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공식품 시대, 뒤처진 한국의 라벨링 제도
"초가공 자체보다 정보 공백이 문제"... K-식문화 맞춤형 '경고 라벨' 도입 논의 서둘러야
요즘 온라인에서는 과자·냉동식품·가공육류·가당 음료 같은 초가공식품(Ultra-Processed Foods)이 위험하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다. “초가공식품이 만성질환을 늘린다”, “중독을 유발한다”는 정보가 잇따르며,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어떤 제품이 안전한지, 무엇이 문제인지 혼란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소비자가 가장 먼저 접하는 식품 라벨만으로는 이러한 논란의 핵심인 위험도를 판단하기 어렵다.
제품 뒷면에는 칼로리, 지방, 당류, 나트륨 같은 숫자가 적혀 있지만, 이 숫자들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당 식품이 어느 정도까지 주의가 필요한지를 한눈에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영양성분이 제공되고 있지만 일반 소비자가 제품 간 차이나 주의 필요성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라벨은 존재하지만, 소비자의 선택을 돕는 정보로 기능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초가공식품은 과자·시리얼·라면·햄·가당 음료처럼 집에서 만들기 어려운 정제당, 합성 감미료, 향료, 가공조미료 등 산업적 성분이 사용된 식품으로 일상적으로 접하는 대다수의 가공 식품들이 이에 해당된다. 이 개념은 브라질 상파울루대학교의 카를로스 몬테이루 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등장했으며 식품의 가공 정도를 1단계에서 4단계로 나누는 ‘NOVA 분류체계’ 4단계에 해당하는 식품을 말한다.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이 분류체계를 참고하며 초가공식품 섭취 증가가 비만·심혈관 질환 위험과 관련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초가공식품 논의가 확산되며 소비자 관심도 커졌지만, 한국에서는 초가공 여부를 판단할 제도적 기준이 마련돼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소비자는 같은 카테고리의 식품이라도 어떤 제품이 더 위험한지 추측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반면 해외는 초가공식품 개념을 직접 표시하지는 않지만, 소비자가 영양 위험요인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 라벨링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식품 포장 전면에 A부터 E까지의 알파벳을 표시해 영양 균형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누트리 스코어(Nutri-Score)를 도입했고, 영국은 지방·당류·나트륨을 빨강·노랑·초록으로 경고하는 트래픽 라이트 라벨링(Traffic Light Labeling)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출처: 영국 식품기준처에서 표기한 영양별 위험도 신호등 라벨
칠레·멕시코·페루 등 라틴아메리 일부 국가는 설탕·지방이 기준을 넘으면 포장 전면에 ‘고당’, ‘고지방’ 경고라벨을 의무적으로 표시하도록 하고 있다. 이 같은 전면 경고라벨은 소비자가 별도의 계산이나 비교 없이도 해당 제품이 주의가 필요한 식품인지 즉시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처럼 해외에서는 라벨을 통해 소비자가 제품의 위험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발전시켜왔다.
반면 한국의 라벨은 ‘총당류 14g, 나트륨 560mg’ 같은 숫자나 영양성분을 나열하는 형태이기에 일반 소비자가 제품의 차이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포장 전면(FOP) 라벨링이 사실상 부재한 만큼 소비자는 성분표를 읽고 검색하며 비교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라벨링 정보 공백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초가공식품에 대한 공포가 커지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초가공식품 전체를 일괄적으로 ‘위험’으로 보는 시각은 과장된 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문제의 핵심은 초가공식품 자체보다, 소비자가 어 제품이 주의가 필요한지 구별할 수 없는 정보 구조에 있다는 설명이다.
이광원 한국식품안전연구원장은 "가당음료·가공육류·고나트륨 즉석식품 등 주의가 필요한 품목은 분명 존재하지만, 통곡물 기반 제품이나 발효식품처럼 초가공식품이면서도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제품군도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그는 “초가공이라는 범주 자체를 경계할 것이 아니라, 어떤 제품이 위험하고 어떤 제품이 괜찮은지 소비자가 ‘알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에도 누트리 스코어 같은 라벨링 제도가 필요하냐는 질문에 대해 이 원장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현재의 영양성분표는 소비자가 이해하기 어려워 직관적 정보가 필요하며, 영국의 트래픽 라이트 도입 이후 식품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나트륨, 당류를 줄인 사례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기에 필요하지만 해외 제도를 그대로 도입하기 보다 한국의 식문화에 맞는 ‘한국형 모델’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식품의약품안전처는 현재 색상·모양을 이용하여 영양정보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주요 나트륨 급원식품을 대상으로 한 나트륨 비교표시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현재 국민의 알 권리 및 식품 선택권 강화를 위해 모든 가공식품의 영양표시 의무확대를 3단계에 걸쳐 추진하고 있다고 답했다.
식약처에 따르면 영양표시 의무 확대는 2단계가 26년 1월 1일 최종 시행되며, 마지막 3단계가 업체 규모에 따라 2026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어 2028년 1월 1일 시행 완료 예정이다. 영양성분표 구성이나 주의표시 개선 등 추가적인 개선은 모든 가공식품의 영양표시 이후에 신중하게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아울러 식약처는 국민이 영양성분표를 이해하고 실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영표시 읽는 법’에 대한 안내 책자 및 영양표시 가이드라인 등을 만들어서 배포하고 있으며, 국민 대상 영양표시제도 교육·홍보를 통해 인식도를 높이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