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춘란 견문록(見聞錄/atlas)88/서양난과 동양난/03 동양난의 역사(난일용561)

작성자정영희|작성시간26.06.19|조회수98 목록 댓글 0

한국춘란 견문록(見聞錄/atlas)88/서양난과 동양난03  동양난의 역사(난일용561)

동양난(東洋蘭)은 조선시대로 부터 시인묵객(詩人墨客)이나 사대부가의  전유물로서 실제 난을 배양하고 감상하는 취미생활에 목

적을 둔것이아니고 상징적 의미로 난을 그림으로서 난의 고고함과 청아한 난향에 자신의 격을 실어놓는 문인화(文人畵)로서 의미

를 담고 있었으며, 하여 현대에 이르러서도 난을 그린다는 의미가 아닌, "난을 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일찍이 난을 군자로

서의  격을 부여해온 중국의 난문화에서 비릇된 것이라 하겠다.

                                          
[동양난의 역사] 
난(蘭)의 어원은 BC6 세기경 공자(孔子)의 시경(詩經)에 나타나있으나 그러나 시모음집인 시경에서는 군자로서의 격(格)은 보이지

않고 단지 여인에 대한 구애(求愛)의 물표 이거나 처녀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표현되였다. 
이후 공자가어(孔子家語,:공자의 언행 및 문인과의 문답을 기록한책)에서 비로서 난이 군자의 격에 비유된다. 이후 난의 의미는 자

연스래 문인(文人) 묵객(墨客)들 에게서는 군자의 격을 갖추게 되였다. 그러나 난(蘭)이라는 진정한의미로 불려진것은 북송시대(北

宋時代) 중기 이후에야 비로서 난(蘭)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난(蘭)이 상징적 의미가 아닌 난이 완상(玩賞)의 대상으로 가꾸어 지기 시작한것은 북송시대 이후로 부터 남송시대에 이루

러 비로서 꽃을 피우게된다. 금장난보(金障蘭譜), 왕씨난보(王氏蘭譜,) 등 여러 책자가 나오면서 문인들 사이에 유행되면서 명대에
이르러 수묵사군자(水墨四君子)로의 자리에 서게되였다.

난(蘭)자를 파훼(破毁,)하여 보면 "艸(풀초)와, 門(문문)과, 柬(가릴간)으로 이루어저 있다. 즉 구조상 어의는  "향초중에서 고르고 골

라 간택한 명문의 귀녀"라는 뜻이다.
난(蘭,)의 시작은 蘭花似美人(난화사미인), 즉, "난꽃은 미인을 닮았다."또는, 幽蘭如貞女(유란여정여) 즉, "그윽한 난초는 정녀와 같
다", 라하여 여인의 내적, 외적 청초함과 우아한 아름다움의 상징과 여인에 대한 구애의 상징과 물표로 여겨져 왔다.  

▶한국춘란의 역사
문헌상에는 통일신라때의 고은(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의 왕비의 덕을 난혜(蘭蕙,)에 비유한 글로:夫人德芳蘭蕙..,로시작된 글
이 문헌상에는 최초로 나타나 있으며 또는 고려시대에는 이규보. 이곡, 정몽주 등의 많은 문인들의 글에서 나타나있다. 이후 세종

31년에 간행된 한국의 원예학의 시조라 할수있는 강희안의 양화소록에 한국춘란의 기록이 있다. 
이기록에 의하면 "...湖南沿海諸山者品佳 霜後勿傷垂帶 舊土依古方 栽盆爲妙"  즉 "호남해의 여러 산에서 나는것은 그품종이 아름

답다. 서리가 내린후에 뿌리가 상하지않게 자생지의 흙으로 싸주고, 옛방식에 의하여 분에 심으면좋다"라하여 한국 춘란(春蘭,)의

아름 다움이 소개되고 있다.

이후 여러 기록이 있으나 제주도에 유배생활을 하든 추사 김정희에 의해 한란이 육지에까지 알려지게 되였다. 그후 70년대후반부

터 80년대초 경에 일본인들에 의해 한국의 자생 춘란(春蘭)의 우수성이 알려지면서 많은 애호가와 한국춘란 취미단체가 생기게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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