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関根의 요한복음(3) -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21.08.23|조회수91 목록 댓글 1

(요한복음3)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파라클레토스 2021년 6월호)

 

세키네요시오(関根義夫)

 

    요한복음에 의하면, 세례요한이 메시아이신 나사렛 예수를 만나 세례를 베풀었을 때, 예수는 비로소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습니다. 다음 날, 세례요한은 제자 중 시몬 베드로의 형 안드레와 다른 한 사람과 함께 있다가, 예수가 가까이 걸어오시므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예수에게 집중하며 두 제자에게 말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이 두 사람은 세례요한에게 선택받은 제자였습니다. 다음날에도 요한이 그 두 제자와 함께 있는데, 예수께서 가까이 오십니다. 그는 같은 말을 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요한은 제자 중에서 둘을 뽑아 자신보다 훨씬 대단한 예수에게 지도를 부탁하며, 상대가 어떤 분인지 알려주었습니다.

 

1. 두 제자

    청년들은 이틀 연속 같은 경험을 한 후, 스승이 알려준 뜻깊은 암시를 받고 나사렛 예수를 따라갑니다. 안드레와 함께한 제자가 누군지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이 책의 저자 요한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는 조심스러운 듯 약간 거리를 두고 뒤따라오는 두 청년에게 신경이 쓰입니다. 그리하여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며 묻습니다.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청년들은 예수의 질문에 용기를 내 가까이 다가가서 입을 엽니다.

    “선생님, 어디서 머무십니까?”

    예수는 이 둘의 진지한 관심에 대답해 줍니다.

    “따라오라. 그러면 알 것이다.”

    이 대답은 청년들에게 큰 떨림과 기대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따라가서 예수가 어디에 머무는지 알았다. 그리고 그날 예수와 함께 묵었다. 오후 네 시경의 일이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2. 나의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맞는 자

   저는 지난번 글에서 마태복음을 인용하였습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예수가 물에서 올라올 때, 하늘이 예수를 향해 열렸다. 예수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자신 위에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맞는 자’라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왔다는 걸 체험한 이는 바로 예수 자신이라는 마태의 기록입니다. 이는 마태뿐만 아니라 마가, 누가도 같습니다. 체험의 당사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주 예수 자신임을 명료하게 밝혀두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좀 다릅니다. 세 복음서가 예수 자신의 체험으로 기록한 일을 요한의 시점에서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와 이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분을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이가, ‘영이 내려와 어떤 사람에게 머물게 되면,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사람이다’라고 내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그래서 이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한다.” (요1:34)

    윗글의 ‘나’는 세례요한입니다. 공관복음에서 기록했던, 물에서 올라온 후 예수께서 하신 체험을, 세례요한도 곁에서 어떤 형태로든 함께 체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충분히 있습니다. 아니라면 요한이 이렇게 기록할 리가 없습니다.

 

3. 최초의 제자들

    뒤따라온 두 사람이 ‘선생님, 어디서 머무십니까’ 묻자, 예수는 따라오면 알 것이라 대답하고는 앞장서 성큼성큼 걸어갑니다. 두 청년은 자신들을 받아준 것이 기뻐서 주 예수를 따라가 그날 밤을 거기서 지냈다고 요한은 기록하였습니다. 물론 좋은 숙소는 기대하지 않았겠지요. 아마도 길가의 아주 작은 숙소였을 것입니다. 두 청년은 자신들을 받아준 선생 곁에서 한 말씀 한 말씀을 몰입하여 듣지 않았을까요? 사실 이건 단순한 상상이 아닙니다. 다음날 안드레가 형제 시몬을 만나 한 말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메시야를 만났어.”

이 말에서 안드레의 흥분이 느껴집니다. 안드레는 시몬을 예수에게 데려갑니다. 예수는 시몬을 찬찬히 보더니, 처음 만난 그에게 의외의 말을 합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인데, 게바라 불릴 것이다.”

    안드레는 물론 당사자인 시몬도 깜짝 놀랐겠지요. 아버지의 이름이 요한인 것을 아는 데다가, 앞으로 게바(바위)라 부르게 된다니…. 두 사람은 뭐가 뭔지 모르지만 예수의 매력에 빠져 포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후 예수는 유다지방을 떠나 갈릴리로 가는 도중에 안드레와 베드로의 고향 뱃새다 출신 빌립을 만나 합류를 권유합니다. 예수는 빌립이 뱃새다 출신인 것을 알았을까요? 그 빌립은 나다나엘을 만납니다. 처음에는 빌립의 권유에 요지부동이던 나다나엘이, 자신의 일을 꿰고 있는 주 예수에게 놀란 후 완전히 매료됩니다. 결국 그도 일행이 되어 따르게 됩니다.

 

4.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주 예수는 그 나다나엘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분명히 말한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 내려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하나님의 천사를,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은혜’로 바꾸어도 좋습니다. 주 예수에게는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영적 축복으로 가득하여 언제라도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후에 예수께서 했던 말씀 그대로입니다.

    “아버지가 일하시지 않으면, 아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아들도 수행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자신이 하는 일 모두를 아들에게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내 의지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기 때문이다.”(요 5:19,20,30)

    지상의 주 예수는 천상의 아버지 하나님과 영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해 서서, 그 뜻을 기도로 끊임없이 들으셨던 주 예수의 모습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많이 봅니다.

 

5. 무엇을 구하는가?

스승 세례요한으로부터 예수를 소개받은 두 청년은 이제 진지하게 그 뒤를 따릅니다. 예수는 조금 뒤떨어져 따라오는 그들에게 마침내 돌아서서, 무엇을 구하는지 물어 봅니다. 두 청년은 용기를 내어 다가가 어디에서 머무시는지 묻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첫 질문이 정말로 ‘어디서 머무십니까’였을까?

 

6. 질문의 참뜻

    주 예수로부터 무엇을 구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고, 두 청년은 생뚱맞게 어디서 머무시는지를 묻습니다. 숙소가 어딘지 묻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실은 그날 밤의 숙소가 어딘지를 묻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입니다. 예수께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그리고 자신들도 구하고 있는 것, 바로 영혼이 머무는 곳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게 아닐까요?

    주 예수는 이 청년들이 구하는 것을 예리하게 파악하였고, 공통의 영적 세계가 열리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따라오라. 그러면 알게 된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입니다. 어쩌면 두 청년은 단순히 예수께서 오늘 밤 묵으실 곳을 알고 싶어 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따라가서 어디에 머무시는지 알았고, 그날 밤을 함께 지냈는데 오후 4시경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 문장도 솔직히 말하면, 뭔가 명쾌하지 않고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이 듭니다. 왜 요한은 ‘어디에 예수가 머무는지를 알았다’라는 문장을 굳이 남겼을까요? 혹시 예수께서 제대로 된 집이 아니라, 넓은 들판 한구석에서 지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그날은 예수와 함께 묵었다. 오후 4시경이었다’라는 문장도 시원하게 풀리지 않습니다. 숙소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4시이면 아직 밝습니다. 그때부터 열렬하게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밤이 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두 청년은 그밤을 예수와 함께 머물었다는 것이 훨씬 합리적입니다. 요한이 알기 쉽게 이렇게 써주었더라면 참 좋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숙소에 도착한 게 아직 어둡지 않은 오후 4시경이었다. 그곳에서 주 예수와 청년들은 이야기에 열을 올렸고, 문득 깨닫고 보니 밤이 되어, 그 밤을 예수의 곁에 머물렀다.”

 

7. 생애의 스승으로

    왜 제가 이 장면에 집착하는지 말해 보겠습니다. 청년들은 스승 세례요한이 소개한 분과 만나 그저 안면을 익히자는 속내가 아니었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이제부터 나와 생애의 걸음을 함께 한다, 약간 세게 말하면, 평생의 스승으로 목숨을 걸 생각이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세례요한은 이스라엘 동포의 메시아 대망 염원을 함께 나누었던 두 청년의 남다른 열성을 특별히 아꼈습니다. 자신이 직접 가르치고 키운 청년들을, 메시아라고 확신한 나사렛 예수에게 부탁합니다. 요한은, 이분이야말로 성령으로 계시를 받았던, 자신은 그의 신발끈 풀 자격도 없는, 귀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영적 직관과 깊은 기도의 생활로 알아보았습니다. 요한은 세상에 그분을 소개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믿었습니다. 이제부터 요한복음 저자의 시점은 세례요한에서 주 예수로 조용히 움직여갑니다.

 

8. 두 제자가 구한 것

    두 청년이 세례요한의 소개로 예수를 따라가며 ‘무엇을 구하는가’라는 물음에 ‘어디서 머무십니까?’로 대답합니다. 저는 청년들의 질문이 연상인 초대면의 사람에게 무례하지 않은 질문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뭔가 부족하고 어색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이 ‘머물다’는 단어가 원어로 ‘μενω 메노’이며, 그 뜻은 대략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머물다(泊)’이며, 두 번째가 ‘닿다(留), 이어지다(繋)’입니다. 이 ‘μενω 메노’는 요한복음 15장에 많이 등장합니다. 아시는 바대로 유명한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1절부터 10절까지 이 ‘μενω 메노’가 12회나 사용되었습니다. 신공동역(新共同訳)은 이 ‘μενω 메노’를 ‘이어지다’라는 뜻으로 9회, ‘닿다’는 뜻으로 3회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는 1장처럼 ‘머물다’가 아니라, ‘이어지다, 닿다’로 쓰고 있습니다.

 

9. 나에게 붙어 있으시오

    요한복음 15장 헬라어 번역입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라. 그러면 나도 너에게 이어져 있다. 나의 사랑에 머물러 있으라.” 등등. 짧은 이야기 안에 전부 12회나 ‘이어지다, 닿다’가 나옵니다. 물론 같은 단어 ‘μενω 메노’라는 헬라어입니다.

    앞에서 두 청년이 했던 질문, ‘어디에 머무십니까’의 ‘머물다’와 15장의 ‘이어지다, 닿다’는 모두 같은 헬라어 ‘μενω 메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청년들이 예수께 한 첫 질문, ‘선생님, 어디에 머무십니까’라는 물음 속에 ‘선생님은 어디에 닿아 있는(이어진) 분입니까?’라는 이중적 의미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한 특정 장소를 상상하게 합니다. 그 장소가 어디일까요? 주 예수에게는 당연히 아버지 하나님이시겠지요. 우리에게는 주 예수님 그분입니다.

 

    주 예수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게 이어져 있으면 나도 그에게 이어져 있다. 그때 사람은 풍요로운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 15:5)

    이 말씀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예수라는 분은 얼마나 깊은 사랑을 가진 분인가!’ 하고 무척 감동 받았습니다. 내게는 절대 잊히지 않는 성경 말씀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다시 읽으면, 내 기쁨의 원천이 이 문장이라고 주를 만나 말하고 싶어집니다. 이 요한복음 15장 말씀이, 제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주 예수의 사랑을 깊이 새겨놓았습니다. 감사를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손현섭 | 작성시간 21.09.11 참 귀한 말씀 감사뿐입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