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다와 욥바에서
(베드로의 두 가지 에피소드)
사도행전 9:31-43
스데반의 순교 이후 대박해(大迫害)와 바울의 회심(回心)이 있었다. 누가는 이 격동의 사건 뒤에 조용히 이 기사를 끼워 넣었다.
“교회는 유다, 갈릴리, 사마리아 전 지방에 걸쳐 평안을 누렸다(9:31).”
아마도 박해의 선두주자 바울의 좌절을 본 가해자들이 공격을 잠시 접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 교회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성장한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이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리까지, 요단강 서편을 따라 북상하는 모양새다. 이 상황을 묘사한 말 중에 우리가 더 눈여겨 볼 지점이 있다.
“기초가 튼튼해지고, 주를 경외하였고, 성령의 격려를 받아 앞으로 걸었다.”
이 세 가지 표현이 매우 재미있다.
기초가 튼튼해졌다는 건, ‘(하나님의 손으로) 건축되었다’는 뜻의 οικοδομουμενη이다. 이는 build up its strength라 번역되었다. 기초공사를 튼튼히 하는 작업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주를 경외하였고, 성령의 격려를 받으며 앞으로 걸었다고 마무리한다. 주는 당연히 그리스도이며, ‘경외한다’는 그를 경건하게 따르며 순종하는 태도를 말한다. 성령의 격려, παρακλησει(του αγιου πνευματος)는 위로와 도움, 훈계, 권유 등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그래서 이를 차례로 나란히 써 보면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이 세우신다.
- 주를 경외한다.
- 성령의 격려를 받아 나아간다.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이라는 삼위일체의 역할이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다.
이어서 누가는 교회들이 평안 가운데서 점점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오늘의 삽화 두 가지를 소개한다. 이제는 베드로가 주인공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에게 맡기고 베드로는 여러 곳을 다니며 신자들을 격려했다.
<첫째 이야기>
첫 방문지는 룻다이다. 이곳에도 이미 신자들이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베드로는 중풍으로 8년이나 누워있던 애니아라는 사람을 만난다. ‘애니아’는 그리스어 이름인데 아마도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아직 베드로는 유대인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애니아여,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낫게 하셨다. 일어나 걸으라.”
그가 바로 일어나 걸었다. 이는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복음서의 이야기(마 9:6)와 같다. 베드로는 이미 성전 문 앞에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한 적이 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그 제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룻다는 물론 가까이 샤론평원에 사는 사람들이 많이 주께로 돌아왔다는 매우 희망적인 첫 번째 에피소드이다.
<두 번째 이야기>
다음 무대는 좀 더 북쪽으로 옮겨가 항구도시 욥바에서 일어난 일이다. 거기 다비다라는 부인이 있었다. 이 이름은 아람어인데 그리스어로는 도르가라고 덧붙였다. 이 두 이름은 당시 유대나 헬라에서 흔한 여자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신자들 사이에서 많은 선행을 하고 베풀며 살았다. 활동적이며 사랑 가득한 부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옥상에 안치해두었다. 그런데 마침 베드로가 가까이 룻다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람들은 두 명의 심부름꾼을 보내 베드로를 청하였다.
“빨리 여기로 와 주십시오.”
원어를 직역하면, 머뭇거리지 말고 즉시 오시라는 말이다. 용건을 말하지 않고 그저 빨리 와달라는 요청이었다. 베드로는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한 채 주의 인도를 믿고 욥바로 건너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비다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생각하며 울고 있었다. 베드로는 놀라 당황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바로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그는 깨달았다. 사람들을 나가게 한 후,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그리고는 시신을 향해 말했다.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자, 이 이야기도 어디선지 읽은 것 같지 않은가? 예수께서 열두 살 소녀를 향해, “달리다 굼(소녀여, 일어나라.)” 하셨던 사건(막 5:41)과 판박이다. 다비다는 소녀처럼 살아 돌아왔다. 이 일로 수많은 사람이 신앙으로 인도되었다. 일이 마무리된 후 베드로는 가죽장인 시몬의 집에 머물렀다. 그는 거기서 욥바의 신자들을 격려하고,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누가가 이 두 가지 이야기를 여기에 끼워 넣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가 안정을 찾았고, 점점 그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사도 베드로의 두 가지 기적을 먼저 보여주었다.
두 번째는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백부장 고넬료가 있는 고장 가이사랴를 향하여 점점 다가가고 있음을 차근차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넬료의 회심은 교회사에서 그리스도교가 세계화되는 그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가야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예수의 제자 베드로를 통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은연중에 그림으로써 읽는 이들에게 주의 섭리를 깨닫게 한다.
누가는 사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을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그것도 이론적인 전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서 말한다. 주의 복음이 확산되고 있는 양상을 누가는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한 바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고 있음을 본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한 최초의 연설을 듣고, 3천 명의 신자가 새로 생겨났다(2:41). 이때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면서 동포에게 죄를 회개하라 촉구하였다.
이후 스데반은 산헤드린 법정에서 종교인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그 자신을 순교의 죽음으로 내던졌다.
스데반의 직설적인 최후진술이 유대인들을 분노로 몰아갔고, 이로 인해 교회는 사방으로 흩어지는 대박해가 일어났지만, 그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신자들에 의해 복음은 더욱 퍼져나갔다고 누가는 기록한 것이다. 대박해조차 복음 전진의 한 방법이었다고 말하는 누가의 의도를 알아차리기 바란다.
오늘의 장면은 두 가지 다 놀랄만한 사건이다. 그러나 담담하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병과 죽음의 극복이라는 사랑의 사건을 통해 사람들의 영혼이 주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사실 그리스도는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사람의 육체를 괴롭히는 병과 죽음에 대해서도 구원의 손을 펼치신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다음 이야기는 이방인을 향한 전도의 대서사시가 펼쳐지는 고넬료의 입신에 관한 스토리이다.
(이 사도행전은 다카하시사부로의 사도행전연구를 기초로 메나리가 공부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