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오빠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오빠 생각이 날 때마다 늘 후회가 앞선다. 살아 있을 때 잘해 주지 못한 것, 오빠가 좋아하던 것을 챙겨주지 못한 자책감이다. 오빠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걸리는 간암이었다. 두 달 가까이 시름시름 앓았지만 감기라는 주치의의 오진 때문에 그나마 손 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원래 암이란 것이 생명의 불꽃이 재가 되는 마지막 순간에 바다의 해일처럼 몰려온다지 않는가. 뒤 늦은 전문의는 길어야 6 개월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표정 없이 내렸다. 오빠는 그 6 개월도 다 채우지도 하고 갔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어릴 때부터 늘 억압 당한 오빠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워낙 내성적이고 소심 했던 오빠는 낯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간혹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도 언제나 남의 얘기를 듣기만 할 뿐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거나 아는 것을 내세우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사람들 앞에 우뚝 서기를 바랐다. 허나 학교에서도 일등은커녕 꼴찌를 겨우 면한 오빠였다. 반장은커녕 분단장도 한번 하지 못하는 아들을 아버지는 남 앞에 내세우려 무던히 억지를 부렸다. 숫기도 없는데다 마음마저 꽃잎같이 여린 오빠는 아버지의 강압에 점점 기가 죽어갔다. 어린 시절 거의 날마다 아버지 앞에 꿇어 엎드려 모질게 당하던 오빠를 지금도 기억한다. 물론 우리 집에서 호된 꾸지람으로 엎드려뻗친 사람이 오빠만은 아니었다. 나와 동생도 아버지 앞에 서면 다리가 후들거리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집안을 짊어질 필요 없는 딸에다, 공부를 조금 잘해서 동생은 막내라는 프리미엄으로 나사가 조금 풀린 것뿐이었다. 그러나 맡 아들로 또 집안의 장손으로 동생들 앞에서 의연하고 똑똑해야하는 오빠는 하루하루가 힘들었을 것이다. 길가의 잡초처럼 밟히며 오빠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을까? 시합 중 흠씬 두들겨 맞아 뻗어버린 권투선수 같았다. 철없는 나와 동생은 오빠 말은 무조건 무시하고 그것이 일상화 돼버렸다. 오빠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절대적인 아버지의 이기심 이었다. 아버지의 부서진 꿈을 이루고 싶은 기대! 하나도 내놓을 것 없는 집안을 번듯하게 일으켜보겠다는 욕심, 남들의 존경을 받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것이 보통 부모들의 바람일까? 물론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들이 대신 해 준다면 얼마나 기쁜 일일까, 그것을 바라는 마음이야 간절하겠지만 아버지의 강요는 오빠의 인생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예고 없이 오빠의 학업 테스트를 자주 하셨다. 그때 오빠의 대답이 틀리면 아버지의 주먹이 여지없이 오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어린 나이에 오빠는 늘 불안에 떨며 아버지의 기침소리에 주눅이 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의 실망과 비례해 오빠의 대인 기피증도 커져갔다. 아버지는 그런 오빠를 칠칠치 못한 사내자식이라며 더욱 닦달을 했다. 허나 오빠는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미련하거나 칠칠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없는 여러 가지 손재주를 가졌고 기억력과 창의력도 있었다. 아버지의 지나친 간섭에 공부에 흥미를 잃고 내몰린 억압에 자신감을 잃었을 뿐이었다. 고등학교를 가까스로 마친 오빠는 대학을 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실망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내가 고등학생이 됐을 무렵 오빠가 결혼을 했다. 아버지가 어찌 고른 처녀와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올린 결혼이었다.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그나마 불효를 더는 일이라 생각해서였을까? 결혼 후 오빠는 딸만 셋을 낳았다. 두 째 손녀까지 간신히 참던 아버지가 셋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추운 겨울날 오빠 네를 집에서 내 보냈다. 그날 나는 뒤뜰에서 아버지 욕을, 원 없이 해대며 통곡하는 어머니를 붙들고 눈이 붓도록 울었다. 오빠 네가 떠난 우리 집은 겨울 내내 삭풍이 불었다. 꽁꽁 얼어붙은 얼음이 세월을 타도 녹을 줄을 몰랐다. 봄이 오건 가건 우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고 우리 집은 여전히 빙하 같은 얼음이 큰 벽을 치고 있었다. 어머니의 축 늘어진 눈꺼풀이 더 깊숙한 골을 쳤다. 항상 열려 있는 대문이 지나가는 바람에 떨커덩 거릴 때마다 어머니의 한숨이 눈처럼 내려앉았다. 오빠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은 네 번째 아들을 낳고서였다. 집을 떠난 지 4년 만이었다. 오직 아들만이 집안을 살리는 기둥이라고 믿는 아버지가 못 이긴 척 오빠 네를 받아들였다. 돌아온 오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아버지를 지극히 모셨다. 나는 차마 오빠에게 집 나갔던 4 년에 대한 것을 물어보지 못했다. 어머니가 갑자기 뇌출혈로 돌아가신 몇 개월 뒤 아버지가 병석에 누웠다. 암이라고 했다. 내가 미국으로 떠난 뒤 오빠가 시골에서 아버지의 수발을 들고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켰다. 우리 아버지만큼 집요하게 아들의 성공을 바란 분이 또 있었을까. 자식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시며 아버지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중년을 넘긴 나이에 내 초청으로 오빠가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친구도 별로 없고 남들이 다 치는 골프도 치지 않는 오빠가 유일하게 좋아한 것이 있었다. 일 년에 한두 번 가는 라스베이거스 여행이었다. 바스토우를 지나 몇 개의 고개를 넘으면 주 경계선인, 스테이트라인이 나온다고 신이 나 설명을 하곤 했다. 라스베이거스 가는 길을 오빠네 골목길처럼 알고 있었다. 그런 오빠에게 우린 “카지노 박사” 란 별명을 달아주며 웃어댔다. 라스베이거스를 가는 날 출발부터 오빠의 콧노래가 시작 되었다. 그때마다 지독한 음치인 오빠가 흥얼거리며 수많은 작사 작곡을 멋대로 해냈다. 풍족한 살림이 아니어서 조금 가지고 간 돈을 금새 다 잃어도 기죽지 않고 카지노 훈수를 해주었다. 언제나 제일 먼저 돈을 잃는 오빠에게 “박사님.” 훈수는 반대로 하면 된다고 놀려대기도 했다. 늘 내 곁에서 즐겁게 훈수를 했는데 이렇게 빨리 갈 줄 알았다면, 그 때 백 불짜리 몇 장 덥석 쥐어 드렸더라면 오빠가 얼마나 좋아했을까? 후회가 된다. 그 돈을 받아 들고 환한 얼굴로 게임을 하며 짧은 시간이나마 많이도 행복해 했을 텐데! 참으로 인색하고 생각이 모자란 동생이었다. 오빠가 세상을 떠나기 2개월 전, 라스베이거스 여행을 갔었다. 마지막 여행 때,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콧노래도, 가는 길 설명도, 훈수도 그리고 작사 작곡도 없었다. 몸이 아파서였겠지만 그 역시 살아생전 마지막 여행인 줄을 왜 몰랐을까! 오빠와 자주 여행을 다니지 못했던 게 많이 후회스럽다. 지금쯤 오빠는 남들의 지도자로 우뚝 서는 짐을 내려놓고 하늘나라에서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있을까? 아버지도 이미 오빠가 누구 앞에 내 놔도 부끄럽지 않는 아들이란 사실을 잘 아셨을 것이다. 언제나 내 곁에서 웃으며 카지노 훈수를 해 주던 오빠가 오늘 따라 더욱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