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원
김현원의 자는 천송(泉淞)이요, 관향은 상산(商山)이다. 1918년 부천의 문학산 밑 무학동(舞鶴洞)에서 농사를 짓는 일호(逸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들판에 과녁을 세워놓고 틈틈이 활을 쏘는 활량이었는데, 활쏘기가 아주 발달한 경기도와 인천 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까닭에 현원도 나이가 차자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활을 배웠으니 그의 나이 스물 네 살 되던 1941년 3월의 일이었다.
현원은 활을 아주 잘 쏘았다. 1955년 부천의 문학면과 남동면이 벌인 편사에서 장원한 것을 시작으로 1985년 전주 대사습 국궁 부문 장원에 이르기까지 전국 대회에서 무려 스물 두 차례나 우승하여 뒤따르는 후학들이 깨기 어려운 대단한 기록을 세웠다. 1967년부터 인천의 수사정인 무덕정에서 오랫동안 사두를 지냈다. 특히 1979년에는 사두 재임 당시 전국체전을 유치하면서 무덕정을 새로 짓는 큰 일을 맡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오랫 세월 동안 활쏘기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받아 1980년에는 경기도문화상을 받았다. 2001년 3월에 집궁회갑을 하였다.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활터에 나와서 후학들과 함께 스스로 활을 쏘면서 젊은 사원들을 가르치는 노익장을 과시하였다.
현원은 2004년에 입산하였으니, 그의 나이 86세였다. 이 해를 기점으로 인천 무림에 이름을 드날렸던 명궁 셋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입산하였으니, 하상덕 명궁은 2005년에 입산하였고, 안석흥 명궁은 2006년에 입산하였다. 그런데 이들 셋은 어릴 적부터 아주 절친한 벗이었으니, 활로 맺어 입산할 때까지 드리운 두터운 인연의 신기함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훈훈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심재관
심재관은 본관이 청송으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된 <심즙 신도비>의 주인공 심즙의 13대 손이다. 1922년 2월 17일, 경기도 부천군 서곳면 가좌리에서 아버지 심관섭과 어머니 민병학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1941년에 민경숙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5녀의 자녀를 두었고, 이들이 대부분 미국으로 이민하여 정착함에 따라 1980년대에 미국으로 뒤늦게 이민을 갔다. 캘리포니아의 딸 집에서 살며 낚시와 골프를 즐기다가, 91세이던 2012년 미국 포트랜드의 아들 집에서 입산하였다.
어려서 외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활쏘기 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까닭에 10살 무렵에 서무정에서 대물림으로 활을 배웠는데, 여러 가지 운동에 특출한 재능이 있던 까닭인지 첫날 5시 중 2시를 맞혀 그날 아버지가 잔치를 벌여 2중례를 했다. 한국 전쟁 전에는 우궁이었으나 군대에서 부상을 입은 뒤로 좌궁으로 바꾸었다.
1977년 전국체전에는 25시 중 22시를 하여 단체전과 개인전 양부문에서 동시에 1위에 올랐고, 2위(하상덕 20중)와 3위(김현원 20중)도 인천 무덕정 한량들이었다. 1987년도 대전 대덕정에서 개최된 제1회 중앙회장기쟁탈 전국대회 결선 재순에서는인천 무덕정 ‘김현원 하상덕 오세준 구명기 심재관’ 5명이 몰기를 하여 25중의 대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로써 인천의 활쏘기가 전국 최고 수준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활쏘기가 막 보급되는 지역을 돌아다니며 지도 사범을 맡아서 국궁계의 사풍 진작이 큰 힘을 쏟았다.
1986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9단이 되었다. 해방 후 단급 제도를 도입한 이래 5단부터 특별히 '명궁'으로 호칭했는데, 우리나라 첫번째 명궁의 영광도 1977년에 그가 이룬 업적이었다. 참고로 1971년에 초단을 1974년에 2단과 3단을, 1977년에 4단과5단을, 1978년에 6단을, 1980년에 7단을, 1985년에 8단을, 1986년에 9단을 땄다.
당대 시수꾼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려졌고, 전국대회에서 개인전 우승을 한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많큼 많았는데, 마음은 늘 겸손하여 <활은 80%가 운이 따라주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2등도 3등도 다 명궁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하상덕(준비중)
안석흥(준비중)
김미이
김미이(金未伊) 여무사의 호는 향촌(香村)이고 아명은 향자(香子)로, 본명보다는 향촌이라는 호를 많이 쓴다. 1929년 경남 사천에서 경주 김씨 경팔(慶八)의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 몸이 매우 허약하였는데, 열 아홉 살 되던 해인 1947년에, 사천산성에 위치한 관덕정에서 활쏘기하는 것을 우연히 구경하다가 활쏘기가 건강, 특히 위장병에 좋다는 조삼동(당시 사범)과 목주영(총무)의 설명을 듣고 집궁하였다.(사천 관덕정은 1918년에 생긴 유서깊은 활터로 당시 전국의 정은 27개였음) 집궁후 열심히 습사한 결과 90일만에 몰기를 하였고, 활을 쏘면서 원래 허약했던 몸은 점차 건강해졌다.
4287년 마산의 추산정에서 실시한 궁술대회에서 여무사 부문 우승을 시작으로 입상 기록은 이루 다 헬 수 없을 정도이며 개인 우승만도 20차례나 하였다. 1998년에는 전국대회 10회 우승을 축하하는 기념비를 창림정에 세웠다.
향촌은 궁체가 특히 아름다워서 대회장에 나가면 사람들로부터 나비 할머니 왔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였는데, 이는 발시할 때 줌손을 과녁쪽으로 밀고 동시에 깍지손을 아주 가볍게 떼면서 뒤로 시원스럽게 내뻗는 동작이 마치 봄바람에 나비가 날갯짓을 하는 모양과 같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그리하여 나비깍지라는 애칭을 얻었으며, 아름다운 여무사 궁체의 모범이 되어 1954년에는 전주 천양정에서 주최한 대회에서 체법상(體法賞)을 수상하였다.
1982년에는 사천 관덕정에서 진주 창림정으로 활터를 옮겼는데, 사람들은 보통 향촌할매라고 불렀다. 평상시 언행이 아주 조심스럽고 조용하여 뭇 한량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는데, 혹시 대회장에서 행동거지가 눈에 거슬리는 여무사가 있으면 조용히 타일러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실수를 하지 않도록 지도해주곤 하였다. 칠순 나이에도 쪽진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활터에 나와서 스스로 각궁을 얹어 활을 냈다. 좌궁인데 칠순 노인답지 않게 궁체가 아주 아름다워서, 연한 분홍색 한복을 입고 사대에 선 모습은 마치 먼길을 날아온 홍학이 내려앉는 듯한 우아한 자태이다.
2001년 8월 26일에는 사천 관덕정과 온깍지궁사회의 공동주관으로 경남 사천 관덕정에서 활의 역사상 보기 드문 풍속인 납궁례(納弓禮)를 행하고 무림를 떠나 한 평범한 자연인으로 돌아갔으니, 시작은 있으되 끝은 없기 다반사인 강호에 사습의 시작과 끝을 분명히 공표하여 국궁사의 살아있는 사표로 영원속에 우뚝 선 자취를 남기었다. 2002년 3월 21일 입산하였으니, 향년 7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