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역사 6월6일
작성자悼先(權五常)
6월 6일인 오늘은 올해로 67회 째를 맞는 현충일입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애국선열들과 국군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충절을 추모하는 날이죠. 이날은 집집마다 애도의 뜻을 표하는
뜻인 조기를 게양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에게 조의를 표하기도 하는데요.
여러분은 현충일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오늘의역사 6월6일🌹
🌳04년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한국 영토의 3할이 넘는 황무지의 개간 건을 요구.
🌳18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사업 완료
🌳25년 조선 총독부, 조선사 편수회 설치 : 식민 사관 통한 한국사 왜곡 작업의 본부 역할.
🌳26년 6·10만세 운동계획 탄로남 : 200여명이 검거됨
🌳37년 수양동우회 사건(흥사단 사건)
🌳46년 졸업가 제정(윤석중 작사 정순철 작곡)
🌳49년 서울시경,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를 포위하고, 소속 특경대 해산
🌳53년 아이젠하워 미대통령,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용의 친서 송부
🌳56년 현충일 제정-국립 묘지에서 합동 위령제, 서울 동작동 제1회 현충일 추도식
🌳61년 국가재건 비상조치법 공포
🌳62년 고려대학생, 한ㆍ미행정협정촉구 데모. 8일 서울大生도 행정협정 촉구 데모
🌳84년 입주자폭행 연립건축사장체포-남의 땅에 집짓고 중도금 챙겨 달아나
🌳85년 한일상공그룹, 105억 부도
🌳87년 서울 29개 대학 학생 1500여명, 고려대서 연합 대동문화제 열고 시위
🌳89년 대우조선 관리직 3000여명 사표, 노조측 불법집회 폭행에 항의
🌳90년 노태우 대통령, 부시 미국 대통령 정상회담서 남북한관계개선에 한미 긴밀 협력 합의
🌳91년 검찰, 밀입북사건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던 문익환 목사(73) 재수감
🌳91년 전국 6대도시와 경기도 지방의 2주택 이상 소유자가 19만5214명, 3주택 이상은 2만8649명.
🌳93년 뒤셀도르프 싱크로나이즈드 수영 에이지그룹 국제대회에서 한국사상 첫 개인·단체 우승.
🌳93년 중국 전인대부위원장 전기운, 의회지도자로는 처음 우리 나라 방문
🌳98년 김대중 대통령 미국 국빈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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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6월 6일.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 발발.
만주에서 삼둔자 전투가 종결된 후 일어난 전투인데,
당시 홍범도 장군 등이 대한독립군을 이끌어
큰 승리를 거둔 전투임.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참패하고 나서 탄압으로 대한독립군에게 복수를
해 보려고 했으나, 뒤에 자기들이 더 손해를
보는 더 큰 대첩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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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6월 6일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
기습 상륙 작전을 감행하고 있는 연합군 병사들.
2차대전 중 독일의 히틀러는 1944년 봄부터 영국 남부 해안에
수십만명의 연합군이 몰려들고 다량의 무기와 탄약, 보급품 등이
쌓이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상륙지점을 예측하는 데 골몰한다.
상륙일자도 오리무중이었다. 상륙 저지 역할을 맡은 롬멜은
“악천후로 연합군이 1주일 이내에는 상륙할 수 없다”며
전선을 비우고 생일을 맞은 아내 품으로 달려갔다.
당초 6월 5일로 예정됐던 상륙이 하루 연기될 정도로
1944년 6월은 25년 이래 최악의 악천후를 기록했다.
6월 6일, 마침내 ‘D-데이’가 결정됐다.
작전명 ‘오벌 로드 작전’. 아이젠하워가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고
몽고메리가 상륙을 지휘했다. 상륙지점은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
6월 5일 늦은 밤, 40개 사단의 연합군 16만명과
2000척의 함정이 영국을 출발했다.상륙용 주정(舟艇)도 4000척이나 됐고,
전투기 만도 1만1000대나 돼 7초 간격으로 이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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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6일 ...오전 8시 30분쯤 윤기병 당시 중부경찰서장의 지휘로
중부서 및 서울시내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 80여명이 남대문로 2가에 있는
반민특위(반민족 행위특별조사위원회) 청사 앞에 도착, 삼엄한 포위작전에 들어갔다.
이들은 우선 출근길의 특위 조사관들을 연행, 무기를 압수한 뒤 청사에 난입했다.
경찰은 특위 조사관들에게 주먹과 발길질을 하면서 책상 위의 서류를 찢었다.
직원 주소록 경비전화 자동차 4대 등도 압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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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경찰, 반민특위 습격사건
6월 6일. 사람들은 흔히 나라를 위해
순국하신 분들을 기억하는 현충일로 알고 있다.
그런데 1949년 6월 6일. 우리 역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바로 ‘반민특위습격사건’이다.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의 약칭으로,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설치했던 특별위원회였다.
제헌국회는 정부 수립을 앞두고 애국선열의
넋을 위로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 위해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헌법에 두었다. 이에 따라 제헌국회는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 제정에 착수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1948년 9월 22일에 공포되었으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같은 해 1
0월 22일에 설치되었다.
반민특위는 각 도에서 지명된 국회의원
총 10명을 조사위원으로 삼았다.
또한 이들의 효율적 활동을 위해서 중앙사무국과
각 도에 지방사무국을 두었고, 반민족행위자의
기소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도
구성되었다. 즉 반민특위는 헌법에 의하여 제정된 기구로,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등이 함께 구성하였고,
사법권과 경찰권을 가진 기관이었다는 것이다.
6월 6일 새벽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지휘하는
50여 명의 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였다.
건물 주변은 기마경찰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총을 든 경찰관들은 닥치는대로 특위 직원들을
붙잡아 두둘겨 패면서 쓰리쿼터(M37 트럭)에 실었다.
여기저기서 주먹과 발길질이 날라오면서 욕설을 해댔다.
모두 35명이 끌려 가고 통신기기와 호신용 무기,
서류 전체를 압수해갔다.
국민적 염원을 담아 출범한 반민특위는
이승만과 그의 주변 친일세력들의 줄기찬
방해책동으로 업무개시 8개월 만인
1949년 9월 22일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로써 친일파 청산은 후세들에게 역사적
과제로 남겨졌고,이후 한국사회는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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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현충일 추도식 모습(1968년)
제13회 현충일 추도식 모습(1968년)
국가기록원은 ‘이달의 기록’으로 ‘현충일 행사’ 관련기록물을 선정,
나라기록포털(http://contents.archives.go.kr)에서
온라인서비스 중이라고 3일 밝혔다.
지난 1일부터 제공 중인 기록물은
▲현충일 제정 및 행사관련 문서 9건
▲대한뉴스 4건 ▲행사사진 3건이다.
1956년 현충기념일 제정과 공휴일 제정에 관한 건(제39회),
1958년 제3회 현충일 행사 실시의 건,
제28회 현충일 추념행사 및 원호의 달 행사계획(제19회) 등이 눈길을 끈다.
영상으로 된 1957년 제2회 현충일,
1971년 제16회 현충일(충혼은 영원히)
관련소식 등 ‘대한뉴스’ 4건도 이채롭다.
1956년에 작성된 '현충기념일 제정과 공휴일 제정에 관한 건'(제39회) 문서
1956년에 작성된 '현충기념일 제정과 공휴일 제정에 관한 건'(제39회) 문서
‘현충일’은 1956년 4월19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1145호)을 고쳐 6월6일을
‘현충기념일’로 만들고 그 해 6월6일 첫 기념행사를 가졌다.
국무회의록(제1회-127회)에 담긴 ‘현충기념일 제정과
공휴일 제정에 관한 건’(제39회)(1959년 4월16일 총무처)에
따르면 전몰군인의 추도식을
해마다 6월6일 열기로 하고 공휴일로 의결했다.
현충일(현충기념일)이 만들어지면서
1952~1955년 6?25전쟁 중 산화한 전몰장병들을 추모하기위해
군 내부행사로 했던 3군 합동위령제가 국민적 행사로 격상됐다.
올해 56회째를 맞는 현충일행사는 현충일 제정 뒤
해마다 범정부적으로 전국차원에서 열려왔고
추념식 주관부서와 내용에 변화가 있었다.
주관부서는 기존의 국방부에서 현충일이 만들어진 뒤
‘총무처’(현재 행정안전부)로 바뀌었다가
1983년 제28회 행사 때부터 국가보훈처로 넘어갔다.
제1회 현충일 추도식 참가 유가족 오열하는 모습(1956년)
제1회 현충일 추도식 참가 유가족 오열하는 모습(1956년)
식순내용도 달라졌다. ‘총무처’가 만든 ‘현충일 행사 계획안’에
따르면 제3회 계획안(1958년)에 ‘애국가 제창’,
제13회 계획안(1968)에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제28회 계획안(1983년)엔 ‘현충의 노래’,
제39회 계획안(1994년)엔 ‘헌시 낭송’이 들어있다.
지금은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 묵념, 헌화 및 분향, 추념사,
헌시 낭송, 현충의 노래 제창’ 순으로 이어지고 있다.
추념대상은 현충일 제정 초기엔 6?25전쟁의 전몰장병위주였다가
1965년 3월30일 대통령령으로 ‘국군묘지’가
‘국립묘지’로 되면서 국립묘지 안장대상자에 베트남전쟁 전사자 및
항일운동을 한 순국선열이 들어가 그 대상이 넓어졌다.
추념사내용은 해마다 호국영령을 추모하면서
정치?사회적 지향점을 반영해온 국민들 힘을 모으고자 했다.
1960년대는 ‘반공정신’을, 1970년대는 ‘경제개발’과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육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터넷 소통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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