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6월 13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작성자요산요수(요셉)|작성시간26.06.12|조회수27 목록 댓글 0

 

 

 

2026년 06월 13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제1독서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61,9-11

내 백성의 9 후손은 민족들 사이에,

내 백성의 자손은 겨레들 가운데에 널리 알려져

그들을 보는 자들은 모두 그들이 주님께 복 받은 종족임을 알게 되리라.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1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41-51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해마다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성가정의 발걸음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동사 “가곤 하였다.”(루카 2,41)가

암시하듯 되풀이되는 경건한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이 익숙한 리듬은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됩니다.

유다 전통에서 ‘성인의 책임’을 묻는 나이에 가까운 열두 살에 예수님께서는

유다 전통의 익숙함을 끊고 성전에 머물기를 ‘선택’하십니다.

이는 부모의 실수라기보다는,

성년의 문턱에서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시고자 하신 예수님의 결단이지요.
부모가 예수님을 찾아 헤맨

‘사흘’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인 ‘사흘’을 미리 보여 줍니다.

성전의 율법 교사들 사이에 앉아 계신 소년 예수님의 모습은

뒷날 수난 직전 성전에서 펼쳐질 율법 교사들과의 논쟁을 미리 보여 주며,

주님 수난의 큰 슬픔을 마주하게 될 독자들을 미리 준비시키는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슬픔이나 고통 너머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

이 질문은 애타게 아들을 찾던 부모에게는 차갑지만, 믿는 모든 이에게는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을 넘어 신성한 하느님의 자리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신앙의 원형을 보여 줍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그 ‘사흘’의 시간을 통하여 저만치 멀리 계신 하느님께서

우리 삶 한가운데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는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나자렛으로 내려가시어

부모에게 순종하시며 일상을 보내십니다.

가장 신성한 순간과 가장 평범한 순종이 교차하는 지점,

그곳이 바로 우리의 삶이고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하느님 현존의 자리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빠다킹신부

 

 

“인간은 평생 자기 뇌의 10%도 쓰지 못한다.”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는 말일까요?

학창 시절에 선생님께서 이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인슈타인은 자기 뇌의 15%를 써서 위대한 물리학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뇌의 1%만 더 써도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지요.

 

아마 지금도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알츠하이머의 경우 손상하는 뇌가 10~20%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뇌의 부분이 80~90%나 되는데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것일까요?

 

사실 모든 사람은 자기 뇌의 100%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만약 뇌의 10% 정도만 사용하게 된다면 생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의 말은 잘못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잠재력입니다.

자기가 가진 잠재력의 10%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뇌를 100% 활용하고 있습니다.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잠재력은 뇌의 활동량과 상관없습니다.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노력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잠재력은 얼마나 쓰고 있을까요?

한 10%는 쓰고 있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뜻을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잠재력일 것입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고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철저히 동참하신

성모님의 순결하고 거룩한 마음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발견합니다.

 

소년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다가 사흘 만에 다시 찾습니다.

성모님께서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라고 말씀하시자,

예수님께서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부모보다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분의 뜻이 우선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해도 순명하십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라고 복음은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성모님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 앞에서도 하느님을 애타게 찾고,

그분의 신비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며,

삶의 모든 사건을 기도로 마음속에 간직하는 거룩한 마음을 높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완벽한 협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슬픔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며,

행복은 하느님을 향해 열린 시선입니다.

회개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저 시선을 아래에서 위로 옮기는 일,

눈길을 살짝 들어 올리는 일이면 충분합니다(성 카를로 아쿠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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