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태억(趙泰億)의 학여울 광연정(曠然亭) |
| 조태억(謙齋 趙泰億, 1675~1728)이 살던 학탄(鶴灘)은 오늘날 대치동의 학여울이다. 지금은 탄천과 양재천이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들지만, 을축년(乙丑年, 1925년) 대홍수 전에는 한강의 본류가 송파나루에서 학여울을 지났다. 『동국여지도』 나 『해동지도』 등 조선 후기 지도에는 양재천과 탄천이 각기 한강과 바로 만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고 그 사이를 학탄이라 하였다. 학탄은 우리 문화사에서 그 자취가 뚜렷하니 그 주인 조태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
| 조태억(趙泰億)은 본관이 양주(楊州)이며, 자는 대년(大年)이다. 태중에 있을 때부터 말을 할 줄 알았기에 벼슬하지 않아도 녹봉을 타고 났다하여 태록당(胎祿堂)이라는 호도 사용하였다. |
| 조태억(趙泰億)은 젊은 시절 문한(文翰)의 벼슬을 두루 지내고 승승장구하였지만 1712년 통신사(通信士)로 일본에 다녀오자마자 왕명을 욕되게 했다 하여 벼슬에서 쫓겨났다. 용산에서 잠시 머물다가 형이 살던 미음(渼陰)의 적의당(適意堂)에 우거하였다. 그리고 1713년 1월 사면이 이루어지자 학탄으로 집을 옮겼다. 그 후 호위대장과 대제학을 거쳐 좌의정에까지 올랐지만, 도성 안에 머물러 있기 어려운 정국이 되면 학탄으로 물러나곤 하였다. 그러니 학탄은 조태억의 마음의 안식처라 할 수 있다. |
| 조태억(聖集 趙泰億)이 학탄에 처음 마련한 정자는 조그만 초가 건물이었다. 이 정자가 완성되자 광나루에 살던 송성명(松石 宋成明, 1674~1740)이 축하의 시를 보냈었고, 이에 조태억은 시 「송성집이여학탄모정기성, 송시상하주차기운(宋聖集 以余鶴灘茅亭旣成. 送詩相賀 走次其韵)」를 지어 화답했다. |
| 宋聖集 以余鶴灘茅亭旣成. 送詩相賀 走次其韵 / 조태억(趙泰億) 『겸재집(謙齋集)』 권10 (송성명이 내 학탄의 초가 정자가 이루어졌다고 시를 지어 축하하기에 바로 차운하다) | ||
| 君家兄弟二亭成 南岸新居我亦營 | 군가형제이정성 남안신거아역영 | 그대 형제의 두 정자가 완성되었고 남쪽 강변에 새 집을 내가 또한 조영했다네 |
| 泉土舊穪盤谷美 江濤近接廣陵平 | 천토구칭반곡미 강도근접광릉평 | 샘과 땅은 예전 반곡(盤谷)의 아름다움 갖추었고 강과 파도는 광나루(廣陵)에 인접하였네 |
| 吟詩不惜傳筒去 乘興還須鼔枻行 | 음시불석전통법 승흥환수고예행 | 지은 시는 애석하지 않게 통을 보내 전했으나 흥에 돌아오게 해 올라타 노 두드리며 가네 |
| 何幸晩年同此樂 世間榮辱一毫輕 | 하행만년동차락 세간영욕일호경 | 만년에 이러한 즐거움 누리는 것 얼마나 다행인가 세상의 영욕은 털 하나같이 가벼운 것이니 |
| •廣陵=廣津=광나루. 松江=송파강 | ||
| 송성명(宋成明)과 송정명(宋正明) 형제는 광나루에 나란히 별서를 경영하였다. 조태억이 광나루 송성명의 별서에서 묵으면서 즉흥적으로 지은 시 「야숙송군집광릉별서구호(夜宿宋君集廣陵別墅口號)」에서 “송파강 물이 광나루 굽이에 접해있어, 봄바람에 한 번 노저으면 상류로 올라갈 수 있다네(松江水接廣津隈 一棹春風溯上來)”라 한 대로 학여울과 광나루는 뱃길로 지척의 거리였기에 조태억과 송성명은 자주 오가면서 수 많은 시를 지었다. |
| 조태억(趙泰億)은 당벌(黨閥)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기에 한가히 학여울을 즐기기 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짧은 여가를 이곳에서 보내었다. 그래서 그의 문집에는 학여울을 배경으로 한 시가 많거니와 자신의 호도 학탄(鶴灘)이라 하였다. 그리고 ‘광연정(曠然亭)’이라는 정자를 하나 더 세웠다. |
| 1716년 무렵의 시에서 부터 광연정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무렵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광연정(曠然亭)은 가운데 2칸의 온돌방을 넣어 겨울을 대비하였고 창문을 8개 달아 여름에 시원하게 했으며 4면에 작은 마루를 둘렀다. 광연정은 광나루와 저자도, 남한산성 사이에 있었기에 인근에 사는 벗들과 시회의 공간으로 자리하였다. |
| 六月二十五日 余與宋子和令公 並騎出湖上. 南漢李府尹君平新陞北伯 未及交龜 自山城携酒至. 金薇垣明仲 時在楮島 乘小艇溯來 相與晤言 拈韵聯句. 宋吏郞聖集偸閑乍出 殊是分外佳會 篇中及之. 子和 時爲大司成 (6월 25일 내가 송자화 영공과 함께 나란히 말을 몰아 동호로 나갔다. 남한산성 부윤 이군평이 새로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교대를 하기 전이라 술을 들고 찾아갔다. 사간 김명중이 저자도에 있어 작은 배를 타고 물을 거슬러 올라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운자를 내어 연구를 지었다. 이조좌랑 송정명이 한가한 틈을 타 잠시오니 더욱 아름다운 모임이 되었기에 시 속에서 언급하였다. 자화 송성명은 이때 대사성이었다. ) / 조태억(趙泰億) 『겸재집(謙齋集)』 권11 | ||
| (和) 十里平沙竝騎回 曠然亭作四仙㙜 | 십리평사병기회 광연정작사선대 | (송정명) 십리 백사장을 나란히 말을 타고 오니 광연정은 네 신선이 노니는 누대가 되었구나 |
| (平) 帆檣亂掠軒簷過 魚果頻登几案來 | 범장난략헌첨과 어과빈등궤안래 | (이탄) 범선 돛대들은 처마를 어지럽게 노략질하니 생선과 과일은 자주 식탁위에 올라오네 |
| (明) 江漢風流歸我輩 關河鎖鑰仗君才 | 강한풍류귀아배 관하쇄약장군재 | (김계환) 한강의 풍류는 우리들의 몫인데 변방을 지키는 건 그대(李坦) 재주에 의지할 듯 |
| (年) 官閑又見山郞出 (和) 隔岸招呼促擧杯 | 관한우견산낭출 격안초호촉거배 | (조태억) 한가한 관리 또 보자고해 산에서 불러내어 (송정명) 언덕 너머로 초대하여 술잔 들기 재쵹하네 |
| 긴 제목에 자세한 사연이 1716년 6월 25일 조태억은 광나루의 송정명과 함께 배에 올랐다. 저자도를 거쳐 자신의 별서 학여울의 광연정으로 왔다. 이때 남한산성에 있던 광주부사 이탄(李坦, 1669~?)이 함경도 관찰사로 가게 되어 전별연을 겸한 자리를 마련하였다. 저자도에 살아 호를 저호(楮湖)라 하고 한 김계환(金啓煥, 1669~?)도 자리를 함께 하였다. 이들이 모여 사선(四仙)이라 자처할 정도로 풍류를 즐겼다. 여기에 더하여 송성명까지 찾아왔으니 그 즐거움이 대단하였을 것이다. |
| ‘광연정(曠然亭)’의 이름은 중국 위나라 죽림칠현인 혜강(嵇康)이 「양생론(養生論)」에서 이른, “마음이 비어 우환이 없고, 고요하게 생각조차 없다네(曠然無憂患 寂然無思慮)”에서 나온 것으로, 벼슬살이에 욕심을 끊고 대자연 속에서 살고자 한 뜻을 표방한 것으로 가늠된다. |
| 그렇다고 조태억(趙泰億)이 완전한 귀거래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그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1724년 호조판서로 대제학을 겸하고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어 호위대장을 겸하였다. 이듬해인 1725년 좌익정에 올랐지만 바로 벼슬에서 쫓겨났고 대제학과 호위대장의 직임도 모두 벗었다. 그리고 7월 삭탈관직에 문외출송(門外出送)의 벌을 받았다. 이러한 위기에서 학여울의 광연정은 조태억에게는 위안의 공간이었다. |
| 題曠然亭(광연정에 쓰다) / 조태억(趙泰億) 『겸재집(謙齋集)』 권19 | ||
| 軒檻中央置二房 八窓開闔備暄凉 | 헌함중앙치이방 팔창개합비훤량 | 헌(軒)에 난간두고 중앙에 방 두 칸을 넣고 창 여덟개 달아 더위와 추위를 막았지 |
| 眞同謝眺靑山宅 敢擬裵公綠野堂 | 진동사조청산택 감의배공녹야당 | 정말 사조(謝眺)의 청산택과 한가지요 감히 배도의 녹야당(綠野堂)에 비기려 든다네 |
| 終日捲簾看嶽色 有詩投釣弄波光 | 종일권렴간악색 유시투조롱파광 | 하루 종일 발(簾) 거두고 산빛을 보는데 가끔 낚시대 드리워 물결을 희롱했지 |
| 江湖廊庙憂何間 夜夜懸心北斗傍 | 강호낭묘우하간 야야현심북두방 | 강호(江湖)의 삶과 조정의 근심이 어찌 다르랴만 밤이면 밤마다 마음은 북두성(北斗) 옆을 서성이네 |
| 청산에 집을 짓고 한가로운 삶을 산 사조(謝眺)나 녹야당(綠野堂)에서 유유자적한 배도(裵度)에 부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대신으로 구사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을 수 없었다. 1726년 「感君恩(감군은)」 70수를 지어 국왕 영조에 대한 충성을 표방하였다. 1727년 좌의정으로 복귀하고 이듬해 호위대장도 겸임하였으나 그 해 여름에 병이 깊어져 사직하고 얼마 있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
| 시조의 작가로 이름이 높은, 자가 사수(士受)인 이정보(三洲 李鼎輔, 1693~1766)도 학탄(鶴灘)에 별업을 꾸몄으니, 학여울의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다. 남유용(雷淵 南有容, 1698~1773)이 쓴 이정보의 묘지명「判中樞府事李公墓表」을 보면, “한가한 날 학탄의 별업에서 거문고를 끼고 노래를 부르면서 배를 타고 강을 오르내리는데 훤한 얼굴과 밝은 눈동자가 아름다워 멀리서 보면 신선 같았다”고 하였다. 이정보는 이정귀와 이명한, 이일상의 후손으로 스스로 대제학에 올랐지만 불행히도 그의 문집이 전하지 않아 그가 사랑한 학여울의 모습은 확인할 수 없다. 혹 그가 지었다는 시조 “강산도 좋을시고 鳳凰臺가 떠왔는가. 삼산은 半落靑天外요 二水는 中分白鷺洲로다. 李白이 이제 있어도 이 景밖에는 못 쓰리라”라 한 것이 이백의 「금릉 봉화대에 올라서(登金陵鳳凰臺)」의 표현을 빌려 그가 살던 학여울을 묘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수(二水)는 잠실섬을 가운데 두고 한강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을 이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정보의 호 삼주(三洲)가 학여울의 세 섬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
| 끝. |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