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음 시집 『저, 끌림』에서 좋은 시 한 편
-『문학과 창작』2015년 겨울호
고통이 기르는 붉은 열매
정 복 선
구름이 내려와 쉬고 있는 남프랑스 생트 빅투아르
세월을 가로막고 길게 누운 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답답한 가슴 허파꽈리를 드러내 놓고
늙은 숨을 쉬면서
깊게 패인 골짜기와 지층 사이에 묻어 두었던
좌절을 꺼내
백 프랑짜리 지폐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기까지
그를 기다리고 품어
평생 모델이 되어 준 산, 생트 빅투아르
자신의 전 존재를 묻고
누군가의 배경으로
누군가를 송두리째 받아들여 어머니처럼
가슴으로 기른다는 것이 쉬운 일일까
나의 작고 얄팍한 마음
펑퍼짐하게 엎드린 생트 빅투아르
하얀 석회암 덩어리 산에 견주어 보며
산만큼 무거운 숨을 뱉는다
수많은 그의 그림 앞에서
그를 몰라 준 긴 세월과 고통에 압도 당한다 그리고
수많은 고통을 익혀 준 그의 작품에 고개 숙인다
그가 헤매었을 엑상프로방스를 거닐며
어둠의 농도만큼 깊어진 색
고통이 기른 열매가 시간을 거슬러
붉기만 하다
-「세잔에 취하다」 전문
단풍나무가 불꽃가마처럼 타오르다가 사그라졌다. 나고음 시인의 시집을 기다리는 동안 가을이 하루하루 깊어간 것이다. 『저, 끌림』이라는 멋진 제목에 끌려서 여러 쪽을 접으며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마지막까지 망설임 속에 남은 두 편은 「모딜리아니의 꽃병」과 「세잔에 취하다」인데, 단순함과 깔끔함에「모딜리아니의 꽃병」에게로의 “끌림”을 뿌리치지 못한다. 그러나 조금은 거칠지만 예술가의 본질적인 속내를 빚어낸 막사발 같은 「세잔에 취하다」를 선택한다.
생전에 명예와 부를 누린 행운의 예술가들도 있는가 하면, 말년에야 인정받은 사람, 사후에 인정받은 사람, 그리고 불행하게도 무명의 별들이 더 많지 않을는지. 그 중에 세잔은 말년에 인정받은 사람이다. 1839년에 태어나서 1906년(67세) 사망한 그는 당시의 전통적인 양식 대신 혁신적인 정신과 표현으로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했고 미술계의 혹평만을 받았으며, 오랜 고립기간을 겪은 후에 명상과 예술의 본질적인 깊이에 이른 화가라 하겠다. 1899년 <앙데팡당전> 1900년 <만국박람회> 때에야 비로소 미술관의 작품수집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한 가지 소재에 꽂혀서 수십 점씩 연작하는 과정에서 정체성을 확립하거나 예술적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는 작가들이 있는데, 모네의 <루앙 대성당>, <수련>, 또 고흐의 <해바라기> 등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어둠의 놀이를 세밀하게 변주하면서 연작으로 그린 작품들을 보면, 그 치열한 예술혼과 집중력에 더욱 놀라움과 공감을 느끼게 된다. 세잔이 그린 <생트 빅투아르 산> 연작은 10점이라고 하는데, 수십 점의 그림에 그 산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 중 몇 점을 보면서 당대에는 왜 그리 혁명적인 것이었는지 짐작만 해본다.
나고음 시인은 지금 세잔의 고뇌와 좌절의 현장에 있다. 생트 빅투아르 산이 있는 엑상프로방스 지역을 순례자처럼 떠돌고 있다. 세잔이 태어났고 때로 떠났고 결국엔 어머니의 품인 듯 다시 돌아가서 영면한 곳이다. 시인은 세잔의 고뇌에 마음을 찔린다. 오랜 인고의 세월 속에서 정진한 끝에 얻는 열매의 맛은 쓰지만 달다. 그 쓰라림의 세월이 형상화된 세잔의 그림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어둠의 농도” 만큼 “열매”의 색깔도 붉다는 걸 깨닫는다.
이 시에서 두 개의 페르소나에 투영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하나는 예술가로서의 세잔이고 또 하나는 의인화된 생트 빅투아르 산이다. “누군가의 배경으로/누군가를 송두리째 받아들여 어머니처럼/가슴으로 기른다는 것이 쉬운 일일까” 라는 구절에서 세잔의 고통을 감싸 안아 승화시켜주고 세상으로부터의 관심과 사랑을 이끌어낸 공을 바로 생트 빅투아르 산에 돌리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쩌면 모든 예술가의 뒤에는 감추어진 희생의, 무명의 손길이 있음이다. 그 손길이 사람이나 짐승만이 아닌, 어느 장소나 어떤 사물, 나아가 심리적인 유형무형의 존재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예술가의 고향이나 성장 배경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도 하는 것.
나고음 시인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두 개의 페르소나. 이미 시인의 길을 가면서 느끼는 갈증과 갈등을 겪고 있는 시인의 마음은 세잔의 역정을 따라서 순례자처럼 행군하면서 자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이 지난한 과정을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다른 하나는 모든 존재의 아픔을 품어 안는 모성이다. 그러나 시인 안에서 해와 달이 겹치듯이 두 가지는 하나로 만난다. 시인은 예술가의 길을 동경하는 동시에, 가시관을 쓴 십자가의 예수를 품어 안는 성모의 품을 경외하는 것이다. 시인의 오랜 종교생활의 일면이 엿보이고, 또 초등학교 교감의 자리에 이르도록 어린이들을 품어 가르친 풍모와 장학재단 운영에도 힘을 쏟는 가지런한 그의 마음자리를 느끼게 된다.
교단생활과 겸해서 도예작가로서의 생활을 열정적으로 해왔었고, 이제 두 번째 시집에서는 그의 또 다른 달리기가 계속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시인의 숲, 그 장원의 마력-“끌림”-에 사로잡힌 시인의 예쁜 미소가 떠오른다. 불꽃가마를 품은 시집을 손에서 내려놓으며, 이 땅에서 시인으로 살면서 세잔처럼 예술혼을 불태우다 보면, 시의 열매가 붉게 익을 날이 올 것이라는 몽상에 빠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