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평구 선생님과의 추억
이귀성
제가 종로서적에서 성서연구지를 사서 읽은 후… 선생님을 처음 찾아뵈온 것이 1959년?초로 기억됩니다. 당시 선생님은 48세 제가 23세였지요. 서울 보문동 한옥 방 두 개 세들어 작은 문간방에는 선생님 안채 방 하나는 사모님이 어린 아이들 데리고 계셨죠. 사모님 산파일로 살아가셨죠. 가난하셨죠. 저는 군 제대 후 복학생이었고, 고대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였습니다.
첫 뵈온 후 여러 차례 찾아뵈었고 그때마다 주변 한적한 마을 산턱 등 산보했지요. 구멍가게에서 밤빵을 한두 개 사서 나눠 먹기도…. 아마 그럴 여유도 없었을 텐데?
기독교 이야기보다는 저의 역사 공부 이야기가 주였습니다.
당시 한옥 문간방은 한 평이나 한 평 반 정도로 두 사람 겨우 누울 정도로 작은 방이었어요. 이런 곳이 노 선생님 서제 겸 잠자리였습니다. 둘이 마주 앉아 대화하기도 불편한 정도였지요. 후일 선생님 께서는 늘 외부인을 YMCA 1층 식당에서 만나셨던 것도….
보문동에서도 이웃으로 이사 하셨고, 얼마후 변두리 답십리로 이사 하실 때도 제 친구와 둘이서 도와 드렸지요. 공부하시는 책도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그 좁은 방에 전집류 등은 비치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물론 구입할 돈도 없었고요. 아마 일본의 쓰카모토 선생과 친구들이 보내준 성서 공부 참고 서적들 뿐이었겠지요. 선생님의 사자후 같았던 성경 강의 말씀은 바울이 전도 여행중 참고 서적도 없이 오직 믿음과 계시만으로 써내려간 말씀과 비견된다고 생각합니다.
집회장소는 YMCA에서 집회에 이르기까지 10여 년간 시청 앞 주택에서, 남대문로 재동빌딩, 석진우 씨가 임원으로 재직하셨던 재동산업 시무실에서, 그후 석 선생 돈암동 자택에서, 전농동 어느 분의 거실에서… 이리저리 옮겨다닐 걸로 기억되는군요.
1956년 노 선생님을 만난 후 제가 처음으로 참석한 일요 집회는 서울시청 앞 어느분의 日式 주택 거실에서였고 참석하신 분으로는 필경사 박윤규, 연세대 고병려교수, 숭실대철학과 교수 조요한과 그분의 동생 조명한 학생. 고교 독일어 교사 이재각, 영어교사 유정식, 제일출판사 정두영, 수학교사 김정환. 여류시인 석진영, 이찬갑 선생의 따님 이ㅇㅇ학생이었던 것으로 회상됩니다.
선생님의 강의 첫 대면시 좌고우면 없던 우렁찬 사자후! 놀랬습니다. 그리고 박람강기(博覽强記)하게 막힘없이 깊이 파헤쳐 끝없이 이어지는 강의내용에도 절로 놀라움이 계속되었습니다.
오랜 후에 저 개인적으로 느끼고 깨우쳤던 것은 아마 사도 바울도 죽음믈 넘나드는 전도여행 역경에서 사명 인식, 열정, 용기로 그 어느 곳에서나 복음 진리를 사자후로 토해 내셨을 것이라 믿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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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생님께서 카톡대화로 알려주신 내용입니다. 그런데 소중한 추억이라 여러분과 공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 허락을 받아 여기에 옮겼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좋은 스승을 만난다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늘 생각합니다. 임천 선생님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때, 늘 노평구 선생님이 계신다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