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좋은 글 읽기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함민복

작성자고정현|작성시간17.09.19|조회수114 목록 댓글 4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함민복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셋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 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 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자장면을 시켜 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자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 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자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 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夏林 안병석 | 작성시간 17.09.19 늦결혼에 가난도 행복으로 삼는 함민복 시인을 다시 봅니다.
    눈시울이 따뜻해질수록 누군가의 시도 데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고정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9.19 서민적인 시의 향기에 취하기도 하지요.
  • 작성자김학성 | 작성시간 17.09.19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 때는 그랬다가 아니다
    희망을 갖는자가 서둘러 웃으며 배달을 갈 수 있고
    살아간다는게 모험 일수 있지만
    눈물 나게하는 평범함에서 감동을 심어준다
  • 답댓글 작성자고정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9.19 소시민들의 행복이 거기 있었지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