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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양분과활동]순례기(10) 마가자에서 조양을 거쳐 심양까지

작성자아우구스티노|작성시간08.04.14|조회수550 목록 댓글 0

순례기(10) 마가자에서 조양을 거쳐 심양까지


마가자를 출발한 지 두 시간 만에 우리 순례단은 다시 적봉 호텔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12시다. 그리곤 바로 호텔에 맡겨놓은 가방을 찾은 뒤 심양에서 온 큰 버스로 갈아탔다. 25분 만에 서둘러 우리는 떠날 준비를 마쳤다. 북경에서부터 함께 온 가이드 염 대장과의 작별의 순간이다. 우린 모두 큰 버스로 갈아탔다.


마가자 갔다 오는 길이 반으로 단축되니 일정에도 여유가 있었다. 당초 조양에서 하룻밤을 잔 뒤 심양까지 갈 계획이었으나 전체 계획이 재조정되었다. 일요일 아침에 단동까지 다녀온 뒤 오후 4시 30분 비행기를 타기가 너무 빠듯했기 때문이었다. 심양에서 단동까진 왕복에 6시간 걸리는 거리. 그래서 결국 조양 호텔 예약을 취소하고 심양에서 2박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문제는 조양 호텔의 페널티였다. 이게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그러나 순례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문안나 현양분과장이 페널티를 다 부담하기로 해 이 문제는 수월하게 넘어갔다. 이 일정 조정으로 순례기간 내내 새벽 기상, 컵라면 아침식사로 고정되었던 전투적 분위기기 거의 ‘부활’에 비견할 정도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우리가 다닌 호텔 중 최상급인 심양 캠핑스키 호텔(5성급)에 이틀간 투숙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순례기간 중 처음으로 마지막 이틀간은 우아한 아침 블랙퍼스트까지 즐길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겼다. 이 무슨 순례에 호강인가? 그러니 감사할 수밖에.   


우리가 갈아 탄 대형 관광 버스는 심양에서부터 달려온 버스다. 그런데 몇 가지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선 마이크가 고장 나 거의 들리지 않는다. 처음에는 좀 되는 것 같더니 그만 아예 들릴락 말락, 길을 달리는 소리가 압도해 버린다. 그러니 순례길 성무소일과나 묵상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심양에서 온 젊은 조선족 가이드의 말이 걸작이다. 어제는 마이크의 성능이 너무 좋아서 버스에서 노래방을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점검을 못했다고 했다. 마이크를 노래방으로 죽 쑤었으니 오늘 고장 나는 게 당연하지도 않겠는가? 


더 큰 문제는 버스의 시스템이었다. 엄청나게 큰 창문을 자랑하는 버스였지만 아예 햇빛을 가리는 커튼이 전혀 없다. 그런데 차가 적봉에서 서쪽으로만 계속 달리니 오른쪽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거의 해변에 나와 선텐하는 것 같다. 게다가 햇빛을 계속 쬐니 머리도 아프고 덥기는 왜 그리 더운지...


나중에 보니 남용문  예르니모 형제님과 이 형은 베드로 형제 그리고 나 세 사람만 햇빛에 숯검댕이가 되어 간다. 그런데 나머지 분들은 아예 그늘 쪽으로 옮겨갔는데 나름대로 쾌적한 모양이다. 할 수 없이 이형은 베드로 형제가 운전사에게 에어컨을 틀 것을 요구했는데 이게 또 문제였다. 그늘에 있는 분들에겐 너무 춥고 햇볕에 있는 사람들에겐 그런대로 괜찮으니 이게 바로 양극화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한수산 선생님은 아예 마스크에 외투까지 겹쳐입은 상태였다.


사실 중국 대륙을 다니다보면 마가자를 비롯한 내몽고와 북경이나 천진, 상하이의 양극화 현상이 피부로 느껴진다. 부자들은 돈이 많아 어쩔 줄 모르고 내륙지역 사람들은 하루에 한 끼도 겨우 먹는 등 마는 둥 살아가는 현상이 한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이형은 베드로 형제는 결국 양극화 타파 방안으로 에어컨은 틀면서도 그늘 쪽에 있는 모든 에어컨 출구를 닫았다. 그나마 부족하지만 에어컨 양극화 문제를 적절히 해결하긴 했지만 여전히 양측은 곤혹스러웠다.


적봉에서 30분 정도 길을 달려 나왔을까? 막 조양 가는 길에 접어들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잘 포장된 아스팔트 길을 달리다 바로 옆길로 빠져 나온다. 앞에 있던 다리가 다 무너져 강둑으로 난 임시 길을 따라 이리 빙빙, 저리 빙빙 비포장도로를 내려온 뒤 강바닥을 건넌다. 얼마나 건조한 지 물 한 방울도 없다. 그러고선 다시 강둑 위로 올라선다. 자갈이 튀고 희뿌연 먼지가 매캐할 정도다.


이제 다시 아스팔트 위를 달리면 좀 나을까생각했는데 마치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것 같다. 이 도로는 포장한 지 오래되어 거의 비포장도로 수준인 데다 요철도 커브도 심해 자리에서 얼어나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다. 이런 길이라면 소화불량쯤은 쉽사리 나을 정도다. 왜 길이 이 모양일까? 땅은 넓고 포장할 도로는 많다보니 기초공사를 거의 제대로 안한다는 게 정설이다. 흙으로만 잘 다진 뒤 그 위에 아스팔트를 포장해버리니 이게 오래갈 리 없다.


로마시대 도로가 아직도 유럽에 남아있는데 그 교훈은 기초공사를 하는데 기본적으로 지하 2m 정도까지 파 내려간 뒤 층층이 자갈, 모래 등으로 채워 어떤 충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양적 성장에다 “빨리 빨리!”하다 보니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어이없는 참사를 겪지 않았나? 요즈음 중국이 그런 것 같다. 적봉 호텔에선가 건물은 멀쩡했는데 창으로 바람이 세어 들어오는 지 비닐하우스처럼 비닐을 쳐놓았었다. 게다가 장가구에서도 건물은 멀쩡했는데 방음이 안 되는 지 옆방 얘기하는 소리까지 들리기도 했으니 앞으로 걱정이 되는 대목이다.   


그래도 처음 마이크가 조금 작동될 때엔 심양에서 오신 필립보 회장께서 애국교회와 지하교회에 대해 잠깐 설명을 하셨다. 그래도 우리가 감안해야 할 것은 이 필립보 회장께서도 소속이 애국교회라는 사실이다. 회장님은 먼저 심양교구 김 주교님의 말씀을 예로 들며 지하교회가 있긴 하지만 “그들을 어떻게 믿느냐?”고 말씀하셨다는 얘기를 사석에서 꺼내시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들은 얘기로는 심양 교구장님은 지하교회측에 미사 장소를 제공하시기도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만큼 그는 고령이긴 하지만 중국의 애국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덕성도 겸비하신 분이라고 한다.


필립보 회장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애국교회와 지하교회가 본격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한 것은 문화대혁명이 계기였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이 자신의 마지막 생존기간이었던 1966년부터 10년간 중국을 극심한 혼란으로 몰아넣은 무산계급의 혁명이다. 홍위병을 앞세워 모든 권위와 전통을 타파하고 공산주의의 순수성을 세우겠다는 야심찬 목표였으나 결국은 중국의 정신과 전통, 그리고 문화와 인간성마저 완전히 파괴해버렸던 것이다. 어쩌면 모택동은 진시황이 저질렀던 우를 완전히 되풀이했다는 일부의 시각이 꼭 틀린 것 만은 아닌 것 같다.


서만자의 성직자 묘역이나 마가자의 브뤼기에르 주교님 묘소도 그래서 파괴되었고 그 묘비석마저 다 흩으러 버려 누군가가 밟고 다니는 섬돌이 된 게 아닌가? 그래도 이 와중에서 신자들을 지키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방패막이로 내 건게 바로 애국교회라는 것이다. 따라서 애국교회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중국교회의 의지가 작용한 것이니 지상교회로 부르는 게 맞지 않을까하는 말씀이다. 그 전에는 결혼하신 주교님도 있었다는 얘기를 덧붙이시기도 했다.


특히 필립보 회장님은 심양의 김패헌 주교님의 경우 교황청에서 교황님을 만난 적이 있으며 이때 신품을 확실히 다시 받으셨으나 공개는 하지 못하신 형편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래도 지하교회는 살아있고 또 신앙의 순수성, 보편교회의 연계고리를 목숨을 다받쳐 지키고 있으니 교황청도 가능하면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필립보 회장님도 애국교회의 활동에 제한이 있다는 사실은 솔직하게 말씀하신다. 신자들이 5~6명이 모여 활동하면 문제없지만 2~30명이 모이기 되면 큰일 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애국교회 소속 성직자나 신자들의 신앙생활도 여전히 제한되어 있으니 우리는 그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환난과 고통을 몇 배로 보상해 주실 게 분명하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마르코 10:30) 


순례단이 적봉에서 조양(遼寧省에 있으며 중국 발음으론 차오양·朝陽)으로 바로 이동하기는 처음이라고 한다. 이 길은 주교님이 돌아가신 뒤 유해로 떠난 길이다. 그러니 주교님 유해이장로이다. 그래도 이 길을 가시면서 하늘에 계신 주교님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중국에선 우리의 국도 같은 길을 한참 달려도 꼭 톨게이트가 있다. 적봉을 빠져 나온 뒤 처음으로 톨게이트가 보인다. 그러자 우리는 그 가까이에 차를 세우고 점심을 먹기로 햇다. 점심이래봐야 그저 컵라면이 전부다. 우리 순례단은 모두 차에서 내려 그 옆에 있는 도로 어깨에 세워놓은 표지석에 죽 앉았다. 그러고 보니 적절한 비유인 지 모르지만 꼭 참새들이 전깃줄에 줄줄이 앉아있는 모습이다. 다들 배고픈 표정. 가만히 버스에 앉아 있어도 엉덩이가 덜썩덜썩, 소화기 운동도 매우 잘 되었기 때문임에 분명하다.  


모두들 하나씩 꺼내서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기 시작했다. 또 컵라면이 떨어진 분들에겐 여유 있는 분들이 또 나눠준다. 싸온 반찬도 한 두 개 씩 나누고 김치도 나눠먹고 하니 금방 진수성찬이 되었다. 따뜻한 봄기운이 내려 쪼이고 황사조차 없다. 푸른 하늘, 흰 구름에 우리 순례단은 모두 마치 소풍 온 듯 했다.


제일 위쪽에서 같이 식사하시던 염신부님, 김진영 바오로 회장님, 한수산 선생님도 흡족한 모양이다. 한 수산 선생은 “내 평생 이렇게 훌륭한 점심 식사를 이런 곳에서 해 보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며 파안대소하신다. 사실 음식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건 바로 나눔이었다. 가진 것도 별로 없고 인스턴트 음식이 대부분이었지만 그곳은 바로 예수님이 계신 나눔의 식탁이 아니겠는가? 


마태오 복음에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군중이 4천명이나 모여 있었는데 사흘이나 같이 있다보니 먹을 게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걱정이 된 제자들은 예수님께 “누가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이 빵이 몇 개 있느냐고 물으셨고 제자들은 “일곱 개 있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주도록 했는데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였다고 한다. (마태 15:32-39)


식사를 마친 후 거의 모기소리만한 음량의 마이크로 간신히 낮 기도를 마쳤고 그저 버스가 잘 달려주기만을 기대하며 잠시 쉬었다. 형제님들은 버스가 많이 튀고 흔들리는 이유를 자동차 타이어에서 찾았다. 기름을 아끼기 위해 타이어 공기압을 매우 높여놓는 다는 것이다. 그러면 연료절감 효과는 있지만 고무공처럼 자동차가 탄성이 붙으니 당연히 버스는 아래위로 심하게 흔들린다는 것. 매우 과학적인 지적이지만 길 사정도, 버스 사정도 그리 녹록해 보이진 않는다.


이 풍진 버스 속에서도 강 안젤라 한 율리아나 자매님의 <스타버스>커피가 인기다. 자칫하면 다 쏟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커피 타는 솜씨는 거의 수준급 바리스타를 능가한다. 조금 과장하면 버스 타는 게 무슨 청룡열차 같은 데도 두 분은 커피 한 방울 쏟지 않고 커피를 만들어주시는 마이더스의 손이다.



출발한 지 4시간 20분만에 마침내 우리는 조양 시내로 들어섰다. 시내 정경은 다른 도시와 별 차이가 없다. 다만 가로수로 심겨진 벚꽃이 만발해 그나마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 사실 우리 순례와는 상관없긴 하지만 이 조양은 발해사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발해의 건국을 다뤘던 드라마 <대조영>에서 자주 등장한 영주가 바로 이곳이다. 대조영의 첫 사랑으로 나왔던 가공 인물 초린은 거란의 군주 이진충의 딸이었고 일생의 숙적을 묘사된 이해고도 바로 이곳 영주의 아들이다. 물론 이해고란 인물이 역사에서는 당나라 장수로 나오는 지라 그 진실 자체는 아직 수수께끼이긴 하다. 


그래도 확실한 건 대조영은 청춘 시대를 바로 이 조양에서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기록에 의하면 대조영의 아버지 대종상(역사에서는 乞乞仲象)이 영주로 옮겨온 게 669년이고 발해를 건국한 게 698년이니 거의 27년간을 영주에서 살았던 셈이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지나는 조양이다.


우리는 조양을 지나 그곳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숭수쥬오즈 마을을 향했다. 이곳은 본래 동몽골 대목구청(교구청)이 있었던 곳이었다. 이곳은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를 마가자에서 서울로 옮겨가는 본부역할을 했던 곳이다. 1931년 서울대목구 보좌 라리보 주교가 동몽골 대목구장 아벨 주교에게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이장 협조 요청 서한을 발송하면서 그 과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조양으로 오는 도중 숭수슈오즈 본당으로 연락을 했으나 일단 그곳이 스위스 쪽 인사들의 방문으로 정신이 없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 버스는 이제 조양시내를 빠져나와  심양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일단 올라갔다. 얼마나 길이 좋게 느껴지는 지 마치 푹신푹신한 비단을 밟은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운전사도 그런 질주 본능이 살아났는지 아무 생각 없이 달리다가 그만 출구를 놓친 채 한참을 더 달려가고야 말았다. 급기야 다시 버스는 출구로 나가 유턴을 하고 있자 수뇌부가 모여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신부님의 결단으로 이번엔 슝슈가주를 빼고 심양으로 바로 가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미 날은 어둑어둑 어두워졌다.  5시 45분 우리는 그래도 오랜만에 고속도로 휴게소인 린하이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도로가 좋아지니 우리 순례자들도 다시 문명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밤이 점점 깊어지고 어둠이 깊어진 길을 마구 달려 마침내 심양에 도착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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