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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신앙 고집

작성자메나리|작성시간23.08.20|조회수59 목록 댓글 1

바나바와의 결렬에서 본 

바울의 신앙고집

(15:36-41)

 

1. 본문 내용 요약

예루살렘 회의가 끝나고 나서 얼마 후
바울이 바나바에게 2차 전도 여행을 제안
일행을 꾸리기 시작
    - 바나바는 마가라는 요한을 데려가려고 함.
    - 바울은 1차 여행에서 중도에 예루살렘으로 떠나버린 마가를 신뢰하지 않음.
바울과 바나바 심한 말다툼
서로 갈라짐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배를 타고 키프러스로 향함.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시리아와 길리기아로 향함.

 

2. 2차 전도 여행의 제안

  이방인 신자에게 할례는 불필요하다는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은 안디옥 교회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외부에 대한 전도 활동에 대한 의욕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이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을 한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모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다시 방문합시다.”

   이 제안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이전 전도 여행은 교회의 파견에 의한 선교 활동이었다. 이번에는 바울이 적극적으로 전도 여행을 바나바에게 제안하고 있다. 즉 바울의 입지가 독립 전도자로서 활동을 할 수 있을 만큼 커졌다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바나바는 당연히 동의했다. 그러나 누구를 데리고 갈 것인지에 대해 두 사람 사이에 의견이 갈리면서 크게 다투게 된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길로 전도여행을 떠나고 만다.

 

3. 바울과 바나바의 의견 충돌

  크게 다툰 사연의 원인이 된 사람은 바로 마가 요한이다. 이 사람의 행적은 1313절에 나와 있다.

  “바울과 그 일행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의 버가로 건너갔다. 거기서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 사람이다. 그의 집은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많은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던 집이었다.(12:12) 흔히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불리는 곳이며, 오순절 성령이 임했던 곳도 그 집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 바울과 바나바가 여러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이 사람이 그들의 일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그가 예루살렘으로 간 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말이다. 바울은 자기들을 버리고 함께 전도하러 가지 않은 마가 요한을 신뢰할 수 없었다.

 

  마가 요한이 바울 일행을 떠난 이유는 적혀 있지 않으므로 분명하지 않다. 집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뭔가 석연치 않은 일을 겪었던 것 같다. 마가 요한의 중도 이탈로 인해 바울 일행이 매우 큰 타격을 받은 건 분명하다. 게다가 바울은 엄격한 성격이었고, 바나바는 관대했었던 것 같다. 마가의 예루살렘행에 대한 판단의 차이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자기 자신의 개인적 이해에 관한 일이라면 관용이 미덕이다. 그러나 공적인 문제, 특히 생명을 살리는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는 옳고 그름(善悪邪正)이 분명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바울이 바나바보다 훨씬 더 제대로 판단했다고 보는 게 옳다.(http://kurosaki-commentary.com/kurosaki 사도행전 15:36-41.)

 

  그러면 바울과 함께 간 실라는 어떤 인물인가? 이름이 히브리어이므로 그는 아마도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실바누스라는 라틴어 이름이기도 하고, 고린도후서에서는 실루아노라 하여 헬라식 이름을 쓰고 있다. 그는 헬라어를 잘하는 헬레니스트 신자였다고 본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몇 사람의 대표를 안디옥교회에 보내기로 했을 때 바사바라는 유다와 함께 뽑힌 사람이 바로 실라였다. 실라는 안디옥교회에서 많은 말로 신자들을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 주었다고 32절에도 나와 있다. 즉 예루살렘에서 파견한 전도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를 예언자라고 설명한다.

  이 실라는 2차 전도 여행을 같이하면서 빌립보에서 함께 투옥되어 고난을 겪는다. 이후에도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거쳐 고린도에 함께 이르는 동안 말로 할 수 없는 수모와 박해를 바울과 함께 겪을 뿐 아니라 데살로니가서의 공동 발신인으로 그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이것으로 보아 실라와 바울이 얼마나 신앙으로 하나가 되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119절이 이를 더욱 뒷받침한다.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여러분에게 전파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했다고 아니오하지 않고 언제나 라는 신실한 응답을 하십니다.”

라고 하여 실루아노를 자신의 동역자로서 크게 신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실라는 185, 그가 고린도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말을 끝으로 자취를 감춘다. 그런데 다행히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써 보낸 편지에서 그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여기는 실루아노(실라)를 통해, 나는 간단한 편지를 써서 여러분을 격려하고,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합니다.”

 

실루아노가 이번에는 베드로의 조력자로서 로마에 따라간 것이다. 베드로는 그를 충실한 형제라 부르고 있다. 깊은 신뢰를 보여주는 말이며, 베드로전서가 이 실라의 손으로 써졌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한편 바울이 거부했던 마가 요한도 나중에 다시 바울을 돕게 된다. 빌레몬서 23절에 함께 일하는 마가도 그대에게 문안합니다.’라고 동역자로서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더구나 맨 먼저 언급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일이다. 또 디모데후서에서도 디모데에게 자기에게로 마가를 데려오라고 부탁한다.

그대는 올 때 마가를 데려오시오.

그는 내가 하는 일에 유익한 사람입니다.”

한때는 의견이 갈려 헤어졌으나, 나중에 그 교제가 회복되어 주 안의 동역자로서 한 멍에를 메고 가는 모습을 성서 속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어 흐뭇하다.

 

  오늘의 사태는 이렇게 훈훈한 결과로 끝이 나지만, 바울은 주의 은혜에 의지하여실라만을 데리고 고독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바나바가 마가와 함께 해로를 통해 키프러스로 향한 것과 달리, 바울은 육로를 택하여 2차 전도 여행을 시작한다. 길리기아 협문을 통해 서쪽 유럽을 향해 나아갔는데, 누가는 이 여행을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거쳐가면서 여러 교회를 격려하였다라고 썼다.

  ‘여러 교회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 지방에는 이미 그리스도교회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전제한다. 바울이 앞에서 바나바에게 제안할 때, ‘우리가 전도했던 각 지방의 형제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방문해보자라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추측이다.

 

  그러나 이 전도 여행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어 의외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전도 여행을 그리스도 자신이 인도하여 감을 16장부터 보게 될 것이다.

 

4. 바울의 신앙 고집

  오늘의 이 사건에서 우리는 바울의 강한 성격을 보게 된다. 갈라디아서에서 베드로와 부딪쳤던 일을 연상하게 된다그 사건은 안디옥에서 이방인 신도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식사하고 있었던 베드로.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나타나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자리를 떠났던 사건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바나바도 있었다! 이 바나바마저 그들의 위선에 부화뇌동하여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서신이다. 바울이 바나바에 대해서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유혹을 받았다고 썼다. 베드로와 바나바가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고 회개했다는 기사가 없는 것을 보면, 바울과 그들이 그 일에 대해 훈훈한 결말을 보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바나바와의 결렬은 그 사건의 여파가 아니었냐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高橋三郎, 사도행전 강의, 교문관(1987), pp.246-247.)

 

  바나바는 바울에게 있어 인도자 역할을 한 사람이다. 고향 다소에 있었던 바울을 이끌어내어 안디옥 교회에서 전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다. 또 전도 여행을 하면서 죽음의 위협을 함께 극복해온 복음 전도의 동역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복음 진리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니 곧이곧대로 그들의 위선에 유혹을 받았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사건도, 바나바와의 결렬 사건도 바울의 복음 진리에 대한 태도를 볼 수 있는 사건이 아닌가 한다. 사실 행동을 함께 하던 사람들이 갈라서는 건 사람의 정으로는 쓰라린 일이다. 더구나 자신을 도와주었던 분과의 다툼이라는 점에서 더욱 유감이다. 또 바울이 거부한 마가라는 청년의 어머니는 사도들에게까지 잘 알려진 사람이 아닌가? 마가의 배경이 든든했다는 이야기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바울이 공과 사에 대해 얼마나 엄격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중요시하여 쉽사리 이렇게 엄격한 태도를 취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후 바울의 전도가 빛을 발하고, 바나바의 이야기가 사라지는 걸 보면, 복음에 대한 바울의 분명한 고집이 옳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초대교회에서도 할례 문제, 전도방법에 관한 문제, 구제에 관한 문제 등등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예루살렘 회의 결과에서도 보듯이 적당한 선에서 해결을 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바울은 옳지 않은 것에 대해 단호함과 엄격함의 태도로 일관하여 유지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 모든 해결책이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이글은 8월 20일 부산 가정집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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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손현섭 | 작성시간 23.08.20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 기독교의 진수를 확실히 해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연구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합니다.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 성경을 연구하고 듣고 읽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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