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이하라 다다오의 '國家의 理想'을 지금 읽는다
(季刊 無敎會 79호, 2024.11.20)
니시나가 타타우(西永 頌)
(전 이마이칸 이사장)
1. 시작하며
야나이하라 다다오가 중국 침략에 반대하고 동경대에서 쫓겨나오게 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에도 국제정세는 매우 긴박하여 드디어 일본도 전쟁 당사자로서 가담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는 상황이다. 일찌기 야나이하라 다다오가 국민에게 호소했던 것이 지금 현실이 되어 우리에게 경계하라고 알려준다.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된 9월, '중앙공론'에 국가의 이상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군부가 주도하는 일본은 망하라고 경고를 발한 것이다. 이 논문은 즉시 잡지에서 전면 삭제 처분을 받았다. 이후 이 논문과 후지이 다케시 7주년 기념강연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동경대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2. '국가의 이상'이 말하는 것
본능대로 사는 동물과 달리,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이상(理想)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욕망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이상을 좇아야 한다. 중국 침략을 계속하는 일본도 나치독일도 욕망 그대로 사는, 이상을 잃어버린 존재이므로, 하루라도 빨리 망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사람의 이상은 정의이며, 정의란 자기의 존엄을 주장하는 만큼 타인의 존엄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사람이든 국가든 이 정의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이사야서를 가져와서, 이사야가 나라를 걱정하며 나라가 이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통렬하게 비판한 대목을 들려주었었다.
이 논문이 발표되었던 때, 군국주의가 온나라를 휩쓸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나치 독일이 파죽지세로 그 세력을 확장해가는 때였다. 당시 누구도,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자에게는 역사의 진정한 흐름이 보인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나라는 국민에 대해, 이웃의 존엄을 존중하도록 요청하고,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벌로써 처분하는 법률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웃나라들의 존엄을 존중하기는 커녕, 무력으로 침략하였다. 이는 정의에 반하는 일이라고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주장한다. 정의는 자기의 존엄을 주장하되, 타인의 존엄도 보호해주어야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의 뒷부분을 적용하여 말한 것이라 하겠다. 즉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웃나라를 자신의 나라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이 '국가의 이상' 논문의 결론이었으며, 중국을 침략한 군부에의 강력한 비판이었다.
3. 예수의 가르침
예수님의 말씀은 현재의 일본에 대해서 이웃인 북조선, 중국 그리고 러시아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 하신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역시 서로 사랑으로 대하라 말씀으로 명하신다. 그러나 현실은 얼마나 이 가르침에서 멀어져 있는가? 현재 여러 국가들의 심각한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의 가르침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모두 같은 생각이리라. 갈등과 대립이 계속되고 전쟁까지 반복하다 보면 그 관계는 더욱 심각해지고, 핵무기도 얼마든지 사용하게 되는 사태로 가지 않을까? 우크라이나 문제, 이스라엘 문제를 보면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성서의 중심문제는 어디까지나 죄이다. 죄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 우리의 일상 그 자체이다. 그 원인은우리의 이기심이며, 결과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고, 이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지우셔서 우리 죄를 사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함께 걸을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 기쁨에 힘을 얻어, 잘 안 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성령에게) 떠밀려 살아가고 있다. 또 적대하는 나라들과도 서로 존중하도록 종용받고 있다.
4. 민족주의의 위험
특히 다른 나라에 대한 증오는 불타오르기가 쉽다. 이는 인간존재의 근본에 뿌리박힌 내셔널리즘(민족주의)에 그 원인이 있다. 민족주의는 인간의 이기심과 같아서 동료간, 국가와 민족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생겨난다. 즉 국가와 민족의 죄라 할 수 있다. 국제 운동경기인 올림픽에서 자국의 승리만을 열광적으로 바라는 행위 자체는 국가 민족 에고이즘의 집약체라 할 수 있다. 이는 일본 뿐아니라 세계 각국의 공통 에고이즘을 드러내 보여주는 현상이다.
국가와 국민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욕망만 따르는 본능적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과 나치독일은 이 민족 에고이즘으로 인해 이웃나라를 침략하였고 패망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인도를 받고 이집트를 떠나 사막을 방랑하였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성서는 말한다. 사막에서는 그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과 보호를 직접 듣기도 하면서, 많은 역경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가나안 옥토에 들어가, 생활이 안정되자 야웨 하나님에게서 떠나 바알에게로 달려가 버렸다.
바알은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자연신이다. 바알은 풍요로운 열매와 자손의 번영을 약속한다. 사람들은 거기에 혹하여 바알이라는 우상에 제물을 바치고 예배하였다. 바알신은 율법이 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면 되는 거였다. 군국주의 일본과 독일 나치가 바로 이 바알 사상의 현현(現顯, 판박이)이었다.
5. 진리의 하나님에의 회귀 (결론을 대신하여)
한편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이끌어 주시는 신이시다. 율법을 주신 것도 사람이 제대로 살기 위함이었다. 본래 율법은 하나님과 함께 걷기 위한 가르침이어서, 율법을 따라 살면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기심으로 인해 기쁨이어야 할 율법이 사람을 속박하는 귀찮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목하신 건 이 의미가 퇴색한 율법이었다. 율법은 본래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영적 존재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쁨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유를 구하여 무율법의 자연신 바알에게로 달려가 버린 것이다. 예언자 예레미아는 백성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다. 백성은 듣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은 바빌론을 써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였으며, 나라는 망해버렸다.
그러나 무율법의 자연신을 따르는 현상은 아주 오래 전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오늘의 우리 이야기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을 우리는 받았음에도 본능대로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 역시 그렇게 자연신 바알을 따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시오' 라고 가르쳤는데, 어째서 인접한 나라들을 적으로 대하고 자국의 영광만을 워하는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누구를 따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