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 공부(51)
제58강 구세주의 부르는 소리
---피곤한 자는 오라---
마태 11장 28-30절
28자 피곤한 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는 누구나 나에게로 오라. 쉬게 해 주겠다. 29나는 마음이 유하고 교만하지 않으므로 나의 멍에를 메고 나의 제자가 되어라. 그러면 '영혼의 휴식을 얻으리라.' 30나의 멍에는 헐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신약성서 중 가장 유명한 곳의 하나이며 또한 가장 위로에 넘치는 성구이다. 그리스도교의 정신은 모두 이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다만 그 말이 너무도 단순하고 평이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암기할 정도로 알고 있으면서도 그 깊은 뜻을 잊기 쉽다. 그리고 너무도 쉬운 진리이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설명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약간 사족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먼저 11장 전체의 사상의 흐름을 보고자 한다. 이야기는 세례자 요한이 제자를 예수에게 보내어 그가 참 그리스도인가 아닌가를 묻게 한 데서 시작한다. 예수는 직접 이에 답하지 않고 다만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걷고, 가난한 자가 복음을 듣고 있다. 이 사실 그대로를 요한에게 보고하라고 이르신다. 그리고 사자가 간 뒤에 군중에게 요한의 위대함을 칭찬하시면서 말씀하신다.--- 요한이야 말로 올 예언자 엘리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듣지 않는다. 따라서 또 나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내가 특히 사랑과 열정을 다해 복음을 전한 갈릴리의 동네들, 고라신도 벳세다도 아니 가버나움까지도 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을 아는 사람은 안다. 알지 못함은 이 세상의 소위 지식인, 학자 종교가들 뿐이고 어린 젖먹이 같은 이 세상의 약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 복음의 진리를 나타내셨다. 복음의 정객(正客)은 가난한 자이며 죄인이며 타락한 사람들이다. 자기의 안과 밖의 압박을 괴로워 신음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인생에 지쳐 피곤한 자,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자는 모두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희들을 쉬게 하고 힘을 북돋워 주겠다! 내가 너희에게 지우는 멍에는 가벼우니까 누구라도 아무리 약해도 아니 약하면 약할수록 이를 질 수 있는 것이다 운운.
그리고 12장에 가서 어떻게 그가 무거운 짐을 진 자의 짐을 가볍게 하셨는가가 적혀 있다. 언뜻 보아 잡다한 기사처럼 보이지만 우리들은 그 속에 일맥의 사상의 저류를 찾아 볼 수가 있다.
두세 가지 말의 설명을 한다. ---
28 이를 원문의 순서로 번역하면
오라, 나에게 (너희들) 모든 피곤한 자, 무거운 짐을 진 자,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천금의 무게가 있다.
오라, 나에게이다. 이 얼마나 권위 있는 말씀인가! 주해자 알포드가 말하듯이 이야말로 세례자의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라는 물음에 대한 위대한 최후의 대답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아닌 그 누구도 나에게로 오라. 그러면 휴식을 주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인류역사 있은 지 5천 년, 이렇게 인류에게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외친 사람은 있어도 그 말대로 참 휴식을 준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거의 전능이라고 할 수 있는 20세기의 운명으로써도 이것만은 못한다. 만약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증거를 구한다면 아마 이 구절이 그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또한 이 이른바 구세주의 부르는 소리가 그 얼마나 사랑으로 넘쳐있는가! 구세주 스스로 오라고 말씀하여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킬케골이 이 구절을 설명하여
오, 이 얼마나 놀랍고 신기한 일인가. 구조를 베풀어주실 수 있는 그 분이 스스로 오라고 말씀하시다니! 이 무슨 사랑인가! 구조할 수 있는 사람이 구조를 구하는 사람을 구하는 것만도 벌써 사랑이다. 그런데 스스로 구조를 제공하시는 것이다! 그것도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시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도 되돌려 구조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는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아니, 사람들을 부르신다. 마치 구조자 자신이 구조를 필요로 하는 듯이. 또 모든 사람을 구조할 수 있고 또 이를 바라는 그 자신도 한 가지 점에서는 궁핍자와 다름없듯이. 그 이유는 그는 사람들을 구조할 궁핍을 느끼며 또 그런 한도에서 구조를 필요로 하며 괴로워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그리스도교의 훈련)
길 잃은 양을 부르는 구세주의 소리. 우리는 여기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나 또 오라이며, 그 스스로---오늘날 많은 미국류의 전도자가 하듯이---이 쪽에서 밀어닥쳐 가서 강제로 자기 쪽에 끌어당기는 것이 아님은 주목할 일이다. 그는 문밖에 서서 조용히 문을 두들기시며 참을성 있게 그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신다(계3:20). 그는 결코 스스로 문을 젖히고 방안에 침입하시지 않는다. 여기에 그의 겸손이 있다. 그리고 무한의 겸손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가 여기에 일치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인간인 이상 우리 쪽에서 그에게로 이르러야겠기 때문이다. 방탕한 아들의 비유를 보라. 또 야고보의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가까이 하시리라(약4:8) 라는 말을 생각해 보라.
피곤한 자는 애쓰고 있는 자 즉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자의 뜻으로 해석되지만 본역과 같이 모든 노력이 보람이 없어 지쳐버린 자의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또 무거운 짐을 진 자는 자기 어깨에 짊어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의 뜻이다. 단 이 말의 의미는 오히려 유대식이며 유대의 학자 종교가들에게서 짊어질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종교상의 의무를 지워져 있는 자를 말할 것이다.
예수 시대에 유대인이 얼마나 종교상의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었던가는 우리들의 상상 밖이다. 종교상의 일 모든 것이 무거운 짐이었다. 가령 그들의 국민적 의무였던 세마의 기도, 18의 기도의 일만도 벅찬 일이어서 전문 학자로부터 복잡한 설명을 듣지 않고는 이를 완전히 수행할 수가 없었다(상세한 것은 졸저 주기도의 연구 부록 예수 시대의 유대인의 기도를 보라).
그밖에 식전에 손을 씻는 의식, 식탁의 기도, 금식, 청결과 불결의 구별, 또 일할세(一割稅), 여러 가지 제일(祭日), 특히 안식일에 관한 규칙의 복잡함은 참으로 언어도단이었다. 요컨대 한 사람 한 사람의 유대인이 신주이고 신주에게도 불가능한 복잡한 의식을 매일 매일 행해야 했던 것으로 보면 대체로 틀림이 없다. 어떤 사람이 이를 지키는 것은 죽는 것보다 괴롭다고 말했다고 전해짐은 오히려 당연하다.
예수는 이런 불쌍한 사람들을 향하여 모두 나에게 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모두 오라 한 사람 빠짐없이 오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 사회의 중압에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에 한하는 것이며 무거운 짐이 없는 사람은 그에게 올 것이 없고 와봐야 그에게서 위로를 받을 수도 없었다. 예수께서 사람을 대접할 때엔 오히려 빈자, 절뚝발이, 앉은뱅이, 소경을 청해라(눅14:13)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께 초청된 손님은 모두 이같은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초대에 응해서 온 사람은 한 사람 빠짐없이 그의 영의 향연에 참여할 수가 있었다.
예수는 이같은 사람들에 대하여 쉬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원문은 그리고 내가 쉬도록 하겠다. ‘너희들을’이며 ‘이 내가’를 강하게 읽어야 한다. ‘이 내가!’의 뜻이다. 본래 이곳에는 ‘나’가 많아, ‘나에게 오라, 내가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부드러워, 나의 멍에를, 나의 제자가 되라, 나의 멍에는, 나의 짐은’이다. 다만 예수만이 사람에게 평안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키며 또 신앙은 모두 그와의 개인관계임을 암시한다.
쉬도록 하겠다는 휴식을 주리라의 의미로도 또는 위안을 주리라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전자는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자로부터 그 무거운 짐을 받아준다는 뜻이며 그 괴로움에서 쉬게 하겠다는 말이다. 계시록에 과연 그들은 그 노역을 그치고 쉬게 되리라(14:3) 고 말함과 같은 의미이다. 또 후자는 지쳐버린 자를 위로하고 힘을 북돋워준다는 뜻이며 영어의 comfort와 같은 의미로 취한다. 라이트후트는 이를 설명하여 “새로운 노동 또는 곤고를 시작하는 준비로서 잠시 쉬며 또는 심기를 일신시키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요는 말투의 차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휴식을 베푼다.������고 말해도 물론 일시적인 휴식이며 지상의 크리스천의 생활에서는 영원히 노동을 쉬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의미에서 ������쉬다������의 원어 anapauo는 히브리서4장에 있는 절대의 안식---그 후에는 더 이상 주일(週日)이 오는 일 없는 안식일---을 나타내는 katapausis에 대립되는 말이다. 그러나 근간에 이집트의 파피루스에서 발견된 이 말의 용법에 의하면 이는 농업상의 술어로서 ������가벼운 농작으로 땅을 쉬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파피루스 문헌에는 이렇게 휴식된 휴한지를 en anapaumati라고 칭했다.(주)
(주) 마12:43(=눅11:24)에 쉬는 장소라고 번역된 것이 이 말의 명사형 anapausis이다. 만일 이 경우에도 귀신이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서 잠깐 쉴 장소를 구했다는 뜻이라 하면 극히 흥미가 깊다.
여하튼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영혼의 참 휴식이 있다. 우리는 인생의 싸움에서 상처를 입고 지쳐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온다. 그러면 그는 우리를 쉬게 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새로운 싸움을 위해 힘을 돋워주신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적 경험으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노동 또는 전쟁은 그 노동 또 전쟁 그 자체가 휴식이다. 노동은 우리를 피로케 하지 않고 도리어 우리에게 영혼의 안식을 준다. 달려도 피곤치 않고 걸어도 지치지 않는다 이다(이사야40:31).
29-30 또 예수의 말씀은 이어진다. ---
멍에는 수레 쟁기 등을 끌기 위해서 우마의 목에 거는 횡목이다. 나의 멍에란 그리스도가 메시는 멍에가 아니라 그가 메워주시는 멍에라는 뜻일 것이다.(주)
(주) 유대의 학자는 하나님나라의 멍에 율법의 멍에 이 세상의 멍에등 많은 멍에를 인정했다. 예수에 의해서 이 모든 것은 사라지고 다만 하나 예수의 멍에만이 남았다.
멍에는 본래 우마의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며 그들을 괴롭히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날 멍에라 하면 이를 짐과 같이 생각하게 된 것은 이를 지우는 사람과 지는 사람과의 관계가 문란해졌기 때문이다. 또 멍에는 메워지는 것이지 멋대로 메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뜻에 의하지 않고 남의, 자기의 지배자의 의사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의사로써 멋대로 이를 벗어버릴 수는 없다.(주)
(주) 예수가 이혼문제를 논하여 부부는 하나님이 하나의 멍에로 맺어주신 것이다. 인간이 이를 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두 사람의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의사와 필요에 의해서 둘을 같은 멍에에 맺어주신 것이므로 인간 편에서의 이혼이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마19:6).
나의 제자가 되어라는 혹은 나에게 배워라이다. 어느 편이나 큰 차는 없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는 말씀하시지 않았으나 물론 예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것이리라. 즉 예수가 지우시는 멍에는 온유와 겸손의 멍에이다.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에 대해서는 지금 여기서 말할 필요가 없다. 이사야53장이 가장 좋은 설명이다.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된 까닭은 그가 온유하며 겸손한 데 있다. 크리스천의 크리스천 된 까닭도 또한 그를 닮아 온유와 겸손한 데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멜 때에 비로소 우리들의 영혼에 휴식을 얻을 수 있다. 참 안식과 평화는 다만 겸손의 골짜기에서만 꽃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평안인 것은 여기서는 모두가 온유하고 겸손하며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단테가 천국에서 월천(月天)의 피칼다로 하여금
E' n la sua voluntade nostra pace.
당신의 뜻에 우리들의 평화가 있다 고 말하게 한 것이 전 천국생활의 기조이다. 또 어거스틴이 ������고백������의 서두에
Tu fecisti nos ad te, et inquietum est cor nostrum, donec requiescat in te. 당신은 우리를 당신께 향하여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우리의 마음은 쉼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 것도 같은 뜻이다.
그리고 그의 온유와 겸손의 멍에는 헐하고 그 짐은 가볍다. 이 멍에를 질 수 없을 만큼 약한 사람은 없다. 이 멍에는 약하면 약할수록 메기 쉽기 때문이다.
흔히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어려움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그 사람이 너무도 강하고 위대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복음의 짐이 너무 가볍기 때문에 제멋대로 도덕이라거나 수양이라거나 하는 무거운 짐을 붙잡아 메고 무겁다 무겁다고 끙끙거리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어느 전도자가 선생님과 같이 위대한 분이면 송두리째 맡겨 버릴 수가 있지만 저 같은 자에게는 그것이 안 되므로 수양이나 노력을 해서 겸손해지도록 수련하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에게 자네는 병이 들었으니 빨리 의사에게 가보게 하니 그 사람이 나는 의사에게 가볼 힘이 없으므로 좀 더 건강해진 뒤에 의사에게 가겠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 어리석음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매약으로 치료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진짜 병자는 아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에게 가지 않는다. 예수의 멍에가 무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반드시 판에 박은 듯이 그리스도교는 어려워서 우리들과 같은 자에게는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같은 자란 웃기는 말이다. 나는 언제나 이런 사람에게는 군이 너무 위대하기 때문이다. 고 말해 준다. 예수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 고 말씀하신 것을 본떠서 하는 말이다.
병이 위중해져서 더 이상 약치료가 듣지 않게 되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의사에게 간다. 그리고 이번에는 예수의 멍에가 가볍게 느껴지는 것이다. 예수의 멍에가 가벼워진 것이 아니다. 제멋대로 짐을 붙잡아 매지 않게 된 것이다. 이 일을 깨닫게 된 사람이 그리스도교를 안 사람이다.
인생의 무거운 짐에 지쳐서 괴로워하는 자는 누구나 나에게 오라. 그리고 온유와 겸손의 나의 멍에를 메라. 그렇게 하면 영혼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나의 이 멍에는 수월하므로 누구나 쉽게 멜 수가 있다. --- 이 구세주의 부르는 소리 속에 그리스도교의 모든 것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의와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 하나님의 무한한 높이와 그리스도의 무한한 낮음!
희랍 문자로 겨우 마흔다섯 자이다. 그러나 이것이 있는 한 그리스도교는 사라지지 않는다. 설혹 성서가 모조리 다 없어진다 해도 이 마흔다섯 자가 남아있는 한 우리는 이것으로 그리스도교를 다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너무도 위대하고 또 따라서 평이한 진리이기 때문에 다만 조용히 머리를 숙여 믿을 말씀이며 설명과 연구로써 이를 탈취할 수는 없다. 아니 다만 묵묵히 이를 신수(信受)하는 일 그 자체가 그가 요구하시는 온유와 겸손의 멍에이다. 근대인이 싫어하는 것 중에 멍에와 같은 것은 없다. 그들은 모든 멍에, 모든 속박을 벗어버리려 한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시2:3)란 현대인의 슬로건이다. 그러나 어리석고도 가련한 그들은 하나님의 가장 가벼운 멍에를 버리고 보다 무거운 멍에에 몸이 결박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인생의 모든 해독과 고통은 애당초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사랑과 겸손의 멍에를 버린 데 기인한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의 멍에가 한 번 잃어버린 인류의 행복, 하나님의 아들 된 특권을 우리들에게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춘풍추우 이미 2천 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부르는 소리는 헛되이 거친 들에 울리고 있다. 겸손의 골짜기를 거쳐 그의 곁에 달려가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진 자는 누구인가! 여기에 인생의 의의가 있고 인생의 참 행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