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장, 12장, 13장 1-3절.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
김 복 례
1. 예루살렘교회
고넬료의 입신을 도운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유대인 신자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당신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 집에 가서 함께 음식까지 먹었다면서?”
베드로는 고넬료 사건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욥바에서 점심 식사를 기다리다 옥상에서 기도할 때 본 환상과 고넬료 역시 환상을 보고 사람을 보내었던 과정. 그들이 성령을 받았고 베드로는 세례를 베풀었다는 일들을 자세히 말하니, 유대인들은 비로소 의심을 풀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닌가?”
예루살렘 교회는 드디어 이방인 전도를 인정하기로 한다.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아 흩어졌으나 다시 신자들이 생겨나고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것 같다. 지방에 교회가 생기는 때이니 본부로서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이다.
스데반의 일로 생긴 박해 때문에 흩어진 신자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러스, 안디옥까지 가서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한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그리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교회가 형성된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누구일까?
키프러스와 구레네 사람들이라고 설명을 붙이고 있다. 키프러스 사람은 바나바(행 4:36), 구레네 사람은 루기오(행 13:1)로 추측한다. 이들이 용감하게 유대인 헬레니스트가 아닌 순수 이방인 그리스 사람들에게 전도를 한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파견한다. 이미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의 전도자인데 파견을 한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이 소문’을 들고 간 이가 바나바였고, 예루살렘교회가 이를 받아들여 정식으로 전도자로 인정하였다는 것으로 추측한다.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의 동역자로 사울을 부른다. 그들은 1년 동안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예루살렘교회는 새로 생기는 교회들을 관리하였고 지방의 신생교회는 예루살렘교회와 소통하고 있었다. 이때 벌써 장로라는 직책도 등장한다.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자 안디옥 교회가 헌금을 모아 자신들의 전도자인 바나바와 사울 편으로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에게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예루살렘교회가 힘을 얻기 시작하자, 다시 박해가 시작된다. 사도 야고보를 잡아 칼로 죽였다. 유대인들이 그 일을 기뻐하자 헤롯은 베드로도 잡아 옥에 가두었다. 교회는 그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밤에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를 깨워 감옥 밖으로 데리고 나온다. 그는 신자들이 기도하고 있는 마가의 다락방으로 찾아온다. 문을 두드리자 로데라는 어린 여종이 나왔다. 로데는 베드로의 음성을 알아듣고 기뻐서 미처 문도 열지 못하고 달려들어가 베드로가 왔다고 외쳤다.
그들의 반응은 “네가 미쳤구나.”였다.
그들은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다. 살아 돌아오기를 기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이 한 기도를 믿지 않았다. 기도하면서도 그 일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입으로 기도는 하지만, ‘내가 지금 입으로 말하는 게 다 이뤄지겠나?’ 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우치무라는 기도의 무게를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하늘의 우리 아버지는 자녀의 기도를 이뤄주시는 분이다. 응답받지 못하는 오늘의 기도는 어쩌면 내세에 몇 배로 이뤄지는 게 틀림없다. 영원의 시간을 가지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서두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어떤 기도는 이번 생에서, 어떤 기도는 불후의 내세에서 들어주실 게 틀림없다.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예수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라. 무슨 일이든지, 무슨 일이든지! 믿음으로 그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는 듣지 않으시는 게 없다.”
2. 안디옥교회
안디옥교회 하면 ‘그리스도인’이라 최초로 불렸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자랑스러워 한다. 다카하시 사부로 선생이 이에 대해 분석한 글을 읽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안디옥.
그 시대 안티오크는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3대 도시로서 교통의 요지였고, 무역과 상업이 매우 발달하였다. 또한 대도시가 그렇듯 극심한 퇴폐적 문화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곳이 헬라인 신자들의 모임, 새로운 전도의 거점이 되었다. 이 교회의 지도자들의 이름이 13장 1절에 나열되어 있다.
바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갈릴리 지방의 통치자인 헤롯과 함께 자란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다.
니게르는 흑인을 뜻한다. 구레네도 아프리카 북부지방이니 시므온과 루기오는 아프리카 사람이다. 게다가 마나엔은 로마의 귀족 헤롯과 함께 양육된 사람으로 요세푸스의 역사서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안디옥교회의 지도자가 이렇게 다양한 구성이었으니, 그 신자들이 어떠했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들을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다. 다카하시 선생의 사도행전 강의에 나온 해석을 인용한다.
처음에는 조롱하려는 의도를 담아 ‘그리스도의 자식들?’ 정도의 나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리스도 신자들은 아직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인식되었고, 전도의 대상도 유대인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 전도의 대상이 이방세계로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그 신앙생활의 모습이 이미 유대교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 외부인의 눈에도 확실히 구분될 정도로 보였다.
이는 복음 전도의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이고 중대한 사건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유대교는 로마제국 공인의 종교로서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지금의 그리스도 신자는 그 범위 밖에 있는 존재로서 특혜는커녕, 황제숭배마저 거부하였으니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복음의 힘 있는 전진은 동시에 점점 격렬해지는 싸움을 앞에 두고 있었다.(高橋三郞, 사도행전 연구)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였던 그 동안의 이해를 뒤집는 해석이었다. 물론 그들의 믿음이 돈독했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외부인에게 각인시킬 만큼 힘 있는 전도를 했었다는 것과 유대교와는 다른 독립적인 종교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는 긍정적 측면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이스라엘의 유대교가 아니라 신생 종교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알려짐으로써 외부인, 특히 로마제국의 당국자들에게 위협적인 집단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무게감이 더 크게 느껴져 왔다.
3. 소감
1) 기도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사람들이 베드로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로데를 나무라는 모습에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은 나에게도 비일비재했지 않았나 생각했다.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한마디의 기도도 신중하게 마음을 기울여 해야 한다는,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2) 그리스도인
다카하시 선생의 글을 읽다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 왔는가?’ 자신에게 묻게 되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조용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담대히 표현하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자신의 신앙생활에만 충실한 사람도 있는 건 당연하다. 신앙생활의 모습도 개인차가 있게 마련이니 말이다. 그러나 주의 복음은 용감하게 증거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전진한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요즘은 좀 더 용기있게 외쳤으면 좋았을 걸 하고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하늘나라에서 이 용감한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지내게 되면 참 부끄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