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関根의 요한복음(1) -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21.07.04|조회수92 목록 댓글 0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

(파라클레토스 2021.4)

세키네 요시오(関根義夫)

 

1. 시작하며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복음서나 사도 바울의 편지가 전하는 복음과 조금 다른 영적 세계를 보았습니다. 계시록은 우리가 추구하는 하늘나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나라에 대해서 실로 생생한 신앙의 증거를 보여주는 책이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처소가 사람 가운데 있어,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살며,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은 스스로 사람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하나님 되었고, 직접 모두의 눈물을 닦아주신다. 그리하여 죽음이 없고, 또한 슬픔도 근심도 없다. 처음의 사람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계 21:3,4)

   저는 특히 이 말씀에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서 수많은 것을 배웠고, 눈이 열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말하는 일들이 모든 사람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압니다. 때로는 오히려 이해에 혼란을 주는 부분도 있어 곤혹스럽기도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복음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당시(기원 1세기말)의 신앙 싸움이라는 리얼한 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면,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우리의 걸음은 어느 시대나 어떤 형태로든 신앙 전투라는 역사의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신앙 전투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왠지 온몸에 긴장을 느끼게 됩니다.

 

2. 요한복음으로 돌아가다.

   계시록의 세계를 생생하게 경험한 지금, 성서가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그 참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중 특히 영에 관해 많은 말을 들려주는 요한복음을 찬찬히 공부해보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역시 계시록에서처럼 어쨌든 일상의 신앙 전투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이 책의 저자인 요한은 자신의 전심전력을 기울여 글을 남겼습니다. 주 예수에 대해서 요한 자신이 본 것, 체험한 것을 기도하면서 천천히 들어보기로 합시다.

 

3. 이스라엘 백성의 유일신 신앙

   우리가 받은 복음의 핵심이며, 요한복음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복음은 삼위일체의 신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한 처음부터 추구해왔던 진수(眞髓)라 할까, 결론이라 할까 … 이 백성들이 찾고 찾았던 궁극의 그 무엇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의 조상들이 역사의 흐름 안에서 자신이 사는 세상을 창조한 분에게 관심을 가진 게 언제부터였을까요? 그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 관심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알고, 일상을 이어가면서도 진지하게 사색하고, 그 생각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시기에 진실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이 나왔으며, 거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고, 전지전능의 유일신, 실로 거룩하고 의이신 하나님만을 오로지, 어쩌면 고집스럽다 할 정도로, 단단히 믿음을 지켜왔습니다.

 

4.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진실한 바람에 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에 가장 적절한 때에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가장 평범한 보통의 부부 슬하의 자녀로, 그러나 특별하게 아들 예수를 태어나게 했습니다. 이 예수야말로 온 세상의 백성을 최종 구원하십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성서는 우리에게 확실히 말합니다.

   이 예수는 지상에서 지내는 동안, 그 마음의 정결함, 깊음, 넓음, 높음을 다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병든 사람, 마음이 아픈 사람, 아니 모든 사람의 구주로 살았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는 참으로 진실하셔서,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가 되어 십자가의 수치를 당했습니다. 피를 흘리며 목숨까지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사렛 예수는 부활하여,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도 거룩한 영으로써, 진실하게 자기를 구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임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중 마지막 3년을 같이 했던 제자들 중에 마태와 마가, 누가가 있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가까이 접했던 주 예수에 대해 각각 자기 나름대로 마음을 담고 기도를 담아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눈앞에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문서로 남겼습니다. 그것이 공관복음이며,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책들입니다.

 

5. 삼위일체의 신관

   그런데 그들과 함께 예수를 따르던 한 사람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 중 가장 오래까지 살았던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주 예수의 영적인 부분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것을 정리하여 기록을 남겼는데, 바로 제4의 복음서 요한복음입니다.

   이 요한복음에는 아버지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고 성령에 대한 삼위일체의 신관이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으로 우리는 참 하나님을, 그 영의 깊음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이 신관이 있어, 모든 사람의 최대 문제인 죄의 해결에 이르는 길이 드디어 보입니다.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주 예수를 보냈습니다. 예수는 그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했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 후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였는데, 이는 하나님 자신의 세 번째 등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6. 구약성서의 중요성

   지금까지의 내용을 다시 보자면, 요한은 가장 심오한 신관을 계시하여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의한 속죄의 복음이 우리에게 임하였다고 썼습니다. 이 구원의 과정을 돌이켜 보려면, 우리는 신약성서와 함께 그 복음 신앙이 출발하고 성장해 온 긴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조상의 고난과 은혜와 소망의 기록인 구약성서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무엇에도 대신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신약과 연결되는 인류의 귀중한 영적 유산입니다.

서론이 너무 길어져 버렸습니다만, 이제부터 살아서 일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요한복음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겨가고자 합니다.

 

7.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요한복음 첫 마디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입니다. 말씀이 있었다고 하는 게 굉장한 무게감으로 다가옵니다. 뒤를 이어,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하고, ‘말씀이 하나님이었다’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처음 모든 것들로부터 독립되어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완전하게 ‘말씀’ 그 자체로 존재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완전한 독립 존재였다고 말한 바로 뒤에, 실은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하니, 얼핏 모순되는 듯 보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말씀은 완전히 독립하여 존재하고 행동하는 동시에, 또한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말씀은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독립적 존재이면서 항상 하나님과 함께였다는 말입니다. ‘말씀’에 관한 세 번째 구절이 ‘말씀이 하나님이었다’입니다.

   셋이면서 하나인 동시에, 하나이면서 각각은 완전한 독립 존재 셋이라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특별한 모습이 분명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8. 아브라함에게 말을 건넨 하나님

   구약성서를 읽다 보면, 예를 들어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경우, 아직 아브람이던 시절 그에게 어느 날 하나님께서 말을 하십니다.

   "너는 네 고향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거라(12:1)"

   이를 신약성서의 세계관으로 보면, 성령으로 일하셨던 게 아닌가 상상해 봅니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을 걸었던 시대입니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말하는 이는 오직 한 분,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말씀’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였다고 했습니다. 이 표현이야말로 아브라함에게 말을 건네신 하나님이라는 분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이야기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9. 만물은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이 표현은 창세기 1장 3절 함께 이어서 읽으면 한층 이해가 쉽습니다.

   "만물은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이뤄진 것 중 말씀에 의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빛, 있으라.’ 그러자 빛이 있었다. 하나님은 빛을 보시고 좋아하셨다.”

   하나님은 빛을 불러낸 후, 계속하여 똑같이 말씀을 발하심으로 물을 만들고 하늘을 구분하여 하늘과 땅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식물을, 하늘에 빛나는 것들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남자 여자로 창조하였습니다. 이렇게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 모두가 말씀으로 이루어졌다고, 성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10.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

   일본어 신공동역에서는 위의 제목처럼 번역했는데, 이전의 구어역 성서는 ‘이 말씀에 생명이 있었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회인이 될 무렵부터 윗옷 안쪽 주머니에 구어역 성서를 넣고 다니며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서의 표지 가죽이 닳고 찢어져 새로 출판된 신공동역 작은 성서로 바꾸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요한복음 이 부분을 읽는데, 번역이 달라진 것을 알았습니다.

   - 신공동역 :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

   - 구어역 : 이 말씀에 생명이 있었다.

   다른 점은 ‘이’라는 지시대명사와 ‘~의 안에’가 있느냐 없느냐였습니다.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 보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이 다른 점을 처음 접하고 적이 실망했었습니다. 꽤 오랫동안, 왠지 ‘이’를 누락시킨 문장이 낯설었습니다. ‘말씀에 생명이 있었다’와 ‘이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그동안 ‘이’가 붙여진 구어역 성서가 생명의 근원이신 분을 긴 세월에 걸쳐 확실히 가르쳐 보여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물론 익숙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두 번역이 합해져서, “이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로 하는 게 가장 옳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표현은,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 즉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분명히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영원의 태초(시작)부터 하나님의 나라 완성 때까지, 전능자로서 힘을 갖춘 완전한 하나님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와의 만남을 허락받은 자는 삶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영을 받습니다. 이 성령의 힘은 안에서부터 우리를 움직여 소망과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살도록 이끄십니다. 얼마나 놀랍고 기쁜 일입니까.

   우리의 주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욱 마음 깊이 찬송합니다.

 

11. 생명은 인간을 비추는 빛

   여기까지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요한은 한층 더 고조되는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생명은 인간을 비치는 빛이었다."

   우리는 앞에서 주 예수야말로 영원의 태초(시작)에 존재하고 있는 말씀이며, 참생명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가 참으로 인간을,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비추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 어두운 구석까지 밝게 비춰주신다는 말이겠지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나라는 인간은 세상에서 언제 사라지더라도,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는,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인 사람입니다. 그런 나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신 앞에 분명히 비춰주시고, ‘나는 너를 절대로 잊지 않는다’ 하시며, 그 존재를 확인하고 보증해 준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와 만나게 된 자는 정말로 행복하다 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어떻게 주님께 감사해야 할지 모를 정도의 은혜입니다.

 

12. 빛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두움

   생명이시고 빛이신 말씀은 흑암 중에서 빛나고 있었다고 요한은 기록합니다. 그러나 흑암은 이 빛나고 있는 빛을 이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분명히 상식적으로 볼 때, 흑암은 빛의 출현과 함께 스스로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는다는 건, 흑암이 빛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다, 즉 빛을 빛이라 인식하지 못하는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빛과 어둠의 관계는 자연계의 빛과 어둠의 관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곳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이 ‘이해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일시적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해서 이해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고의로 인정하지 않거나, 빛이라는 걸 모르거나, 체험해 본 일이 없거나 하는 이 셋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도 신공동역과 개역과의 번역에 차이가 있습니다.

   - 신공동역 : 어둠은 빛을 이해하지 않았다.

   - 구어역 : 어둠은 이것에 이기지 못했다.

   둘 다 이해 가능한 번역이지만, 신공동역에 생각할 바가 있습니다. 어둠은 진정한 빛이신 그리스도가 눈앞에 등장했는데도, 그 사실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큰일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는, 즉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의 등장이 사람들에게 준 영향력을 충분히 느꼈으면서도 완고하게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이 자세가 참 빛이신 주 예수를 십자가에 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저자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 첫머리의 짧은 문장 안에 이 책의 중요한 결론을 이렇게 정리해서 제시한 다음, 실로 깊고 풍부한 내용으로 기록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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