註 : 이 보고서는 김대건 부제가 1845년 3월부터 서울에서 작성하여 상해에 가지고 가서
그해 7월에 리브아 신부에게 발송한 것이다.
조선 교회 창립에 관한 개요
조선은 처음부터 잡다한 여러 가지 미신과 우스꽝스런 토속신앙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조상의 신
령, 중국 철학인 유교, 석가의 불교, 또 성주(가족을 지키는 신), 터주(집터를 지키는 신), 삼신(아기를
점지한다는 삼신령), 제석(帝釋: 집안의 안녕을 맡아보는 신), 구농(무당이 열두 거리 굿에서 아홉째
로 부르는 귀신, 만명(萬明: 무당이 김유신의 어머니를 신격화하여 위하는 신), 성황당(城隍堂: 마을
의 수호신), 영등(靈登: 영등날 세상에 내려와서 농촌의 실정을 조사하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할머니),
태백(太白:선인과 악인을 상벌하는 가신, 즉 가정의 신), 관우(關羽: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으로
전쟁의 신), 직성(直星: 사람의 행년을 따라 그의 운명을 맡은 별), 미륵(彌勒: 돌부처의 범칭) 등을 주
로 섬기고 있습니다.
주요한 종파로는 불교의 여러 종파, 무당, 하늘의 구지학, 태우긴, 소우긴 등입니다. 처음부터 이처럼
가소로운 오류 가운데 처해 있으면서도 양심이 올바른 몇 사람이 자연적이고 이성적 빛으로 참 하느
님을 인식하고 종교를 통하여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이즈음에 북경에서는 예수회원들이 높은 관직에 오르고 학자의 칭호를 얻은 이들이 있어서 그들의
명성이 자자하였습니다. 북경을 드나들던 조선 사신들에 의하여 조선에 천주교 사상이 전파되었고
천주교 서적이 전해졌습니다.
같은 시기에 홍유한(洪儒漢)이라는 철학자는 이미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자연
적 사물의 이치로 스스로 깨닫고 가톨릭교회의 서적을 연구함으로써 진리를 이해하였으며, 비록 세
례는 받지 않았지만 천주교 신자처럼 하느님을 공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천주교에 대한 기초지식도 없었고 교회의 법규도 몰라서 단지 매달 일곱째 날을 거룩하
게 지킬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 옛 전통을 따라 일곱째 날을 다른 날보다는 공경할 만
한 날이라고 알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천수를 누리고 성덕을 찬양받으면서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
이후로 다른 많은 철학자들도 결국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인식하기에 이르
렀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유명한 사람이 이벽(李檗)이라는 분이었는데, 그는 후에 세자 요한이라는 본명으로 세
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큰 학자로서 참 하느님의 교리에 대하여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북경에서 하늘의 주님을 섬기는 종교, 즉 천주교가 성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보내어 천주교
서적을 가져오게 하려고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동안의 기간이 지난후 5명의 동지사 사절단이 북경을 향하여 출발하게 되었는데, 그 사절단의
제3인자인 서장관(書狀官)의 아들 이승훈(李承薰)이라는 사람이 이벽을 찾아가서 자기가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떠나게 되었음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이벽은 좋은 기회를 잡게 된 것입니다.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 도착하거든 예수회원이라는 서양 사람들을 찾아가서 천주교라는 종교 서적을 얻
어오라고 일렀습니다. 그리하여 이승훈은 북경에 도착하자 북경의 주교님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주교님으로부터 큰 환영을 받고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 때 베드로라는 본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북경
을 떠나올 때 가톨릭교회의 서적과 성물을 조선에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하여 1784년 에 천주교가 조
선에 소개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와 관인들이 가톨릭교의 진리를 깨닫고 여기에 매혹되어 그리스도께 가담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지위나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오류
를 떠나 참 하느님에게로 전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승훈, 권일신, 이존창, 이단원, 최창현, 유항검 등이 매우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들끼리 주교와 사제를 선출하고 세례, 견진, 고해 등 온갖 성사를 집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모여 거창하게 미사를 드렸습니다.
신자수가 증가함에 따라 그 주교와 사제들은 조선 전체를 천주교로 전향시키려 진력하였습니다. 그
러다가 그들은 우연히 자기들의 과오를 깨닫게 되자 즉시 미사거행과 성사집전을 중지하고 북경 주
교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기들의 포교 방법과 지금까지의 모든 행적을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듣고 북경 주교님은 앞으로는 그 주교와 사제들이 더 이상 성사를 집해하지 말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였고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박해가 일
어나자 그들은 모두가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습니다.
종교 활동은 별로 오래 자유를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에 천주교가 소개된 지 7년 후, 즉 1791년에
조선왕국의 조정 대신 중 벽파가 시파를 반대하여 들고일어났습니다. 벽파의 반대파를 시파라 불렀
는데 시파에 의하여 천주교가 조선에 도입되었습니다. 그래서 벽파는 시파에 대한 원한을 천주교인
에게 쏟았습니다.
그들은 천주교라는 이름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왕의 허가를 얻어 박해하였습니다. 왕은 마지못해 억
지로 허가하였습니다. 이것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신해박해였습니다.
이 박해에서 탁월한 학자인 윤지충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용맹이 투쟁하다가 가톨릭교
의 신앙을 위하여 거룩한 피를 흘려 순교하였습니다. 이 분이 바로 조선의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비교적 평온한 상태가 계속되었으나 1795년에 이르러 을묘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그 해에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파견되었습니다. 그 후 7년 동안 신자들은 평화를
누렸습니다. 그동안 신자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인에게 관대하게 대하던 왕(정조)이 세
상을 떠나자 나라의 최고 권력이 김 대비(정순왕후)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노론이라고도 불리던
벽파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남인의 세력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가 이제 남인들에게 반기를 들고일
어났던 것입니다.
벽파 사람들은 천주교를 적대시하고 있었고 남인들은 대개가 시파로서 천주교에 대하여 호의적이었
습니다. 남인 가운데 많은 사람이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이제 나라의 실권이 남인에서 노론에게로 넘
어간 것입니다.
이리하여 노론 벽파에 속한 정순왕후는 벽파 노론 대신들의 권고대로 주로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
여 조선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말살하려고 광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의 종들이
사형되도록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 18년 만에, 즉 1801년에 일어난
세 번째 박해였습니다.
이 박해로 수많은 고관과 양반, 또 왕의 제수 등 왕족의 신자 부인들까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주문
모 야고보 신부도 김여삼 이라는 마귀 같은 신자의 배반으로 순교의 화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침
내 박해자 김 대왕대비가 죽자 몇 년 동안 신자들에게 평화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
아 1816년 신자들에 대한 대박해가 맹위를 떨쳤습니다.
이 네 번째 박해에서 조선 신자들 사이에 유명한 김군미 암브로시오는 그리스도의 신앙 때문에 자진
하여 잡혔습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46일 동안 옥중에서 음식 한 톨,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감옥 안에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왕의 총애를 받던 황사영 알렉산델 이라는 고명한 철학자가 이 땅의 천주교가 너무
나도 억압당하고 괴로운 처지에 있음을 보다 못해, 교묘하게 편지를 써서 종교의 자유를 폭력으로 얻
기 위하여 군함을 보내주도록 교황청에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의주에서 포졸들에게 들켜
압수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뜯어보니 흰 종이 외에는 아무 글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편지가 교묘하게 씌 여진 것
임을 알아차린 자들이 읽는 방법을 알아내어 모든 내용을 판관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 편지를 전하
려던 사람도 잡혀 수도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이후로는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더욱 악랄해졌습니
다. 알렉산델 황사영은 단지 종교문제뿐만 아니라 자신이 작성한 이 편지로 인하여 더욱 혹독한 형벌
을 당하였고 그의 시체는 여섯 토막으로 찢기었습니다.
그 후 1819년, 1828년, 1833년, 1836년에도 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가 신앙을 위하여 극복될 수 없는
항구심으로 피를 흘렸습니다. 특히 조선의 두 번째 ㅗ간할 지역인 충청도에서는 여러 차례 박해가 일
어나 많은 신자촌이 파멸되었습니다.
이렇게 조선의 신자들은 33년 동안 목자 없이 지냈습니다. 그동안 하느님의 보호로 신자수는 줄지 않
고 나날이 늘어갔습니다. 마침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조선에 목자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리하여 1831년에 유 파치피코(유방제) 신부가 입국하였다가 1835년에 중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윽고 1834년에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의 모방 신부님이 조선에 들어오고 1835년에는 샤스탱 신부님
이, 그리고 1836년에는 조선 대목구장이신 앵베르 주교님이 입국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외교인들의 전향이 쉬울 것 같이 보였습니다. 신자수도 많이 늘어나고 신앙의 열성이 증가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에 천주교가 도입된 지 55년째인
1839년에 김여상 요한이라는 새 신자가 돈에 눈에 어두워 먼저 일반 신자들 그리고 다음에는 신부님
들까지 밀고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조선 교회에 다섯 번째(기해)박해가 일어났습니다. 대왕대비는 이러한 박해를 말리려 하였
으나 당시 세력을 뻗기 시작한 벽파 대신들, 특히 영의정 조만영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박
해에서 조선 대목구장이신 앵베르 주교님, 모방 신부님, 샤스탕 신부님과 2백여 명이나 되는 신자가
순교하였습니다. 이제 조선 교회의 순교자 수는 8백 명, 또는 그 이상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1839년 이후 오늘까지 1839년 이후 오늘까지 5년 동안 신자들이 평화를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
나 목자 없이 울고 탄식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저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조속히
조선에 목자들을 보내시어 흩어진 양들을 모으시고 한 목자 아래 한 양 우리를 이루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