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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이의 엽서편지 - 사노라면(2)

작성자메나리|작성시간24.01.13|조회수52 목록 댓글 1

반나이의 엽서편지

사노라면(2)

-쇼난편지 231호(2024년 1월)

 

반나이 무네오(坂內宗男)

 

  나는 노보리토 학료를 나오는 날, 야나이하라 선생이 '가신(嘉信)' 39호(1941년 3월)의 권두문에 쓰셨던 글을 그의 제자이신 니시무라 선생을 통해 들었다. 그 말씀을 품고 세상으로 나온 것이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다고 추억한다. 앞으로 이 작은 엽서편지에 나의 살아온 이야기를 써보고자 한다.

 

  대학을 졸업하자 취직을 해야 했다. 당시 폐결핵은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당연히 취업할 수도 없었다. 나도 이 폐결핵을 앓았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스트렙토마이신이 미국 주둔군의 엄격한 관리를 벗어나 나라에서 건강보험 적용으로 일반화 되면서부터 입원하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폐결핵에 걸렸더라도 완쾌되었다고 진단을 받으면 아무런 제약 없이 취업의 문을 두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아무리 필기시험에 합격해도 폐결핵 병력이 있으면 채용해주지 않았다.

   나도 교육관련 기관(교육청이나 고등학교 교사)으로 나가고 싶어 시험에 응시했지만, 폐결핵 이력을 물으며 면접에서 늘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 행정공무원 시험으로 방향을 돌려 1962년 4월부터 도쿄의 조후시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시장 앞에서 헌법 준수의 서약을 하고 수도관련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희망부서를 복지관련이라 기록했던 것 때문에 어느날 인사과장이 나를 불러 희망부서를 확인하였다. 나는  다음해 4월 복지사무소로 옮겨갔다.  거기서 10년간 생활보호를 중심으로 하는 업무를 맡아 사회복지사로서 일한 것이다. 특히 재일 조선인 이주지역을 담당하여 자이니치들이 겪고 있는 차별의 실체를 알고 충격을 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연행되어 일본에서 육체노동으로 고통받았던 조선인과 그 가족이었는데 대부분 생활보호 수급으로 어렵게 살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자이니치 출신 목사, 일본인 목사, 조선근현대사 연구자, 일본인 여성과 나까지 다섯 명이 조후 물레회를 조직하여, 인권과 평등을 위해, 차별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40년간 계속하게된 '인권투쟁의 인생' 시작이었다.(다음 엽서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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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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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독립신앙 | 작성시간 24.01.14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비록 일본 무교회 가족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자이니치 한국 동포들을 위해 애쓰시는 반나이 선생님 모습에 감동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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