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의 도리
고등학교 동창생이 고서적 구백여 권을 모교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는데, 그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 고서적 중에는 동의보감 외에도 희귀본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대학은 일 년여 동안 전공 교수들의 고증을 거쳐 가치를 확인했다. 또 대학은 도서관 내 「동주권명수문고」라는 별도 코너를 마련하여 그것을 특별히 우대한다고 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고서적을 기증하고 싶어 했다. 나는 반신반의했다. 그렇게 귀중한 것을 그가 보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일까.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고 기증까지야 할까 싶었다.
그는 섬유 염료를 혼합해서 섬유공장에 납품하는 사업을 했다. 독특한 노하우를 개발하여 한때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천재지변 같은 아이엠에프를 맞아, 사업은 하루아침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때부터 나와는 급격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가 고액의 세금을 체납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세무서에 근무했다. 그는 체납독촉을 하지 말아 달라며 사흘이 멀다 하고 내게 연락을 해왔다. 그렇게 시작한 체납 부탁이 퇴직 무렵까지 근 십 년 넘게 이어졌다. 그사이 납부 약속은 한 번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약속 위반에 대한 변명도 다양했다. 그런 그의 언행 때문에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는 고액의 체납 세금에다 여기저기 누적된 빚으로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살던 집까지 팔았으나, 그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동기생 모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동기생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점점 잊혔다. 내가 퇴직한 후였으므로, 나와의 만남도 뜸했다.
이 와중에 그의 기증 사실이 신문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고서적의 재산적 가치가 어림잡아 십억이 넘는다는 소문이 동기생들 사이에서 돌았다. 그 돈으로 밀린 세금을 정리하고, 사업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기증의 자초지종이 궁금해서, 그를 찾아갔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그는 그간의 사정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가족들이 그것을 처분하자고 나섰다. 그는 잘 보관하는 것이 후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라며 가족을 설득했다. 그러나 그런 교과서적인 말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 역시 처분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겹치자 처분할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전문가에게 감정이나 받아보자며 서재에 들어서는 순간,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어릴 적 천자문을 가르쳐주신 할아버지의 모습이 방안에 어른거렸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침 소리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순간 감정할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염없는 눈물이 그의 뺨을 적셨다.
그동안 그는 끊임없이 그것을 관리하는데 매달렸다. 고서적은 생물과 같아서, 돌보지 않으면 벌레가 슬어 못쓰게 된다. 햇볕을 차단하고 공기가 잘 통하게 해야 했다. 해충이 생기지 않도록 규칙적으로 일광소독을 하는데, 분량이 많아 할 때마다 애를 먹었다. 사업 실패로 이사는 더욱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그때마다 파손이나 분실을 우려하며 곤욕을 치른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말을 마치자, 그는 소년처럼 맑게 웃었다. 이제는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서 홀가분하며, 조상을 더없이 좋은 곳에 모셔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가 비로소 오랜 번민에서 벗어난 것을 알았다. ‘선비는 얼어 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비록 생활이 어렵지만, 금전적 이익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가 진정한 선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그를 체납액 납부 약속이나 어기는 친구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사람은 겉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다. 찰나의 이익보다는 영원한 삶에 머물러 있는 가문의 후손.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조상을 존경하는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