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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자료(문서)]남사당이란?

작성자장산곶매|작성시간02.02.07|조회수219 목록 댓글 0
우리는 일반적으로 연희(演戱)를 그저 하나의 여흥 수단으로 넘겨 버리는 옳지 못한 습성을 갖고 있다. 예술을 생활을 떠난 관념의 소산으로 아는 인습이 조선왕조의 폐쇄적 도악사상 (道樂思想)등으로 하여금 더욱 고질화 시키는 역할을 해 온 것 같다. 도악적 심미욕 (道樂的 審美欲)의 노예가 되어 민중의 생활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그 함수 관계를 차단하며 다분히 통치권력의 지배수단으로 발아(發牙)한 향락적 예술형태와는 달리, 오히려 이들과 대립 관계에 서면서 이 땅의 원초적 민주평등사상 (民主平等思想)을 바탕으로 한 민중예술 (民衆藝術)로 부각되어 나타난 것을 남사당놀이로 보는 것이다.
남사당패란 우리의 오랜 역사에서 민중속에서 스스로 형성, 연희되었던 유랑예인집단 (流浪藝人集團)을 일컫는 것으로 그 배경은 말할 것도 없이 민중적 지향을 예술로써 승화하여 온 진보적 구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반인적 자연(反人的 自然)과 인성(人性)에 대한 대립적 존재로서 민중의 생활사 (生活史)와 같은 맥락을 갖는 것이다. 그들의 형성배경에 대함 사소한 부정적 異見들은 가시덤불의 민중사를 통찰해 보면, 뜨거운 애정으로 감싸질 화사첨족 (畵蛇添足)에 불과한 것이라 하겠다.





남사당의 발생



남사당패란 1900년초 이전에 있어서 서민층의 생활군단 (生活群團)에서 자연발생적 또는 자연발전적으로 생성한 민중놀이 집단을 일컫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집단은 권력 주변에 기행하였던 지배계층이 주관했던 관노, 관원놀이와는 달리 그 유지와 구성이 어려웠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에게 어느 때부터 민중놀이집단 남사당패가 생겨났는가, 어떻게 이어져 왔는가를 알고자 그 방법을 문헌적 고구(考究)에만 의존할 때, 그것은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없음을 곧 알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아직껏 민중이 주인이 되는 민중사의 기록을 갖지 못하였고, 또 이 방면의 관심마저 일천하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이앙법이 시행된 이후로 잉여 생산물이 풍족하게 됨으로써 상공업의 발전을 촉진시켰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터이다. 하지만 농촌사회의 문화도 경제력 못지 않게 심각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 광작현상의 발생으로 설자리를 잃은 농민들은 두 가지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유리걸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적떼에 동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농민층의 분화과정은 17,8세기의 보편적 현상으로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유리 걸식하는 사람들이 몇 가지 재주를 익혀 유랑연예인집단을 형성한 것이다. 이들은 점차로 자신들이 역사의 주체임을 자각하며 민중의 염원을 담아내는 것이다.






남사당의 구분



남사당과 서로 유사한 성격의 패거리로 인식되고 있는 사당패, 걸립패, 남사당패 등에 관한 분별이 필요하다. 전해오는 전적(典籍)에서나 일반적인 인식이 특히 사당패와 남사당패를 같은 것으로 혼동하고, 사당패와 걸립패의 관계에 대하여는 전혀 무지한 상태이므로 이들 패거리간의 관계나 독자적 성격 등을 살펴보기로 하자.

사당패
사당패란 그 주구성원이 여자이다. 일명 여사당으로 통하는 이 패거리는 가무희(歌舞戱)를 앞세우고 매음을 하는 것인데 맨 위에 모갑(某甲)이란 서방격의 남자가 있고 그 밑으로 거사(居士)라는 사나이들이 제각기 사당 하나씩과 짝을 맞춘다. 그들은 자기들의 수입으로 불사(佛事)를 돕는다는 것을 내세운다. 길제로 그들은 반드시 관계를 맺고 있는 일정 사찰에서 내준 부적을 가지고 다니며 파는데 그 수입의 일부를 사찰에 바치는 것이다.
남녀의 구성비율이 1대 1이지만 실제 연희에 거사는 전혀 관계하지 않고, 다만 사당을 업고 다니는 등 잔일과 뒷바라지와 허우채의 관리를 맡는다.
사당패의 연희 종목은 춤과 노래에 국한된다. 모갑이와 거사는 대개 걸립패의 화주(化主) 출신이 많았다.


걸립패
걸립패(비나리패)는 우두머리격인 화주를 정점으로 비나리 (고사(告祀)꾼, 승려(僧侶)혹은 승려 출신),보살, 잽이(풍물잽이), 산이(2-3인의 버나 또는 얼른 연희자(演戱者)), 탁발(얻은 곡식을 지고 다니는 남자) 등 15명 내외로한 패거리를 이룬다.
걸립패는 반드시 관계를 맺고 있는 사찰의 신표(문서(文書)라 한다)를 제시하고 집걷이(터굿, 성주굿, 조왕굿, 샘굿 등)할 것을 청하여 허락이 떨어지면 처음 풍물놀이로 시작하여 몇 가지 기예를 보여주고 터굿, 샘굿, 조왕굿 등을 마치고 마지막에 성주굿을 하는데 이때 곡식과 금품을 상 위에 받아놓고 비나리를 왼 다음 받아놓은 곡식과 금품을 그들의 수입으로 하 는 것이다.


남사당패
남사당패는 꼭두쇠(우두머리) 밑으로 4,5명의 연희자를 갖는 연희집단으로 이미 여러 문헌에서 지적되었듯이 일정한 거소(居所)가 없는 독신 남자들만의 남색사회이다. 간혹 어름산이 (줄꾼)나, 그밖에 한두 사람의 여자가 낀적도 있으나 이것은 남사당패 말기에 들어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꼭두쇠를 정점으로 한 대집단은 그들의 여섯 가지 놀이를 가지고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만 제공 받으면 마을의 큰 마당에서 밤새워 서민들만의 놀이를 논 패거리이다. 그들이 계간(鷄姦)를 팔았다는 오점은 숨길 수 없는 것이나 그들의 연희 내용에서 보이는 진취적 민중지향성은 비싸게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대광대패(竹廣大), 솟대쟁이패, 중매구, 굿중패 등 남사당패의 배경을 보는데 연관되어야만 할 패거리들이 있으나 솟대쟁이패와 굿중패를 제외하고는 그 내용을 상고할 방법이 없음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걸립패, 중매구, 남사당패는 명칭상으로나 내용상 비슷한 패거리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형성 배경을 보면 별개의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사당패나 걸립패, 중매구 등은 완전히 사찰을 배경으로 하여 서로간의 계산된 이해에 의하여 사찰을 그들의 거점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1900년대 초 이후 남사당패는 점차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으나 걸립패만은 그나마 명맥을 이을 수 있었음은 아마도 사찰과의 관계에서였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걸립패는 자기들은 남사당패와는 달리 불사를 돕는 불자라는 것을 반드시 내세우는가 하면, 남사당패 출신도 그들대로 "우리는 동냥을 하지는 않았다"며 걸립패와는 성격이 다름을 말하고 있다.





남사당의 구성



남사당패의 한 패거리는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저승패, 등짐꾼 등으로 4, 50 명이 한 패거리를 이룬다.
꼭두쇠는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명실 공히 패거리의 대내외적인 책임을 진 자로 그 능력에 따라 식구가 모여들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조직은 일사분란하여 오히려 획일적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엄격한 것이었다.
50명 안팎의 인원을 필요로 하는 그들은 그 충원 방법으로 빈한한 농가의 어린 아이를 부모의 응낙 (실은 먹여 살릴 수 없어 내주는 것이지만) 이나 고아, 가출아 등이 대상이 되었으며 어떤 때는 유괴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꼭두쇠는 반드시 한 사람이나 그를 보좌하는 곰뱅이쇠는 패거리의 규모에 따라서 두 사람일때도 있었다고 한다.
곰뱅이란 남사당패의 변[隱語] 으로 허가란 뜻으로 어느 마을에 갔을 때 놀이 마당을 열어도 좋다는 사전 승낙을 받는 일을 맡아보는 사람이 곰뱅이쇠인 것이다.
곰뱅이쇠가 둘일 경우 그 하나는 패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인 먹이는 문제를 맡은 글[밥] 곰뱅이쇠이다.
실제 남사당 놀이는 기능자 중 각 연희분야의 선임자를 뜬쇠라 부르는데 뜬쇠는 14명 내외로 상공운(상쇠), 징수, 고장수, 북수, 회적수(날라리), 벅구, 상무동, 회덕(선소리꾼), 버나쇠, 얼른쇠(요술쟁이), 살판쇠(땅재주꾼), 어름산이(줄꾼), 덧뵈기쇠(탈놀음), 덜미쇠(인형극)이다.
뜬쇠들은 그들이 노는 연희의 규모에 따라 당해 연희에 기능을 익힌 몇 사람씩의 가열을 두게 되는데 첫 순서인 풍물놀이에서는 패거리 전원이 출연하다시피 해야 되는 것이어서 해당이 되지 않지만 그 밖의 연희에는 특히 소질이 있는 몇 사람씩의 가열과 그 밑으로 초입자들인 삐리를 둔다.
삐리는 뜬쇠들의 판별에 의하여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연희에 배당되어 잔심부름부터 시작하여 한 가지씩의 기예를 익혀 가열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이들은 가열이 되기 전까지는 여장을 했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남사당의 운영



꼭두쇠는 완전히 패거리의 중의에 의해서 선출되고 있는데 꼭두쇠가 노쇠하여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거나, 잘못이 있어 식구들의 신임을 잃게 되면 바꾸게 된다. 그 자격은 뜬쇠 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추대를 받은 사람으로, 선출 방법은 협의를 통하여 다수결의 방식을 쓰고 있음을 본다. 일정한 임기는 없었던 것으로 전한다.
일단 선출된 꼭두쇠의 권한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일상 단체 생활뿐만 아니라 새로 식구를 맞아들이고 쫓아내는 등의 모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한가지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대개 뜬쇠 중에서도 상쇠나 덜미쇠가 꼭두쇠로 추대되는 경우가 많았다.
식구 중 패거리 사이의 규율을 어기는 자가 생겼을 때, 또는 꼭두쇠가 보아 마땅치 않다고 여겨지는 자가 있을 때 그 징벌의 방법은 볼기를 치는 것이었는데 그 매는 벅구잽이가 치는 것이 통례였으며, 징벌의 다른 방법으로는 끼니를 굶기는 예도 있었다 한다.
패거리의 규율은 명문화된 것은 물론 아니고 어느 패거리나 똑같이 엄격했던 것은 무단히 도망하는 자에 내려지는 벌이 제일 엄격했고, 그 밖의 규율은 꼭두쇠 전권에 맡겨지는 것이지만 식구간에 물건을 훔치지 말 것, 패거리 안의 이야기를 밖에 내지 말 것 등은 꼭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끝으로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이들은 숫동모[男]와 암동모[女]라는 이름을 남색조직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외도 있었지만 숫동모는 가열 이상이며 암동모는 삐리들이 감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삐리는 전원이 암동모 구실을 하였다.
꼭두쇠일망정 암동모를 하나 이상 차지할 수 없었고, 삐리의 수효가 전체의 반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전원이 쌍을 지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남사당패거리 사이에는 이 삐리의 쟁탈전이 치열한 것이었는데, 자기 몫의 암동모를 갖기 위한 방편도 되겠지만, 그보다도 반반한 삐리가 많은 패거리가 일반적으로 인기도 좋은 것이어서 더욱 중요시 되었다 한다.
그들이 한마당의 놀이판을 벌이는 데는 일정한 보수가 없고, 숙식을 제공받고 하룻밤을 놀고는 다음날 마을을 떠날 때 마을 사람들이 자진해서 주는(으레 얼마간의 노자를 주는 것이 인사였다)노자가 수입이 되는 것인데, 이밖에도 머슴이나 한량들에게 자기 몫의 암동모를 허우채를 받고 빌려줌으로써 작전(作錢)의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사철 중 겨울은 남사당패에 있어 최악의 계절이었다. 이때는 대개 전국에 몇 군데 있었던 그들의 은거지, 경기도 진위, 충청도 당진, 회덕, 전라도 강진, 구례, 경상도 진양, 남해, 북쪽으로는 황해도 송화, 은율 등지에서 동면을 했는데 이동안 개인기가 없는 가열과 삐리들에게 기예를 가르쳤다.
연희 대상 지역이 농어촌의 마을과, 대처일지라도 성곽 밖의 서민층 마을이었기 때문에 그 활동 시기는 모심는 계절부터 추수가 끝나는 늦은 가을까지를 전성기로 볼 수 있다. 농군들이 일하는 동안은 풍물을 놀다가 일이 끝나게 되면 저녁을 먹은 후에 다시 풍물놀이로 시작해서 여러 가지 놀이를 솜방망이불이나 관솔불을 피워놓고 밤새워 같이 놀았다. 남사당놀이의 놀이판 형식을 마당굿으로 표현한다.이 마당굿 역시 그 놀이가 잘되고 못되기는 일차적으로 연희자에게 돌려지는 것이지만, 엄격히 노는 자와 보는 자가 한덩어리가 되는 것이 마당굿이고 보면 어느 한쪽만이 감당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대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맞아들인 것은 민중의 뜻이지만, 그들이 잘 놀 수 있도록 허가를 해주는 지주 및 권력자의 속셈이다. 그들을 끌어들임으로써 다소 지출은 되지만 농군 등을 오히려 효율적으로 부릴 수 있었고, 이를 통하여 농군뿐이 아닌 전체 민중들의 반감을 둔화시킬 수 있었다는 피아간의 상관 관계이다. 그들은 주로 더울 때에는 북쪽, 추울 때는 남쪽, 팔도를 섬폅했으며 심지어는 만주 북간도에까지 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남사당놀이가 지방성이나 행사성에 매임없이 범지역적 민중놀이가 될 수 있었던 소이가 이러한 유랑생활에서도 얻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년 중 가장 어려운 시기가 한겨울이었음은 앞서 말한 바 있거니와 이 동안은 한철에 모아 놓은 다소의 비축으로 연명만을 하다가, 그것도 안되겠으면 패거리가 뿔뿔이 흩어져 걸식을 하다가 다음 해 봄에 다시 모이게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남사당의 공연 내용



남사당패가 마을에 들어갈 때의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시민들로부터는 환영을 받았지만 양반들로부터는 심한 혐시와 수모의 대상이었던 그들이 함부로 어느 마을이나 출입할 수는 없었다.
두레가 있는 시기에는 반드시 그 마을의 두레기가 들판에서 나부낀다. 그러면 지나던 남사당패는 그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 같은 데서 그들의 영기를 흔들며 신명지게 풍물을 울리고 동니를 받는 등 온갖 재주를 보여준다. 이것을 본 마을사람들이 패거리를 끌어들일 의사가 결정되면 (물론 지주들의 사전 양해가 있어야 한다.)두레기를 흔들어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두레가 없을 때의 경우 여기 마을에서 제일 잘 보일 언덕배기에서 온갖 재주를 보여주며, 한편으로는 곰뱅이쇠가 마을로 들어가 그 마을의 최고 권력자나 이장 등에게 자기들의 놀이를 보아줄 것을 간청한다. 만약 허락이 나면 "곰뱅이 텃다"고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길군악-단악가락이라고도 함-을 울리며 마을로 들어가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열에 일곱은 곰뱅이가 트지 않았다"고 한다.
저녁밥을 마치고 어두워진 다음, 놀이판으로 잡은 넓은 마당에 횃불을 올린다(겨울에는 장작불). 단악가락을 울리며 풍물잽이들이 마을의 골목을 돌면 동네 사람들은 그 뒤를 따라 큰 행렬을 이루어 길놀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남사당놀이의 여섯 종목은 다음과 같다.
풍물
첫 번째 놀이인 풍물은 웃다리 가락을 바탕으로 하는 풍물놀이다.남사당패의 풍물놀이는 그들 패거리가 유랑패였다는 성격으로 하여 그 이전에 있어서도 웃다리 가락의 정수로는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다만 거친 대로 힘이 있는 웃다리 가락을 주축으로 짜임새 있는 진풀이와 무동(새미), 채상(열두 발 상모) 등 체기(體技) 및 묘기를 가미하여 연희적 요소를 더하고 있는 것이다. 최소 24명이 일 조를 이룬다.
버나
버나는 체바퀴와 대접, 대야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묘기를 말함인데, 지난날에는 이 버나놀이판에 얼른(요술)이 같이 있었다. 버나는 묘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리는 사람인 버나잽이와 받는 소리꾼인 매호씨(어릿광대)가 서로 주고받는 재담과 소리가 있어 극성(劇性)이 짙은 것이다.
살판
"잘하면 살 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라는 뜻에서 이럿게 불려졌다고 한다. 본시는 대광대패나 솟대쟁이패의 주된 놀이 중의 하나였는데 이것이 남사당놀이에서도 보이고 있다. 그 연희자는 역시 대광대패나 솟대쟁이패에서 충용되었다. 오늘날의 텀블링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살판쇠와 매호씨가 재담을 주고받으며 잽이[樂士]의 장단에 맞춰 곤두질을 친다. 체기(體技)와 재담이 거의 반반으로 나타나는 것은 버나의 경우와 같다.
어름
남사당패의 어름놀이는 초청에 의하여 관가나 양반집에 불려다닌 광대줄과는 달리 일정한 보수없이 서민을 상대로 순연했기 때문에 역시 민중 취향으로 짜여져 있음이 특징이라 하겠다. 어름산이와 매호씨가 재담을 주고받으며, 줄 위에서 가창하고, 잽이의 장단에 맞춰 진행되는 것으로 버나, 살판의 경우와 같다.
덧뵈기
다섯 번째 순서인 탈놀음. 덧뵈기란 명칭은 "덧본다"는 것으로 탈의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덧뵈기는 다른 지역적 탈놀음에 비하여 의식성이나 행사성에 관계 없이 그때그때 지역민의 갈구와 흥취에 영합하였던 것이다. 춤보다는 재담과 동작부분이 우세한 풍자극으로 다분히 양반과 상놈의 갈등을 상놈의 편에서 의식적인 저항의 형태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4마당으로 구성된 순서를 보면 마당씻이, 옴탈잡이, 샌님잡이, 먹중잡이로 짜여져 있는데 먼저 첫 마당에서 놀이판을 확보하고 둘째 마당에서 외세를 잡고, 셋째 마당에서는 내부의 모순을 불식하고 끝마당에서 외래문화[종교]를 배격하는 내용이다.
덜미
남사당놀이의 마지막 순서이며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민속인형극 꼭두각시 놀음을 남사당패 연희자들은 덜미라 부르고 있는데 "목덜미를 쥐고", "몽둥이를 쥐고" 놀린다는 장두인형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실제로 장두괴뢰가 주이긴 하지만 현사괴뢰(懸絲傀儡), 주선괴뢰(走線傀儡),포대괴뢰(布袋傀儡)등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남사당 현황



[개다리패] (일명 바우덕이[김암덕(金岩德)패])
김암덕은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소재 청룡사를 거점으로 한 능력있던 사당이었던 바 남사당패의 말기로 볼 수 있는 1900년대 초에 안성 개다리패의 유지에 공헌한 사람이다. 개다리패의 꼭두쇠로서는 개다리라 불리던 사람이 따로 있었지만 이 패거리는 김암덕으로부터 힘입은 바가 커서 바우덕이패로 통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경우가 바로 남사당패와 사당패, 또는 걸립패간의 혼성을 보이는 대목이다. 이 패거리에 직접 가담했던 생존자는 한 사람도 없고 개다리패의 뒤를 이은 안성 복만이패 를 거쳐 그 후대인 원육덕패로 이어지게 된다.

[안성 복만이패]
안성 개다리패의 후대로 꼭두쇠는 안성 출신 김복만이었다. 경기 이북을 주로 순연한 패거리이다.

[원육덕패]
안성 복만이패의 후대로, 꼭두쇠 원육덕은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안성 복만이패에 가담했던 사람들로 재규합된 패거리로 1939년에 만주 북간도에까지 들어갔다가 그 곳에서 해산하고 말았다.

[오명선(吳明善)패]
꼭두각시놀음의 대잡이인 남형우옹이 12,3세부터 2년간 소속했던 패거리로 꼭두쇠 오명선은 특히 대잡이로 유명하였으며 그들은 황해도 일원을 주로 순연하였다 한다. 오명선은 황해도 안악 출신이라는 설도 있으나 은율 출신이란 사람도 있다.

[심선옥(沈善玉)패]
1900년대 초에 있었던 진위(振威)남사당의 후대에 알려져 있으며, 꼭두쇠는 오산 출신 심선옥이었다. 지금의 평택, 오산이 주거점이었고 주로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을 순연하였다 한다. 김문학(金文學)이 있던패.

[이원보패]
주로 서울의 변두리 지역과 경기도 일원의 소도시를 순연한 패거리로, 꼭두쇠 이원보의 출신은 경기도 안성으로 전한다. 앞서 다섯패거리가 모두 없어진 후에도 끝까지 남았던 패거리로 현존하는 생존자들은 대부분 여기에 몸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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