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무관 김수정 장군의 교지와 육량전
춘천에 사는 김성인 접장(가평 보납정 사원)이 자신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교지를 온깍지활쏘기학교에 소개했다. 여기서는 김성인 접장의 허락을 얻어서 그 교지에 관한 정보를 소개하고자 한다. 교지의 주인공인 김수정(金壽鼎)은 병자호란때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 청태종의 부마인 백양고라를 활로 쏘아 사살하여 '충양공(忠襄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김준룡 장군의 후손이다.
敎旨
金壽鼎爲
折衝將軍
者
乾隆九年三月二十二日
절충장군은 조선시대의 벼슬아치인 문반과 무반 중에서 무반의 최고위직인 정3품 당상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3품은 당상관과 당하관이 나뉘는 계급인데, 정3품 당상관을 무반에서는 절충장군이라고 불렀고, 당하관을 어모장군이라고 불렀다. 문반에서는 정3품 당상관을 통정대부라고 하고 당하관을 통훈대부라고 한다. 무반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 품계는 당상관 절충장군이다. 만약에 무반 출신의 장군이 더 높은 품계를 받으려면 문반에게 제수되는 품계로 받게 된다.
이 교지가 하사된 건륭9년은 영조 20년으로, 서기로는 1744년이다. 김성인 접장의 말에 따르면 이 분은 사도세자와 가까이지내며 호위를 하였다고 한다. 이 때는 사도세자가 살아있던 시절이니 호위하던 무관도 그 권세가 한창 잘 나가던 때였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날짜를 쓴 행 앞쪽에 작은 글씨로 이 교지를 받은 상황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다.
九步三矢一百五十五步入格
慕華館 觀武才敎是時六兩一矢一百五十四步二矢一百五十
이상은 세로로 쓰인 것을 가로롤 옮겨쓴 것인데, 문장의 구성이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보통 옛 한문은 세로쓰기인데, 그 관행으로 읽으면 이 문장이 이상해진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면 밑의 문장을 먼저 쓰고 칸이 부족해지자 오른쪽에 이어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문장의 순서를 바로 잡으면 다음과 같다.
慕華館 觀武才敎是時六兩一矢一百五十四步二矢一百五十
九步三矢一百五十五步入格加資事承
傳
모화관 관무재에서 (임금의) 가르침이 있었는데(임금이 친히 봤다는 뜻), 이때 육량전 첫번째 살이 154보 나갔고, 두 번째 살이 159보 나갔고 세 번째 살이 155보 나가서 시험에 합격하여 벼슬을 더했다.
모화관은 조선시대 무과를 치르던 2곳 중의 한 장소이다. 무과를 치를 때는 전국의 응시자들을 모아서 치르는데, 현 장충단 공원의 훈련원이 주된 장소였다. 그렇지만 인원이 많으면 현재의 독립문 자리인 모화관에서 나눠치렀다. 그래서 각기 1소와 2소라고 불렀다. 모화관에는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군대가 머문 병영이 있었다. 관무재는 정식 과거가 아니라 병영에 근무하는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특별히 치르는 무과 과거를 말한다. 임금이 직접 갈 때나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약식으로 치르는 여러 가지 과거가 있는데, 그럴 때 간단히 치러서 특별히 승급시키거나 벼슬을 높여주기도 한다. 정식 무과는 보통 7가지 정도의 무예를 치르는데, 이런 간이 무과에서는 병사의 능력을 테스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종목 한둘을 정해서 하기도 한다. 이때 모화관의 관무재에서는 육량으로 치른 모양이다.
교지는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임명장 같은 것이다. 황제가 내릴 때는 칙령이라고 하고 왕이 내릴 때는 교지라고 한다. 중국이 대국이어서 황제가 통치하고 황제가 내래는 명령은 칙령인데 반해, 조선은 황제국의 한 부분인 왕국이기 때문에 왕의 명령인 교지라고 쓴 것이다. 조선의 최초 황제는 고종이다. 그래서 고종 때의 첩지를 보면 교지가 아니라 칙령이라고 나온다.
이 교지에는 원래 벼슬이름과 그것을 내린 날짜만 나오고 다른 잡다한 기록은 적지 않는다. 그런데 이 교지에는 이 교지를 받게된 동기와 장소까지도 나온다. 이것이 원래 그 교지를 작성할 때 쓰인 것인지, 아니면 받은 사람이나 그의 후손이 그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기 위하여 덧붙어 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글씨 크기나 행나눔이 엉성한 것으로 보아서는 교지 작성 때 쓴 문구가 아니라 나중에 덧붙여 써둔 것 같다. 좀 더 확인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2017년 말에 이건호 접장이 파주 영집궁시박물관의 협조로 조선시대의 육량전을 복원한 바 있다. 그때 부산 사직정과 청주의 장수바위터에서 실제로 시사를 해보았을 때 멀리 나간 거리가 60~70미터 정도였다. 조선시대 무과의 육량전 기본 거리가 80보인 것을 감안하면 그것을 절반 조금 더 나간 정도였다. 그만큼 무겁고 굉장한 화살이었다. 그런데 이 교지에 적힌 최고 거리는 159보로 무과 기준 거리의 곱절이나 나갔으니, 이 교지를 받은 사람은 정말 대단한 장사임을 알아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무골이라고 하고, 시쳇말로는 '용가리 통뼈'라고 하는데, 정말 타고난 무사가 아니면 이런 힘을 낼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특별한 기록이 있어 관심을 끈다. 즉 <국궁논문집 10>(온깍지궁사회, 2018)에 이건호 접장이 육량전에 관한 자료를 정리한 논문 <육량전 소고>에 김수정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즉 논문집 20쪽에 영조 때의 문신 조명채가 일본 사신으로 갔다가 정리한 기록인 <봉사일본시문견록>에 육량전 얘기가 나오고 거기서 김수정이라는 이름이 발견된다. 같은 시대이기 때문에 이 교지를 받은 사람일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우두머리가 사는 관백궁에 동행한 인물이 몇 명 거론되었는데, 장사군관 김수정이라는 이름이 거기에 나온다.
이런 교지도 특별하지만, 교지에 이런 기록이 남아있는 사례도 조선시대 연구 사료로는 정말 더할나위 없이 높은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김성인 접장이 온깍지활쏘기학교에 소개한 교지는 이것뿐만이 아니라 몇 장 더 있다. 기회가 되는 대로 앞으로 더 소개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