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 2023년 11월 6일 14:30~17:00
* 장소 : 이마이칸 성서강당
희망과 화해
-우치무라 간조의 재림신앙과 생명수의 강-
고바야시 다카요시(小林孝吉)
# 성서 말씀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있으면, 그 사람은 새로 창조된 자이다. 옛것은 지나갔다. 보라 모두가 새롭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과 화해하게 했고, 또 화해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도록 하셨으니, 죄와 과오의 책임을 묻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복음을 맡겨주셨다. (고후 17:19, 1955년 구어역)
#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약속으로서의 기독교’
성서는 약속의 책이다. 따라서 구약이라 하고 신약이라 한다. 구약은 그리스도 강림의 약속이었다. 그리고 신약은 그리스도 재림의 약속이다. 구약은 나사렛 예수의 출생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이고, 신약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예루살렘의 실현과 만물의 부활이기 때문이다.(聖書之硏究 188호, 1916.3. 內村全集 12권 210쪽)
1. 기억의 배 이야기에서-전쟁의 가해 기억과 피해 기억이 만날 때
세계를 흔들었던 코로나 팬데믹이 진정되어가는 시기에 ‘일한청년우화회’의 교류로 한국에서 한만하 선생을 비롯하여 열 한 명의 주 안의 반가운 신앙의 동료를 일본에서 뵙고, 여러분께 우치무라 간조 선생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재림신앙’에 대해, 제가 오늘 여기서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으니 기쁨과 함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지금까지 문학을 통해 전쟁의 가해 기억과 화해의 문제에 대해 집중해서 추적해왔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까지, ‘한일 동아시아 문학 심포지엄’을 일본측 대표로 서울과 도쿄, 연변에서 개최하였습니다. 문학 심포지엄은 주로 동아시아 상황, 문학작품 속에 포함된 일본에 의한 침략전쟁의 기억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그것은 가해와 피해, 식민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두 가지의 상반된 기억이 서로 다시 만나고, 화해하는 장소, 혹은 나라, 국민, 사람의 가해와 피해에의 기억을 태운 배가 아시아 역사의 바다를 왕래하며 새롭게 화해함과 동시에 만남을 계속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품고 해온 일이었습니다.
그 전제로, 1910년부터 35년간이라는 한 인간 생애의 반에 해당할 만큼 긴 식민지지배와 전쟁에 의한 가해의 역사에 상처받은 한국인들에게 깊은 사죄 없이는, 그 화해의 길과 화해의 바다는 미래로 연결되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다시 그런 전쟁의 기억을 돌아보는 역사확인의 장소에서, 역사 속에서 고통을 당했던 분들에게 사죄의 마음을 안고, 저의 작은 신앙과 함께 이 자리에 서고 싶었습니다. 또 올해는 일본에서 살던 많은 무고한 한국인의 생명을 일본인이 집단 학살했던 관동대지진으로부터 100년 되는 큰 역사적 사건을 마주하는 해입니다. 이 역사 속 어두운 사실도 일본과 일본인의 가해의 역사이기 때문에 저희 일본인은 사죄와 함께 기억에 새겨야만 합니다.
저는 동아시아 문학 심포지엄의 교류를 마무리한 지 10년 정도 지났을 때, 50대 후반의 나이에, 인생의 회의 속에서 우치무라 간조 선생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특히 재림신앙을 만났습니다. 일본에서 ‘3・11’이라 부르는 동일본대지진과 인류 사상 최악의 원전폭발사고의 다음해였습니다. 쓰나미로 2만 명 가까웠던 사망자는 일순간에 바다로 휩쓸려 사랑하는 사람, 가족, 친구와 이별을 해야만 했습니다.
두 달 후, 후쿠시마의 이시노마키(石卷) 오나카와(女川)를 방문하여 무너진 주택과 건물, 거리, 폐허가 된 땅을 눈앞에서 보니 멍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난으로 돌아가신 분들과 재회의 소망은 이뤄질까, 그리고 후쿠시마에 재림 예수는 오시지 않는 걸까, 나에게는 그런 종말적인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때 우치무라 선생의 복음의 말씀, 무교회 신앙 즉 재림신앙은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었고, 나는 문예비평에서 우치무라 간조 연구로 진로를 바꾸었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희망과 화해의 길-생명수의 강
저는 결국 희망과 화해로 가는 진정한 길은 재림신앙과 함께 그리스도인이 향해야 할 희망의 길이며 맡아야 할 책무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에 의한 화해입니다.
우치무라 선생은 1912년 1월 12일, 사랑하는 딸 룻의 꽃다운 나이의 죽음으로 절망 가운데서 성서의 깊은 비밀, 구약 창세기부터 신약 요한계시록까지 관통하여 흐르는 생명수의 강으로서의 재림신앙을 결정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딸 룻의 묘비에는 재림신앙을 나타내듯, ‘다시 만날 때까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세계 제1차대전의 와중에 우치무라 선생은 ‘하나님의 약속으로서의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성서는 약속의 책이다. 따라서 구약이라 하고 신약이라 한다. 구약을 그리스도 강림의 약속이었다. 그리고 신약은 그리스도 재림의 약속이다. 구약은 나사렛 예수의 출생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이고, 신약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예루살렘의 실현과 만물의 부활이기 때문이다.(聖書之硏究 188호, 1916.3. 內村全集 12권 210쪽)”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 발원한 ‘생명수의 강’의 근원이 되는, 이름이 나오지 않은 하나의 강은 네 개의 지류와 함께 신구약성서 66권을 지하수맥처럼 흘러, 요한계시록 최후에 등장하는 도시의 중앙에 ‘생명수의 강’이 되어 새로운 풍경 낙원으로 흘러갔던 것입니다. 그 희망의 수맥은 우주 완성까지 이어지는 재림신앙이라는 생명수의 강이 아니겠습니까?
우치무라 선생은 그 마르지 않는 생명수의 강 앞에서, 복음의 물소리를 들으며, 신구약 성서가 약속의 책이며, 특별히 구약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신약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만물의 부활과 우주 완성의 약속이라고 확실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기독교국 미국도 참전했던 세계대전 중에 만인・만물의 구원과 세계 인류의 평화는 그리스도 재림에 의해서만 실현된다는 사실, 그것이 만년의 우치무라 선생이 도달한 그리스도교 신앙이었고, 그리스도교 사상의 생명이 되는 재림신앙입니다. 그 ‘큰 날’과 ‘재림의 예수’는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실현하는 길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 그것이 비전론자요 전쟁절대폐지론자 우치무라 간조 선생이 가진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치무라 선생에게 있어, 삿포로 농학교에서의 기독교와의 만남이 제1의 회심이라면, 미국 암허스트 대학에서의 속죄는 제2의 회심, 최후 재림신앙은 결정적 제3의 회심이었습니다. 이 제3의 회심으로 성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생명이 통하는, 일관된 약속의 책이 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일맥상통한 것입니다. 최초의 낙원을 적시던 강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최후의 계시록까지 흐르는 하나의 생명수의 강이 되었습니다.
타작마당에 곡식이 차고, 독에는 새 포도주의 기름이 넘치는(요엘 2:24), 그런 큰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전쟁 폐지에 관한 성서의 명시(聖書之硏究 204호, 1917.7.)’라는 글에, 재림에 대해서 우치무라 선생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막연한 미신처럼 생각되는 면이 있지만, 재림이 없다면 인류의 소망은 모두 물거품이 된다.”
우치무라 선생에게 재림은 인류의 희망이며, 비전론 우주의 완성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망과 화해의 길, 그것은 재림신앙과 함께 있습니다.
3. 화해의 복음과 화해의 책무-화해의 바다에
성서 안에서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은 다메섹 길 위에서 그리스도 현현의 빛에 의해 극적인 회심을 합니다. 이후 수많은 박해와 환란 속에서 여러 번 죽음에 직면하는 위기를 겪었고, 홀로 전도자로서 교회들과의 마찰로 고민하기도 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하였습니다. 전도자 바울은 서로 대립하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 한 줄을 편지에 남겼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의 때이다.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다. (고후 6:2)”
같은 편지에서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면서 화해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있으면, 그 사람은 새로 창조된 자이다. 옛것은 지나갔다. 보라, 모두가 새롭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과 화해하게 했고, 또 화해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도록 하셨으니, 우리에게 죄와 과오의 책임을 묻지 않으시고, 화해의 복음을 맡겨주셨다. (고후 17:19, 1955년 구어역)”
그리스도에 의한 사람과 세상과 세계 화해의 복음, 그것을 마음을 다해 받는다면, 지금은 은혜의 때, 구원의 날이 됩니다. 그날 그때부터 옛것은 사라지고 누구나 새로운 사람으로서 소망을 품고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해 역사의 기억을 잊지 않고, 늘 거듭하여 사죄의 마음을 가지는 화해의 길이 되지 않을까요? 그래야 비로소 가해의 기억과 피해의 기억은 다시 만나 아시아의 기억의 바다를 왕래하며, 한 사람 한 사람 각각의 상처에 관한 기억을 태우고, 배는 화해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치학자이며 시인이신 이정화 씨는 피해와 가해의 기억, 이 둘의 기억이 만나는 장소의 존재를 읊조리듯이 자신의 사상으로 기록한 ‘중얼거림의 정치사상(靑士社, 1998)’에서 글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배에 귀를 기울인다.
들려오는 세찬 소리.
이 작은 배는
바다에 결국 어찌어찌 닿게 되려나?
이 중얼거림은 조용한 기도의 말처럼 들려옵니다. 그곳, 화해의 바다는, 사회나 정치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에 의해, 하나님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는 소망을 품고 향하는 화해의 장소, 그곳을 향해 가는 신앙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의 무교회 신앙의 소망을 담은 배는 새로운 화해의 바다에서 역사를 뛰어넘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죽음도, 슬픔도, 절규도, 고통도 없다고 기록한 대로, 또 바울이 ‘옛것은 사라졌다, 보라 모두 새로워졌다.’고 고린도 신자에게 말씀한 대로 새로이 나타날 낙원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일본문학과 전후(戰後) 사상을 대표하는 노벨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 健三郞) 문학의 가장 유명한 작품에 ‘타오르는 푸른 나무’ 3부작이 있습니다. 3부 ‘위대한 날에’의 마지막은 ‘타오르는 푸른 나무’ 교회의 회원들이 함께 노래하는 기도문으로 끝을 맺습니다. “Rejoice!”라고.
그 기도가 바로 고린도후서 13장 11절, “마지막으로, 형제들이여.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완전한 자가 되십시오. 서로 도우십시오. 한마음을 품으십시오. 화평케 하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해 주실 겁니다.” 하고 울려 퍼졌습니다.
우치무라 간조 선생은 신앙의 생애를 걸고 30년간 발행한 ‘聖書之硏究’의 창간 선언(1900.9.)에서 요한계시록 22장의 새로운 도시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성서를 보면, 생명수 강이 있다. 그 물은 수정같이 맑고, 하나님의 어린 양 보좌에서 흘러나온다. 강의 양편에는 생명나무가 있는데, 그 잎은 만국의 백성을 치료한다. 나는 천상천하 이 복음을 제외하고 국민을 치료하는 다른 무엇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 책을 오늘 세상에 내놓는다. (內村鑑三全集 8권 282쪽)”
이 장면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을 발원지로 한 생명수 강이 흐르고, 그 물은 수정처럼 맑았다. 양쪽 강가에는 생명나무가 무성하고 해마다 열두 가지 열매를 맺고, 그 잎은 모든 사람을 치료합니다. 사람들을 구원함과 동시에 인류와 역사를 치료하는 생명수의 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편지(고린도후서)처럼 우리가 있는 곳에서 화해의 복음과 화해의 책무를 이뤄가야 하고, 가해와 피해라는 전쟁의 기억이 만나는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인 지금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4. ‘후세에의 최대 유물’로부터 130년
우치무라 간조 선생의 저명한 강연, ‘후세에의 최대 유물’이 있은 지, 내년이면 130년이 됩니다. 1894년 7월 16일과 17일 이틀간 하코네의 아시노(芦ノ) 호반에서 행한 기독교청년회 제6회 하기학교 강연이었습니다. 우치무라 선생은 당시 33세였고, 불경사건 3년 후였는데, 그 한 해 전에 ‘기독신도의 위로’, ‘구안록’을 출판하였습니다. 게다가 극도로 가난한 교토시대였는데, 청년들을 위해 강단에 섰던 것입니다.
일본 최초의 근대전쟁이었던 청일전쟁을 앞에 두고, 우치무라 선생은 젊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아름다운 지구와 사회에, 우리를 길러준 산과 강에,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청년들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우치무라 선생은 후세에 남는 유물을 Momento라 부르며 사회를 위해 첫째는 돈을, 둘째는 사업을, 그리고 이 둘이 안 되는 사람은 세 번째, 사상을 글로 써서 남기라 하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돈도 사업도 사상도 남기지 못하는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으로 무의미하게 세상을 떠나야 하는 걸까? 이 세상에 태어난 누구라도 남길 수 있는 ‘후세를 위한 최대 유물’은 무엇인가? 선생은 그것을 한 인간의 ‘용감하고 고상한 생애’라고 말합니다.
“고상하고 용감한 생애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여기서 말할 필요도 없다. 제군 모두 다 이미 알고 있는 생애이다. 즉 이 세상은 절대로 악마가 지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세상이라고 믿는 일이다. 실망이 아니라 소망의 세상이라 믿는 일이다. 슬픔이 아닌 기쁨의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 삶에서 실천하여 그 생애를 세상에 선물로 남기는 것이다. 이 유물은 누구나 가능한 유물이 아닐까 생각한다.”(內村鑑三全集 4권 281쪽)
이 세상에, 아름다운 지구에, 사회에, 산과 강과 자연의 우주에, 큰 강물 속 한 방울의 물처럼 한 생명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한 인간은 누구나 남길 수 있는 ‘후세에의 최대 유물’인 것입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 기후위기, 빈곤과 팬데믹, 분쟁과 분단 등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전후 78년이 되는 오늘, 소중한 평화헌법을 흔들고, 가해의 기억이 희미해져 가고 있는 일본. ‘후세에의 최대 유물’ 강연은 1세기 이상의 시간을 넘어, 미래로 영원히 계속되어야 하는 희망의 수맥입니다. 가해와 피해가 화해로 나아가는 희망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보증하는 분은 영원한 오늘을 가져올 재림의 예수가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재림의 예수는 미래사회의 영원히 살아있는 희망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현재적인 재림이며, 새로운 땅과 사람을 풍요롭게 하는 영원한 생명수의 강입니다.
5. 재림신앙과 함께-기다리며, 기도하며
바울은 고린도전서 마지막 16장 22절에서 아람어로 마라나타(우리 주시여, 어서 오십시오)라고 기도의 말을 하였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최후에서 예언자 요한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분명히 나는 바로 오리라.” 아멘, 주여 오시옵소서.(계 22:20)
신구약성서는 다음과 같은 한 줄의 기도로 끝을 맺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계22:21)”
우리는 오고 계시는 예수를 기다리며 기도하며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치무라 간조 선생의 재림신앙의 소망과 미래가,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재회와 우주 완성의 위대한 날의 약속과 은혜가 있습니다. 소망과 화해는 그리스도 재림의 신앙, 분명히 오실 예수와 함께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신자는 아니었지만, 1927년 한국의 대구에서 태어나 경주와 김천 등에서 자란 식민 2세(식민지에서 태어난 일본인)의 시인 모리사키 카즈에(森崎和江) 씨의 시, ‘여행 가는 곳’을 낭독해드리겠습니다.
태어난 곳, 거기가 고향이라
나는 말할 수 없지만,
거기는 당신의 고향
태어난 곳, 거기가 고향이라
나는 말할 수 없지만,
거기는 당신의 영혼
태어난 곳, 거기가 고향
그렇게 말하며 사람들은 살아간다.
하늘을 우러르는 초목들처럼.
여기는 땅 바닥.
(‘풀피리 하나’ 78-79쪽)
대구, 경주, 김천, 산하, 초목, 바람.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소중한 ‘당신의 고향’이고 ‘영혼’입니다. 이 시에는 식민 2세의 죄와 감사, 그리고 화해의 울림이 역사를 넘어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화해의 바다는 그리스도와 소망과 함께 여기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오신 신앙의 친구를 맞아 하게 되었던 저의 작은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언제나 저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오늘 이렇게 일한청년우화회의 교류로 한국에서 주 안의 형제들을 맞이하고, 이렇게 강의하는 시간까지 가지게 되어 당신께 형언할 수 없는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세계는 전쟁과 팬데믹, 인류세라 부르는 기후・환경위기 등 많은 묵시적인 풍경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평화와 평안이 매우 절실한 지금입니다.
한국성서신우회의 한만하 회장은 ‘작은 평화를 위한 우리의 교류’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이 작은 한일간 교류가 평화를 위한 것임을 언제나 잊지 않아야 합니다.”
평화를 위한 교류, 그러려면 희망과 화해의 마음, 전쟁 가해를 기억하고 사죄하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하는 역사 인식이 필요합니다.
가해와 피해, 두 가지 기억의 배가 새로운 화해의 바다에서 다시 만나는 날,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세계의 평화가 이루어지리라 기도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화해의 장에서 사랑과 소망으로 함께 손을 잡고 살아가는 기쁨을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친구들과 주 안에서의 교류가 평화를 위해 계속되어 가기를 바랍니다. 저의 부족한 기도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