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공부 64회
14. 장차 올 영광
(로마서 8:18)
18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7절에서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같은 상속자이니 그리스도가 받은 영광을 받게 되는데 그러려면 그가 받은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하면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이 불가결한 것임을 말하며 담대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는 “여러분이 받고 있는 고난은 우리에게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벼운 것이니 잘 참고 견디어주기를 바란다.” 하고 마음을 쓰다듬어주고 결국 26절에서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된다.”는 말씀으로 마무리한다.
1. 장차 나타날 영광
이 본문을 쉬운 영어성경으로 보면
Yet what we suffer now is nothing 아직 우리가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compared to the glory. 그 영광과 비교하면
그 영광은 어떤 것이냐 하면?
he will give us later. 그분이 나중에 우리에게 주실 영광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상속받는다는 생각에 잠시 기쁨에 젖어있던 바울사도는 다시 자신의 현실로 돌아왔다. 얼마다 고난의 생애였던가. 그러나 영광의 희망이 신기루처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현재의 고난이상으로 현실적인 것이었다. 앞으로 나타날 영광의 찬란함과 확실함을 생각하면 지금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야나이하라 다다오)
우리가 이렇게 큰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인함이다. 예수님도 직접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하고 위로를 주셨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예루살렘 사람들 앞에서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외치면서 ‘그렇게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로부터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사도 베드로가 보낸 세월은 사람이 보기에 유쾌한 날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유쾌한 날이 이르리라 공언하였던 것이다. 사도 베드로 역시 영광의 소망이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의 고통은 우리가 보게될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의 영광과 비교하면 말할 것이 못 된다.”
쓰카모토 선생의 번역인 이 말씀은 '지금 세상 ↔ 우리가 보게될 수 밖에 없는 세상'을 대비시키고, '고통 ↔ 영광'을 대비시키고 있다. 우리는 지금 지상에서의 세상에 살고 있으나 장차 올 세상이 있는데 그것은 누구나 반드시 만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현재의 고통은 장차 올 영광으로 대치되는데 그 영광은 너무나 커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크기와는 비교가 안 된다는 뜻이다.
결국 지상에서의 고통이 천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행복에 비하면 셀 가치도 없는 것이니 실망하지 말고 참고 이겨나가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고난이 별게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실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도 많다. 그래서 절망에 빠지기도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할 정도로 무거운 고난도 있다. 다만 우리에게 닥칠 영광은 반드시 올 것이고, 그 영광에 비하면 현재의 고난은 가볍고 잠시의 일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울사도는 로마교회 사람들에게 이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잘 참고 견뎌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고, 이 영광의 소망이 로마교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고난을 견디는 힘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가올 영광을 믿을 수 없는 이들에게는 지금의 고통이 너무 무거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버리기도 하고 자신을 포기해버리기도 하였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무서운 핍박을 받고 있었다. 또한 악독한 원수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믿음의 식구들이 하나둘씩 사람들이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있었고, 집은 파괴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강탈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만날 때마다 ‘마라나다(Maranatha)’라고 인사를 나누었다. 주께서 오실 그 때를 바라본 것이다. 즉 다가올 영광의 소망을 확신한 말이다. 현재의 고난에 시선을 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나라에 소망을 두었고,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신뢰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하늘의 백성들로 손색이 없었고, 기독교를 세우는 견고한 반석이 되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7-18) 한 말씀 그대로의 생활이었다. 그들이 본 것은 현재의 고난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상이었다.
바울사도는 현재의 고난을 17절에서 이야기하고는 18절에서 장차 올 영광과 대비시킨다. 고난의 욥은 말년에 처음 받았던 것보다 더 많은 복을 받아 다시 행복을 누리는 것으로 끝나고 있지만 여기서는 이 세상에서의 영광을 말하고 있지 않다. 장차 오게 될 영광이다. 베드로 사도도 이생에서 잠깐 고난을 받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라고(벧전 5:10) 장차 올 영광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통중에 있을 때 우리는 하루하루가 괴로워서 빨리 지나가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이때 요한 사도가 약속한 말씀을 보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요1서 2:28) 장차 올 영광이 아주 먼 미래의 일이 아니며 우리에게 이미 가까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믿고 소망을 가져야 할 것이다.
2. 고난에 대처하는 자세
고난 속에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고난을 이기셨는지 살펴보는 것이 모범답안일 것이다. 예수님은 참으로 멸시와 아픔을 고스란히 감내하셨다. 전지전능의 능력을 가졌음에도 힘으로 제압하지 않으신 분이다. 열두 영이나 되는 군대를 그 즉시 불러내어 그들을 혼낼 수도 있었지만 묵묵히 받아들인 예수님을 생각해 보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하고 시작하는 히브리서 11장에는 아벨에서부터 시작하여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그리고 산과 바위와 토굴로 헤매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초대교회 신자들까지 허다한 사람들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고난받기를 더 좋아하였다고 증거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다(히 11:29).
고난의 삶을 참고 견디며 장차 올 영광에만 소망을 두며 살다간 믿음의 증인들이 우리 주변에도 수없이 많이 있는 것을 참으로 감사한다. 그중 몇 분들의 글을 읽으며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고난에 대처해야 하는가 배우고자 한다.
☆ 박석현 선생
박석현 선생의 일생이 얼마나 고난의 연속이었는지 대부분 잘 알 것이다. 그가 1973년 11월에 쓴 글을 인용한다. 이것은 연탄가스로 폐인이 된 이찬갑 선생을 위문하고 간호하시던 부인마저 반신불수가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쓴 글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신가? 아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의 겟세마네 동산의 피땀 흘린 기도도 들어주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사랑의 아버지가 아닌가? 아니다. 하늘 보좌의 아버지 우편에 앉히사 최대 최고의 영광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기도를 안 들어주신다고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 하나님은 왜 사랑이신가? 그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은 우리는 모든 것을 잃더라도 ‘할렐루야’ 할 뿐이다.
박석현 선생은 생의 최후까지도 극심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위암수술에 이어 허리통증, 장유착 등으로 참기 힘든 아픔 속에서 숨까지 가빠하는 박선생에게 아드님이 오늘이 주일이니 하나님께서 불러가실지도 모르겠다며 빨리 하늘나라에 가서 쉬시라고 하자 “그것도 사람의 욕심이다. 그 일마저도 하나님 뜻대로 되어져야 해.” 하였다고 한다. 박석현 선생에게는 가난이나 병고나 실직이나 모욕이나 무엇이든 문제될 것이 없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받은 것 하나만으로 족한 삶을 우리에게 남기고 가신 것이다.
☆ 김애은
김애은 선생의 ‘은혜의 길’을 보면 이분 또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의 생애를 살다 가신 분임을 알 수 있다. 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부족함에 가슴아파하며 고난을 기꺼이 기쁨으로 은혜로 받아들이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는다.
1976년 2월 7일 일기
최고의 고난으로 시작, 최고의 고난으로 끝내신 예수는 최고의 영광.
우리의 고난도 주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는 첩경.
고난 속에서라야 살아계신 주님과 대면할 수 있기 때문.
우리에게 요것만 없었으면 하는 고난 그 자체가
주님만나는 최고의 은혜의 조건.
믿고 받아들이자.
하나님 아버지께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자리까지 몰아넣으심은
아버지 곁에 가까이 두시려는 뜻.
그리고 당신만 바라보고 당신과만 속삭이고 당신에게만 의지하게 하시며. 모든 것을 당신이 놀랍게 하여 주신다는 것을 보고
찬송과 감사를 부르짖으라는 뜻으로 믿는다.
☆ 송두용
이 세상이 나에게는 풀무와 같다.
그러나 이 무서운 풀무를 지난 후에야 천국의 그릇이 된다면 어찌하랴?
풀무 속에서만 세력을 가진 불덩이들아!
너희가 할 수 있는 때까지 나를 녹이며 괴롭게 하라.
나는 너희로 인하여 훌륭한 그릇이 될 것이나,
너희들은 풀무 밖에서는 세력을 펼 수 없을 것이며
또 풀무 속에서도 때가 되면 재가 되고 말리라.(1928, 4월 성서조선 4호)
송두용 선생이 24세 때에 이 글을 쓰셨다. 20대의 어린 청년의 글에서 이렇게 세상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후의 송선생님 일생은 이의 실천이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장차 올 영광이 어떤 것인지 아직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셨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확신을 가지고 장차 올 영광을 말하고 있다. 어쩌면 바울 사도는 다메섹의 길에서 빛을 보고 예수님을 만날 때 장차 올 영광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셋째 하늘에 간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으므로(고후 12:2-4) 그 후에 비밀스러운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바울 사도는 장차 올 영광은 현재의 우리의 삶만큼 확실한 현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고난 속에 있을 때 '장차 올 영광'이 어쩌면 뜬 구름 잡기나 현실과 동떨어진 위로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것은 확실하다. 우리도 그 날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현실임을 인정한다. 우리의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행이도 성령, 보혜사의 도움이 있기 때문에 미련한 우리들도 장차 올 영광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구름처럼 허다한 증인이 있다. 성경 속의 인물을 비롯해 믿음의 선진들이 수두룩하다. 돌아가신 분들 뿐만이 아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우리 가족, 이곳에서 함께 모여 있는 우리 믿음의 식구들, 그리고 각처에서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우들도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며 보지 못한 것들을 믿으며 걷고 있는 증인들이다. 잠시의 고난에 실망하지 말고 주께서 기다리는 영광의 세상을 바라보며 살도록 서로 위로하고 기도해주기를 쉬지 않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