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운 선생과 최병인 선생을 그리워하며
2024.4.7. 두 분의 추모회에서 하신 말씀
김 성 기
1. 박찬운 선생
▶최병인 선생이 박찬운 선생을 보내면서 ‘고별문’(일부)
그는 입학시험이든 채용시험이든 실패한 일이 없습니다. 국제신사라는 공군 갑종장교(현 학사장교) 필기시험에 저희 대학 출신으로서는 1차에 합격한 두 사람 중 하나였고, 재직 시에는 공군사관학교 교수도 역임했습니다. 형은 노평구 선생님 주례로 공군재직 시, 대전에서 결혼했습니다. 공군 소위로 국방의 의무를 마쳤습니다.
4・19 때엔 가마니로 현수막을 만들어 들고 데모행렬에 참여했고, 퇴직 후엔 제주도 서귀포 강정마을, 민・군 복합 항만건설 반대 데모가 판치자 3면이 바다인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할 큰 항구 건설은 당연하다며 이에 맞서려고 비행기로 날아가 동참하는 열혈애국자였습니다.
또 세상이 혼탁하다고 ‘나까지 오염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시념으로 살았습니다. 유력한 분에게 인사 청탁 한 번 한 일이 없습니다.
▶김영웅 선생이 박찬운 선생 영전에 드리는 글
<소이부답 笑而不答>
그의 성품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올곧은 충성심’이라 하겠다. 누가 가르쳐서라기 보다는 천품이라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왜냐면 그는 5・6세 철모르는 어린 시절, 취학 연령이 되었는데, “일본 놈이 가르치는 학교에는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대전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당시 한국의 중산층 가정이었으므로 특별히 반일 감정이 있는 가정 분위기도 아니요, 형제들 모두 학교에 다녔는데 이제 취학연령이 된 어린 아이가 고집을 부리니 “별난 녀석이구나!” 하고 어처구니없어 하셨지만, 어른들도 어찌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동네의 도래 친구들이 학교를 다니는데, 그는 취학 연령이 2년이나 지나도록 집에서 놀다가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은 뒤에 입학을 하였으니, 줄곧 또래들 보다 두 살 정도 늦게 학교를 다녔다.
필자와 만난 것은 대학에서인데, 나와는 3년 후배로 내가 4학년때 그는 1학년이었다. 우리는 유희세 교수님의 지도로 매주 예배를 보게 되어 그와 친숙해졌다.
(중략)
대학 졸업 후 군복무는 서울 대방동에 있던 공군사관학교에서 사관생도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그는 일요일이면, 서울 종로2가 YMCA 노평구 선생의 일요집회에 출석했으며, ᅟᅮᆼ실한 그의 성품은 노평구 선생의 손발이 되어 심부름을 하고 봉사했다.
그 무렵 나의 결혼식이 노평구 선생님의 주례로 나의 근무지였던 전북 익산시에서 있었는데, 가난하던 시절이라 연미복 한 벌로 무교회 여러 선생님들이 행사가 있을 때마다 돌려가며 입었다. 그래서 홍성에 있었던 연미복을 가져다가 노평구 선생님께 전달하는 일을 충실한 일꾼, 박찬운 군이 맡았다. 그리고 군대 생활의 곤고함 중에도 결혼 후 익산까지, 나의 신혼살림집을 찾아줬던, 내게는 둘도 없는 고마운 친구였다.
그런 그의 올곧은 성품은 직장생활에서도 나타났다.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는데, 요즘 ‘학생인권조례’의 시행으로 학생들의 인권은 신장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반면에 수업태도가 엉망인데도 강력한 지도를 펼칠 수 없게 되어 교권침해 사건이 발생해도 대책이 없었다. 박찬운 선생을 그것을 참지 못하고, 정년을 채우기 전에 명예퇴직으로 학교를 떠나고 말았다.
그후 일심재단에서 이사직을 잠시 맡아 보셨는데, 그것은 ‘아니면 아닌’ 그의 올곧은 원칙주의 성품을 잘 아는 벗들이 재단운영을 바르게 하도록 지켜줄 것을 기대하고 추천했던 것이다.
(중략)
그의 충성심을 드러낸 또 다른 에피소드로, 우리의 동료 J형이 뇌졸중으로 대전 요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박찬운 선생은 췌장암 진단을 받고, 이미 병세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진행되어 수술을 포기하고 치병 중에 있으면서도 대전까지 문병을 간 것이다. 대전의 J형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그냥 건강한 친구가 다녀갔나 보다 생각하고 있다가, 얼마 후에 별세 소식을 듣고 놀랐을 것이다.
그는 문병을 다녀온 뒤, 나에게 전화로 ‘대전에 볼 일이 있어 내려갔기에 J형을 찾아갔는데 그쪽 스케줄이 있어서 대화는 못하고 얼굴만 보고 왔다’고 했다. 대화할 시간이 넉넉했다 한들 자기 병세에 관하여 무슨 말을 하였겠는가. 역시 웃기만 할 수밖에 없는 소이부답(笑而不答)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대전에는 무슨 일로 갔을까. 나의 추측으로는 선산을 둘러보고 자신이 누울 자리를 확인하러 갔을 것이며, 가는 길에 육신의 고통을 참으면서 J형을 찾아간 것은 고별인사를 할 겸, 일상적으로 해온 바 그의 직무에 관한 충성심을 엿볼 수 있는 일이다.
박 선생님은 이제 강 건너 마을을 찾아, 심령의 평안을 얻어 강을 건너가셨다. 낸들 얼마나 이 땅에 남아있으랴. 머지않아 나도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둘이 만나면 옛날에 가슴에 두고도 나누지 못했던 말, 소이부답(笑而不答)의 긴긴 사연을 밤새워 풀어내보고 싶다.
2. 최병인 선생
▶최 선생이 박찬운 선생에게 보낸 위로의 편지(박 선생 가시기 2주전).
얼마나 힘드나? 뭐라 할 말이 없네.
고3때 내가 병들었었지. 그때 학교도 못 간 게 한 달이나 됐었네. 내 심정은 사회에서 완전히 떠나고 싶었다네. 대학에 가서 나는 새장에 갇혀있는 새처럼 고독을 씹으며 살았네. 몸은 아프고 앞을 내다보면 캄캄했던 그때 찬운이를 만나 유 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어렴풋이 길을 찾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네. 마침내 졸업을 하였으나, 3년간 무직 상태에서 또 다시 내 맘은 병들어 있었네. 지금 생각하면 고독이고 절망이었네.
내가 수술을 받고 병석에 누워보니 나라는 존재가 완전 고립무원의 존재임을 절실히 느꼈네. 지금 찬운이가 그런 상태일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군. 그런데 사람이 고독해야 진짜 예수님을 만난다고 보네.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된다는 생각이 드네. 아내가 없어서도 아니고, 자식이 없어서도 아니고, 친구가 없어서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도 아니네. 병석에 누우면 내 대신 병을 앓아 줄 사람이 없고, 사경을 넘나들 때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음이 절실히 느껴지더군. 사람이 늙고 병들면, 그것처럼 서러운 일이 없음을 철저히 느낄 거야.
그래서 키엘케골은 ‘단독자’라고 말한 것 같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거야. 예수님이 누구신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시는 분이라네. 오늘 죽는다 해도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음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지. 바울은 매일 죽는다고 했지. 그는 또한 빨리 죽어서 예수 곁으로 가고 싶다고도 했어.
오래전 유 선생님이 일본의 한 환자 이야기를 하신 일이 있지. 사람들이 위문을 갔다가 오히려 그분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왔다고.
그래. 운암(雲巖).
오늘은 오늘을 사는 거야. 그래서 1일1생(一日一生)이고, 1일1사(一日一死)이지. 아무리 괴롭고 외로워도 오늘 하루는 살아야지. 하나님 곁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해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오빠 나사로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나는 이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는데, 최근에 이 의미를 깨달았네. 이 말은 죽은 후에 다른 삶이 있다는 것, 곧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을 약속하셨고 다시 오심을 약속하셨지. 이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희망 속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네. 그래. 우리는 오늘 죽어도 희망이 있다네.
2020년 4월 8일 병인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