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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웅덩이 물 푸기

작성자이냐시오|작성시간23.02.26|조회수34 목록 댓글 0

해마다 모내기 철이나 여름에 가뭄이 들면 웅덩이 물을 퍼서 논에 댄다.

전기가 없으니 당연히 양수기나 모터도 없다.

어느날 우리집 일꾼 형님이 꼬맹이인 나를 델꼬 웅덩이 물을 푸러 갔다.

물을 퍼내는 도구는 물이 담기는 양철통을 사방에 새끼끈으로 묶어서

2인 1조로 웅덩이의 물을 퍼내는 것이다.

 

처음에는 물이 웅덩이에 가득하니까 끈을 짧게 손에 감아잡고 시작하지만

물이 줄어들면 조금씩 끈을 풀어서 길게 해야 한다.

물푸는 광경을 보기는 많이 보았지만 실제 해보는 건 처음이라 약간 겁도 났다.

그런데 형님이 요령을 알려주면서 살살 해보니까 별 어려움이 없다.

끈을 양손으로 맞잡고 웅덩이쪽은 살짝 길게 잡는다.

 

골프 연습하듯 처음에 빈 양동이를 하나둘 하나둘 하면서 흔들흔들 해보았다.

그리고 나서 형님과 박자를 맞춰 양동이를 웅덩이 물위로 가볍게 던지면서 물을 살짝 퍼담은 다음

허리의 반동을 이용하여 팔을 당겨 퍼올리고 다 올라왔을 때 바깥 팔을 윗쪽으로 툭 쳐올리면

양동이의 물이 논으로 쏟아졌다.

몇 번 해보니 금방 요령을 알게 되었고, 이후부터는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같은 동작을

무한 반복하였다.

 

물을 푸면서 말을 하면 호흡이 흐트러져서 힘이 더 드니까 말도 안했고,

키도 작고 힘도 딸렸지만 물처럼 바람처럼 물양동이 퍼올리기에 몸을 맡겼더랬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깨와 온 몸의 힘을 뺀 상태였던 거 같다.

그러니 백여평 넓이에 어른 키 한 길 정도의 웅덩이 물을 다 퍼내면서도 

별로 피곤한 줄 몰랐다.

 

물론 중간중간에 형님이 "아이구, 우리 민이 잘~~ 하네" 칭찬과 추임새도 한 몫을 했을 터다.

웅덩이의 물이 점점 줄어들고 논에 물이 그득히 차는 걸 보면서 가을에 풍년이 된 우리 벼농사를

상상하면 피곤할 줄 몰랐다.

물이 한참 줄어서 드디어 저 밑바닥에 구정물이 고이고 물깊이도 무르팍 정도가 되면

웅덩이 윗쪽에서부터 물속에 잠수함 같은 뭔가가 어슬렁거리는게 보인다.

 

조금 더 물을 퍼낸 다음 바케쓰를 들고 웅덩이에 내려가서 맨손으로 커다란 물고기를 잡는다.

제일 큰 넘은 팔뚝만한 가물치이다.

이 넘은 이빨도 날카롭고 얼마나 힘이 좋은지 잡기가 힘이 든다.

평소에 들은 이야기로는 싸릿대 가지에 나이론줄을 묶어 큰 바늘에 미꾸라지를 끼워서 웅덩이 둑에

여러개를 꽂아두고 다음날 새벽에 오면 두세마리가 물려있다는 것이다.

가물치는 산후 조리에 좋다고 소문이 나서 인기 어종인데 귀하신 몸이었다.

가물치를 잡고 난 다음은 손바닥만한 붕어와 작은 거 까지 몇 십마리를 잡으면 끝이다.

 

이제 오후 나절의 과업이 끝나고 해도 서서히 저무는 시각이다.

도구들을 정리하여 집에 돌아오면 마치 개선장군이 된 듯이 어른들이 환영해 준다.

시원한 우물물로 온몸을 씻고 마당의 평상에 오르면 저녁의 고봉밥은 꿀맛이다.

잡아온 붕어는 비늘을 쳐내고 내장을 따서 부엌에 주면 간장과 고춧가루, 양파 대파 등을 넣고

아궁이 숯불에 자글자글 끓여낸다.

밥 반찬 외에 일꾼 형님의 웅덩이 물푸는 내 솜씨 칭찬은 또 하나의 맛난 반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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