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나
(나에게 있어서의 한국~그 차별구조 속에서)
반나이 무네오(坂內宗男)
나에게 한국이란 인생의 의미를 심어주었으며, 게다가 ,지금 존재하는 나의 인생 바로 그 자체로, 자기중심에서 사죄라는 행위를 통해 이웃에게 몸을 바치는 생각의 고귀함을 알게 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노보리토(登戶)학료 학생이었던 1962년 5월, 다카하시사부로(高橋三郞) 료장(寮長)이 주재하는 집회에 오신 재일조선인 신자 정탁식씨와의 만남은 나에게 결정적이었다. 씨는 스즈키쓰케요시(鈴木弼美)와의 극적 만남으로 신앙을 얻어 이마미관의 야나이하라 집회와 연결되었고, 야나이하라 사후 S씨의 권유로 다카하시 집회에 온 것이었다. 소중한 책을 판 돈으로 스스로 토목공학전문서 판매일을 시작했을 때, 다카하신 선생에게서 씨를 소개받았다. 나는 6월 취직후 첫 보너스로 그분에게서 교문관 간행의 우찌무라 전집 50권을 일괄구입하였던 것이 직접적인 만남이었다. 그후 씨와 사귀게 되었고, 사토미(里見安吉) 초대 료장과 다카하시 료장이 일제 조선통치기와 깊은 관계가 있어, 자신들의 죄책임을 깨닥고 (우리에게)가르쳐주셨는데, 씨와의 직접 만남은 나의 인생에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음해 4월 나는, 관청에 취직하여 1년이 지나 총무(인사)과장과 직접 담판한 끝에 복지사무소에 전근을 허락받아 생활보호 사례연구자로서 활동했다, 결과적으로는 누구도 가지 않은, 당시 조선인부락이라 하여 무시당하던 지역을 담당, 내부에 도사린 처참한 차별구조를 볼 수 있도록, 나의 눈이 열렸던 원인도 씨를 알고나서 냉정한 현실판단을 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재일조선인은 외국인 취급을 받기 때문에 일거리가 없고 대부분 나라의 실업대책사업으로도 보호받지 못했으며, 다른 일본인 노동자가 갖는 사회보험 혜택도 없어 병이 들어도 진찰조차 받을 수 없는 실태를 보았다. 같은 세금을 내면서 건강보험이나 연금수급 자격의 권리가 없는 모순, 이것은 명백한 민족차별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주민평등의 국가정책을 청원하고자 1979년 뜻있는 분들과 함께 물레회를 만들어 권리획득, 차별해소를 주장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또한 재일의 역사를 배우는 시민강좌를 열고 특히 먼저 조선통신사를 배워, 황국소년으로서 히데요시(秀吉)의 위대함, 이에야스(家康)의 노회함(古狸)을 외웠던 나의 역사관은 오히려 전혀 달라 그 반대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문화란 인간이 습득해가는 것으로써 우리나라의 문명 근원은 먼 중국이 아니라 조선이며, 몽고침략시 몽고의 패배는 가미가제(神風)때문이 아니라, 100년에 걸친 조선인의 반격을 만나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몽고군이 일본에 건너왔기 때문이라는 것,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오늘날의 동아시아 평화의 기본이 되는 탁월한 의의를 갖고 있는 것 등등 고대-중세-근현대에서의 역사관의 기초를 배웠다. 동양사라고 하면서 중국역사만을 배워서는 안 된다고, 중국편중의 우리들 역사관이 일변하였음을 깨달았다.
그런 편견에서 탈피한 것은, 조선과 한국의 가혹한 일제지배에서 고통받던 분들과의 화해를 구하여 마음으로부터 사죄함과 동시에, 미래를 지고나갈 젊은이와의 한일교류로 진정한 우정을 형성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세계평화의 바탕이 된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차별과 평화는 상반되는 개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재일교포 차별의 근저에 있는 천황제사회(즉 자신의 체내에 뿌리박혀 있는 천황제)와의 대치의 필요성을 통감, 그리스도교 비전평화단체 일본우화회(FOR)나 그리스도인정치연명(기연맹)의 일원으로서, 또한 일본그리스도교협의회(NCC) 내의 야스쿠니(靖國) 신사문제위원회에서, 그 바탕이 되는 일본인의 정신구조와 그 집약체인 천황제를 어떻게 그리스도 십자가로 연결시킬까, 우리는 날마다의 싸움 속에서 단련되어 나간다. 세계에서 자랑할만한 절대평화주의헌법이 주어졌는데, 왜 오늘날의 급박한 전쟁전으로의 회귀와 함께 천황제군국주의가 선전되고 있는가? 이 '현재'라는 승부처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와 만나 한국과의 수많은 교류를 이어나가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매일 기도하고, 그길을 따라 걸어가고 싶은 바람이 있다.(일한우화회보 56호, 2016.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