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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조경 문헌(文獻)

[朝鮮時代 文化空間] 임수간(任守幹)의 둔촌의 별서 둔재(遁齋)

작성자석산|작성시간26.06.15|조회수36 목록 댓글 0
임수간(任守幹)의 둔촌의 별서 둔재(遁齋)
 미사리에서 북서쪽으로 한강의 휘어서 흐르는데, 그 일대는 태호(太湖) 혹은 미호(渼湖)라 불렸고 그 북쪽 남양주 쪽을 미피(渼陂) 또는 미음(渼陰)이라 하였다.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의 호가 태호(太湖)인데 바로 이곳을 가리킨다. 남이공(雪蓑 南以恭, 1565~1640)의 몽오정(夢烏亭)이 있어 문인들의 출입이 잦았다.  
 여기서 다시 한강이 서쪽으로 흘러 광나루를 지나면 물길이 나누어져 지류인 신천이 한강쪽으로 흘러가고, 본류가 송파나루와 삼전나루를 지나 학여울에서 탄천을 만나고 양재천과 합류하며, 봉은사 기슭을 감도는 곳에서 다시 신천과 만나 큰 강을 이루게 되어 있었다. 송파강은 바로 풍납동에서 학여울을 이르는 구간을 이르던 말인데 지금은 석촌호수에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강이다. 송파강은 송강(松江)이라 하고 그 유역을 파상(坡上)이라고도 불렀다.  
 태호와 송파강 유역은 수많은 별서가 들어섰지만 특히 풍천 임씨(豊川任氏) 집안과 인연이 많았다. 임상원(恬軒 任相元, 1638~1697), 임수간(遯窩 任守幹, 1665~1721), 임광(任珖, 1686~1743), 임희성(在澗 任希聖, 1712~1783) 등 이 집안을 빛낸 문인들의 묘소가 모두 광주의 정평(庭坪)에 있었는데 지금의 하남 초일동(草一洞)으로 강동구 상일동과 접해 있는 곳이다. 
 자가 공보(公輔)인 임상원(任相元)의 집안은 대표적인 소론(少論)으로 최석정(存窩 崔錫鼎, 1646~1715), 최석항(損窩 崔錫恒, 1654~1724), 남구만(藥泉 南九萬, 1629~1711) 등과 교유가 깊었다. 
 임상원(任相元)은 숙종 연간 당쟁의 중심에 있었다. 1688년 도승지로 있을 때 남구만을 구원하다가 외직으로 쫓겨났고 이듬해 다시 탄핵을 받아 해직되어 광주로 물러나 우거하였다. 그의 집은 ‘한천정사(寒泉精舍)’라 하였는데, 광나루 동쪽, 그의 선영이 있던 정평(庭坪) 남쪽에 있었다.  
 한천정사(寒泉精舍) 주변으로는 아름다운 풍광이 없고 산등성이에 기대어 개미집처럼 인가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으며 조망을 할 만한 정자도 없었다. 그럼에도 임상원(任相元)은 이곳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소일하면서 평화를 얻었다. 주자(朱子)의 서재가 ‘한천재(寒泉齋)’이니 주자와 같은 학자의 뜻도 품었을 것이다.   
 임상원(任相元)은 5년 남짓 이곳에 기거하다가 1694년 다시 조정으로 나아가 도승지, 공조와 형조의 판서, 한성 판윤 등을 지내느라 당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다가 1687년 세상을 떠났고 정평의 선영에 묻혔다. 
 임상원(任相元)은 정평(庭坪) 이외에 둔촌(遁村)에도 집이 있었다. 풍천임씨 집안의 선영이 있는 정평에서 서쪽으로 몽촌토성 인근에 둔촌이 있었는데 곧 지금의 둔촌동 일대다. 둔촌은 고려 말의 문인 이집(李集, 1327~1387)의 호이기도 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암사동의 구암서원(龜巖書院)은 이 일대와 인연을 맺었던 이양중(西川 李養中, 1549~1591), 정성근(鄭誠謹, ?~1504), 정엽(守夢 鄭曄, 1563~1625), 오윤겸(楸灘 吳允謙, 1559~1636), 임숙영(疏菴 任叔英, 1576~1623) 등과 함께 그의 제사를 모신 서원이었다.   
 임상원(任相元)의 아들은 자가 용예(用譽)인 임수간(遯窩 任守幹, 1665~1721)은 정평보다 둔촌에 애정이 많았다. 임수건은 서른에 문과에 급제하였지만 이후 승승장구하여 7년 만에 누구나 선망하는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쟁에 말려 바로 파직되었는데 처음으로 겪은 좌절이었다. 1701년 임수간은 둔촌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곳에 새로운 정자를 하나 세웠다.  
新成小築 走筆示人(작은 집을 새로짓고 시를 지어 남에게 보이다) / 임수간(任守幹) 『둔와유고(遯窩遺稿)』 권1
群山圍大野  漢水流其中  군산위대야  한수유기중 여러 산이 큰 들판을 에워싸고 
 한강물이 그 가운데로 흐르네.
逶迤江南洲  村落似征篷  위이강남주 촌락사정봉 구불구불 강 남쪽의 모래톱의 
 촌락은 마치 떠가는 배처럼 생겼네
居民喜客至  淳厚古人風  거민희객지  순후고인풍 주민들은 손님 오는 거 기뻐하니 
 순박함은 옛사람의 풍속이라네
而我謝簪紱  如鳥脫樊籠  이아사잠불  여조탈번농 나는 감사하게도 벼슬살이 물러난 신세라 
 새가 조롱에서 탈출한 듯 기뻤지
雅懷在藪澤  一丘輕王公  아회재수택  일구경왕공 우아한 마음은 강호에 있으니 
 언덕 하나면 그뿐 왕후장상도 우습다네
卜居就閑曠  新營數畒宮  복거취한광  신영수무궁 한적하고 넓은 곳에 살려고
 몇 무(畝)의 땅에 새집을 지었다네
茅齋喜淸幽  松籬愛靑葱  모재희청유  송리애청총 초가는 조촐하고 호젓하여 좋은데 
 솔가지 울타리는 파란 빛이 예쁘다네.
湖光侵几席  山色滿窓櫳  호광침궤석  산색만창농 호수 빛은 방 안 책상까지 스며들고 
 산 빛은 창살에 가득 하다네
偃仰足容膝  便可息微躬  언앙족용슬  편가식미궁 발을 뻗기 족하니 지낼만하고 
 작고 궁핍하지만 편히 몸을 쉴수 있다네
結社邀隣叟  治圃課羣僮  결사요인수  치포과군동 이웃 노인 맞이하여 모임 만들고 
 아이들에게 채포(菜圃)의 책임을 맡겼다네.
黍麥種油油  棗栗栽叢叢  서맥종유유  조율재총총 기장과 보리는 쭉쭉 자라나고, 
 대추와 밤 나무는 빼곡이 심어 놓았다네.
常慕榮啓樂  敢辭原憲窮  상모영계락  감사원헌궁 늘 영계기(榮啓期)처럼 한가함을 즐기리니 
 원헌(原憲)처럼 가난한 들 어떠하랴!
養眞一室中  體舒神亦融  양진일실중  체서신역융 한 칸 방이라도 참됨을 기르면 
 욱신도 편하고 정신도 편한 법이라네.
開窓俯碧流  落霞度孤鴻  개창부벽류  낙하도고홍 창을 열어 굽어보면 푸른 물결 일렁이고 
 지는 노을에 외 기러기 날아가네.
興來時獨酌  不覺綠尊空  흥내시독작  불각녹준공 흥이 일때면 혼자 술 따르고 
 나도 모르게 술잔 비워버리네.
琴書聊自娛  耕釣甘長終  금서요자오  경작감장종 거문고와 책 즐김은 나의 즐거움이고 
 밭갈이와 낚시는 죽을 날까지 달갑다네.
倘佯江湖上  閒押碧繼翁  당양강호상  한압벽계옹 강호에서 유유자적하면서 
 한가하게 자연에서 늙어가는 노인이나 되리라.
•榮啓期(영계기): 춘추시대 사람으로 외물에 구애됨이 없이 유유자적한 삶을 산 은둔자이다. 공자가 태산에서 영계기를 만나 서문고를 연주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바, 공자가 영계기에게 ‘무엇이 그리 즐겁소’라 묻자, 영계기는 자족하는 삶이 주는 세 가지 즐거움을 답한바, 이를 영계기삼락(榮啓期三樂)이라 한다. 삼락은 사람이 존귀한데 사람(人)으로 태어난 것, 남존여비 세상에서 남자(男)로 태어난 것, 사람으로 장수(壽)한 것이다.   
•原憲(원헌): 공자의 제자로, 매우 궁핍하게 산 인물이다. 가난에 굴하지 않는 학문정신의 표방이다. 

 임수간(任守幹)은 벼슬에서 쫓겨난 것을 오히려 달가워하였다. 잠실과 송파를 가르는 송파강(松坡江) 강변에 초가를 짓고 사는 즐거움을 자랑하느라 시가 이렇게 길어졌다. 임수간은 이 무렵 송파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시를 많이 썼다. 이 시기 어느 늦봄에 제작한 시 「모춘(暮春)」 『遯窩遺稿권1』 에서 농부로 살아가는 임수간의 한가한 삶이 절로 떠오른다.  

 

暮春(늦봄) / 임수간(任守幹) 『둔와유고(遯窩遺稿)』 권1
太湖西北是吾廬.
  數架茅茨滿壁書   
  태호서북시오려  
수가모자만벽서
 큰 호수(太湖) 서북쪽 나의 집은 
 몇 칸 초가에 책이 가득하네
芳草長洲斜照外.
  桃花小雨暮春初   
 방초장주사조외 
도화소우모춘초
 고운풀 돋은 긴 모래톱에 석양이 비추니, 
 복사꽃 피고 가랑비 내려 봄이 막 저무네
逸妻籬下挑桑葉.
  稚子門前釣鱖魚   
  일처이하도상엽  
치자문전조궐어
 한가한 아내는 울타리 아래서 뽕잎을 뜯고, 
 아이는 문 앞에서 쏘가리(鱖)를 낚는다
自此老來將學稼.
  敢辭南畒把犂鋤  
  자차노래장학가  
감사남무파이서
 스스로 이렇게 늙어 농사일 배우려니, 
 어찌 남쪽 밭 이랑에 쟁기와 호미를 버려두랴
 임수간(任守幹)의 이러한 유유자적은 몇 달 지속하지 못하였다. 바로 홍문관 수찬으로 복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1704년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였을 것이므로 이 무렵은 다시 정평 선영 아래에 기거하였을 것이다. 1706년 탈상하고 다시 출사하여 홍문관에서 주로 근무하면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었다. 1709년에는 이조(이조), 이재(이재) 등과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었으니, 그의 역량이 입증되었다 하겠다. 또 1711년에는 일본통신사가 파견될 때 정사 조태억을 수행하여 부사로서 일본을 다녀왔다. 그러나 이것이 또 다른 빌미가 되어 벼슬에서 쫓겨나 다시 둔촌으로 내려왔다.    
 임상원(任相元)은 1712년 둔촌에 둔와(遯窩)를 짓고 자신의 호로도 삼았다. ‘遯窩’는 속세를 멀리하는 이들이 흔히 붙이는 집의 이름이다. 임수산은 둔와에 기문을 지어 걸었는데 그 이름을 둔재(遯齋)라고도 하였다. 
둔재기(遯齋記) / 임수간(任守幹) 『둔와유고(遯窩遺稿)』 권3
漢水之陰. 太湖之陽. 地脉有並水而來. 迤而陸者. 且十里. 有村曰屯. 或曰. 古屯兵之所故曰屯. 或曰. 地在江湖之間. 宜避世者之所藏遁. 故曰遁.
 한강 남쪽 태호의 북쪽에 지맥이 강물과 함께 나란히 와서 구불구불 땅이 된 것이 10리가 되는데, 마을이 있어 둔촌(屯村)이라 한다. 어떤 이는 예전 둔병(屯兵)이 있던 곳이라 둔천이라 하고, 어떤 이는 땅이 강호 사이에 있어 세상을 피해 사는 사람들이 숨어 살기에 알았다고 하여 둔촌(遁村)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余性本蹇拙. 不諧於世. 故携家而來遁于茲者. 今將五閏. 經營數年. 寢堂苟完. 而前爲精舍者凡四楹. 拓前而翼之. 西闢而爲室者二間. 鑿壁而爲龕者三架. 藏書幾數千卷. 卽余棲息之所也. 扁之曰望松.
 내 품성이 본디 소졸(蹇拙)하여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하여 가족을 이끌고 이곳에 와서 은둔하였는데 이제 5년이 되었다. 몇 년 경영하여 침소는 겨우 완비되었다. 그 앞에 정사(精舍)를 지은 것은 4칸이다. 앞은 터서 처마를 달고 서쪽을 넓혀 방을 2칸 만들었다. 벽을 뚫고 감실(龕室, 어두운방)를 만든 것이 3칸인데, 몇 천 권의 책을 수장하였다. 이것이 내가 은거할 곳이다. 그 편액을 ‘망송정사(望松精舍)’라 하였다.
南望先壠. 則松楸瞹然. 隱見於莽蒼之間. 以寓終身之慕. 雖常存遠引之志. 而不敢去此之他者此也.
 남쪽으로 선영이 바라다 보이는데, 소나무와 가래나무가 흐릿하게 우거진 풀숲 사이로 어른거리니 평생 선조를 사모할 마음이 깃들이게 된다. 비록 멀리 떠나고 싶은 마음이 늘 있기는 하지만 감히 이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는 것이 이 때문이다.
東闢而爲室者一間. 扁之曰進修. 爲兒輩課學之地. 欲其進德修業. 及斯時也. 合而扁之曰遯齋. 盖因地之稱遁而易之爲遯. 余之所居而安者. 遯之義也.
 동쪽으로 집을 터서 방을 한 칸 만들고 진수재(進修齋)라 하였는데, 아이들이 공부를 익힐 곳으로 삼았으니, 『주역』에서 말한 “덕을 향상하고 학업을 닦는다(進德修業)”는 뜻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이때에서 비로소 건물을 모두 합쳐 ‘둔재(遯齋)’라 편액을 붙였다. 대개 땅이 은둔하기에 맞는데, 『주역』에서도 둔괘(遯卦)가 있으니 ‘내가 머물러 편안하다는 것’이 둔(遯)의 뜻이다.
棟宇之制雖甚卑陋. 處地稍高. 面勢頗敞. 齋前庭可十武墄而降者數丈. 得平原者倍之. 又夷而降者數仞.
 건물의 제도는 비록 낮고 누추하지만 차지한 땅이 자못 높고 면세(面勢, 전면쪽)가 제법 트여 있다. 둔재 앞에는 마당이 10무(畝) 정도 되는데, 층계(단층)가 져서 꺼진 것이 몇 길 정도 되기에 평평한 언덕으로 만들기 위해 2 배로 높인 다음 다시 깎아서 나즈막하게 만든 것이 몇 길이나 된다.
太湖之流. 渟而爲潭. 汎入于江湖之南. 長洲彌迤. 繚以脩岸. 整若繩削. 不甚峻高而隱若橫岡. 遙見羣山環擁於其外.
 태호(太湖)의 강물이 멈추어 담(潭)를 이루고 강의 남쪽으로 흘러넘친다. 길다란 모래톱이 멀리 뻗어 있는데 긴 언덕이 둘러쳐 있다. 먹줄을 쳐서 잘라놓은 듯 반듯하다. 그다지 높지도 않고 비스듬한 언덕처럼 숨어 있다. 멀리서 보면 여러 산이 그 바깥에서 에워싸고 있는 듯하다.
雖靡環奇殊絶之觀. 俯仰泓凈. 可以兼湖山之勝. 得丘壑之趣. 此足以遯世無悶矣.
 비록 화려하고 기이하며 빼어난 경관은 없지만 맑은 물결을 바라볼 수 있으니, 강과 산의 빼어남을 겸하고 언덕과 골짜기의 멋을 얻었다고 하겠다. 이러하니 족히 둔세무민(遯世無悶), 곧 세상에 은둔하여 근심이 없다는 『주역』의 뜻을 이룰 수 있다.
  조태억(趙泰億)은 임수간(任守幹)의 죽음을 애도한 글 「任承旨用譽守幹輓, 謙齋集권16)」에서 “태호 곁으로 귀거래하여, 집을 짓고 둔와라 이름 하였지. 내 그때 미피(渼陂)에 있어, 왕래하며 함께 옷자락을 날렸지. 언 강에서 밤에 물고기 잡을 적에, 눈오는 날이라 추위가 도롱이를 스몄지. 시를 지으면 기운이 호탕하였고, 술을 마시면 얼굴이 불그래해졌지. 함께 텅 빈 마음으로 즐거워하여, 그저 불우함을 위로하였지(歸來太湖傍 築室名遯窩 我時住渼陂 來往共婆娑 氷江夜打魚 雪天寒透簑 題詩氣益豪 命酒顔微酡 相將樂放曠 聊以慰蹉跎)”라 한 바 있다.
 태호의 서쪽, 오늘날 둔촌동 앞쪽의 한강을 둔호(遁湖)라고 하였다. 또 둔와(遯窩)는 둔재와 같은 뜻으로 세상에서 은둔하여 근심이 없다는 둔세무민(遯世無悶)의 뜻을 담았다. 또 덕을 향상하고 학업을 닦는다(進德修業)는 뜻에서 서재 진수재(進修齋)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집 전체를 망송정사(望松精舍)라 하였다. 송파강을 바라보는 집이라는 뜻이겠지만 낙락장송도 서 있었을 것이다.    
  조태억(趙泰億)은 1712년 미음(渼陰)의 적의장(適意堂)에 기거하고 있었으니 임수간이 둔와를 만든 것이 이즈음이라 하겠다. 1711년 임수간은 일본통신사로 가서 일본으로부터 공물(貢物)을 받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구금되었고, 조태억은 견책을 받아 미음에 물러나 있었다. 그래서 더욱 한마음으로 서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임수간(任守幹)은 자신의 집 둔재에 맑은 벗을 열(十友) 두었는데 장미(薔薇), 마당의 소나무(庭松), 분매(盆梅), 장서감(藏書龕), 약포 모종심기(蒔藥圃), 청만검(蜻蠻劍), 마가목(丁公藤), 바둑판(文枰), 구리 술통(銅榼), 오래된 벼루(古硯) 등이 그것이다. 이 맑은 벗들을 둔재청우(遯齋淸友)라 하였으니, “세상의 하찮은 사람과 교분을 맺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豈不隃於世間之託末契乎)”는 서문에 달았다.   
遯齋淸友十詠(둔재청우 10영) / 임수간(任守幹) 『둔와유고(遯窩遺稿)』 권2
장미(薔薇)
身老傷春老  種花愛種薇  신노상춘노  종화애종미 몸이 늙으니 봄도 늙은 것 같아 슬프나 
 꽃을 심은 것 중 장미를 좋아한다네
百花零落盡  一樹始芳菲  백화영낙진  일수시방비 온갖 봄꽃 다 지고 난 뒤에
 비로소 가지 가득 꽃 피우기 때문이라네
분매(盆梅)
蕭洒幽人舍  淸高小閤梅  소쇄유인사  청고소합매 소쇄한 은자의 집
 작은 협문의 맑고 고절한 매화 
江城氷雪裏  春意獨先回  강성빙설리  춘의독선회 눈 내린 강마을 안은  얼어버리니
 봄 뜻을 먼저 홀로 알린다네
장서감(藏書龕)
鑿壁爲三龕  藏書堇百函  착벽위삼감  장서근벡함 벽을 뚫어 세개의 감실을 만드어
 겨우 백개의 함(箱子)에 서적을 보관하였네 
此中眞味在  難與俗人談  차중진미재  난여속인담 여기에 참맛이 있으니
 속인과 말 나누기 어려워라
 또한 1717년 3월 10일 엄경수(嚴慶遂, 1672∼1718)가 임수간의 별서를 찾았을 때 적은 글에서 이 무렵의 삶도 잘 드러난다. 하나하나 강마을의 운치를 돋우기에 충분하다. 임수간(任守幹)은  이곳에서 몇 년 맑은 삶을 살았다. 
 송파를 출발하여 저녁에 둔지(遁池)에 정박했다. 중윤(仲潤)과 함께 들어가 별서에서 임공(任守幹)에게 절을 하였다. 임공께서 이곳을 경영한 지 오래되었는데, 작년 봄 임공이 계시지 않아 한 번 올라보지 못하였다. 안채와 사랑채는 제도가 정밀하고 아름답다. 이제 와서 보니 그 강과 산의 풍경이 빼어난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다. 임공께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이곳에 머물고 있다. 어구(漁具)를 많이 갖추고 물고기를 잡는데, 가끔 서울의 벗을 초청하여 모임을 갖는다. 
 임수간이 세상을 떠난 1803년(癸亥) 임천상(窮悟 任天常, 1754~1822)이 임수간의 별서를 찾았을 때 적은 시 「家季父用曾王考遯窩小築韻. 賦石松亭新築寄來. 敬次以上(궁오집(窮悟集)권4)」에 임수간의 삶과 석송정(石松亭)이란 정자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임수간(任守幹)은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벼슬길에 나서 동래부사, 승지,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내다가 1721년 세상을 떠났다. 그 역시 부친을 따라 광주 정평(庭坪)의 선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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