이 너와 내가 꼭 들어맞는 모양을 하고 있을 것이다. 데칼코마니처럼 펼쳐진 무대 자체가 그러한 감정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 남녀가 서로에게 누구냐고 묻는 장면에서 그 느낌이 크게 와 닿았다. 서로가 그리고 있던 두 개의 반쪽짜리 하트 모양이 서로를 의식하는 그 순간, 한 점에서 만나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연극의 제목에도 들어 있는 “소묘”라는 것도, 언어라는 것으로는 표현해 낼 수 없는 감정을 그려낸다는 의미로 읽었다. 단지 빛과 어둠만을 사용해서 하나의 완전한 모양을 그려내는 것이 소묘이다. 주로 연필과 종이라는, 가장 단순한 도구만을 사용하기에 채색화의 화려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리면 그릴수록 자세한 묘사가 가능한 것이 또 소묘이다. 여러 가지 색채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실재가 아닌, 가장 수수한 감정이다. 누구나 선을 하나 긋는 것 만으로 시작할 수 있고, 또 계속 그려 나가다 보면 선들이 모여 그림자지고, 덩어리지면서 자기만의 작품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 그것은 연극의 제목이 “다섯 가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소묘”인 이유이다.
알고 있었지만 몰랐던 서로를 깨닫고, 사랑에 실패하고, 아파하고,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믿고, 안타까워하고, 헤어짐을 준비하는 사랑의 모든 모습들이 짧은 시간 안에 고스란히 무대 위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날마다 우리가 겪는 이야기였고, 또 그렇기에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사람은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사랑하니까 사람이다. 사람이라서 사랑하던가. 사랑이라서 사람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