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는 정녕 신라로 돌아오지 않은 걸까?
경주 남산 열암곡의 마애불. 거대한 바위만 비탈지게 놓여 있었다. 마애불의 전신이 새겨진 바위 면이 지면과 맞닿아 있어서 마애불은 볼 수 없었다. 16C 경 지진에 의해 암벽에서 떨어져 나와 굴러 내리는 바람에 지금처럼 엎어진 모습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거대한 암벽에서 분리된 개연성을 짐작케만 할 뿐, 정작 모태 암벽은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컴퓨터로 단층 촬영된 마애불의 전신을 보았을 때였다. 그렇게 큰 우환을 당했어도 몸에 탈 하나 나지 않았다. 왼손은 등을 바깥으로 하여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서 오른쪽 가슴 위에 얹었다. 오른손도 손등을 밖으로 내보인 상태에서 엄지손가락을 감싼 네 손가락을 아랫배에 대고 있었다. 처음 보는 형식의 불상이었다.
무엇보다도 두 발이 옆으로 벌어져 있어서, 역동적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마치 탁발이나 하러 가거나, 누구를 보러 오는 길인 듯 여유로워 보였다. 법의도 우견편단이었다. 온몸을 둘러싼 통견 형식이 아니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가벼운 차림이었다. 익숙하게 보아 온 부처의 불상과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혹시 부처가 아니지 않을까. 어떤 인물을 대상으로 해서 빗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애불 조성연대가 8C로 추정된다고 했다. 신라에서는 불교가 한창 불타오르던 시기였는데, 현교의 법과 경전 위주가 아니라 직관에 의해서도 성불할 수 있다는 밀교가 신흥 세력으로 등장하던 때였다. 그 밀교에 혜초라는 인물이 있었다. 혜초는 그 시대 불교계를 풍미한 세계적 인물이었다.
이 불세출의 밀교 고승 혜초를 따르던 후배 불도들도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에서 유학 중인 유학승은 유독 더했지 싶다. 그런 당시 불교계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이 마애불이 혜초를 조각한 것이 아닐까.
8C 초, 혜초는 중국 당나라를 거쳐 지금의 인도에 해당하는 다섯 천축국을 다녀왔다. 언어나 문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육신 그대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즉신성불의 교리를 신봉했던 혜초는 이렇다 할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남은 기록물이라고는 두루마리에 쓰인 「왕오천축국전」이 전부다.
인도를 다녀온 30대 초반의 혜초는 신라로 귀국하지 않았다. 당나라 수도 장안에 남아 평생을 불덕 쌓기에 매진했다. 그러던 어느 해였다. 날이 갈수록 가뭄이 심해 당나라 황제가 혜초에게 국가적 규모의 기우제를 주관하게 했다. 그만큼 혜초는 당시 당나라 밀교 계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바로 이듬해 입적했으니 혜초의 나이 77세였다.
혜초가 장안에 있는 대흥선사에 있을 70세 무렵이었다. 지귀라는 신라 유학승이 혜초가 주관하는 밀교 의식에 참석했다. 의식이 끝난 후 지귀가 혜초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대사께서는 신라에 언제쯤 돌아가실 건가요?” 혜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젊은 지귀를 굽어봤다. ‘돌아가면 어떻고 안 돌아가면 어떻겠느냐.’ 혜초의 침묵 속에서 그런 말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돌아오지 않겠구나 싶었던 지귀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문득 혜초가 생불로 여겨졌다.
그날 이후부터 지귀는 대답 대신 받았던 혜초의 묵음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겼다. 불교적 무상으로 생사고해를 초극하라는 듯한 혜초의 묵음. 그것은 혜초가 지귀와 나눈 선문답이면서도 지귀에게 준 화두였다.
몸과 마음이 다 타버릴 정도로 혜초의 묵음 화두에 몰두했던 시간이 지나간 후였다. 지귀에게 영안이 열렸다. ‘모든 것은 변한다. 실체라고 불리는 것도 없다. 포기하기를 두려워 말라. 원 가족적인 삶으로부터 유리되어야 이상적인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리니.’
혜초의 입적 소식으로 온 장안이 술렁이던 무렵이었다. 지귀가 유학 생활을 접은 것이 이때였다. 이제는 혜초가 전해준 화두만 지귀의 가슴에 쐐기처럼 박혔다. 그 박힌 쐐기가 마침내 지귀의 마음을 열어 득도한 바가 있었지만, 혜초를 위해 뭔가 할 일이 남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무얼 그리 꾸물대나. 가거라. 나를 따르지 말고.’ 마치 입적한 혜초가 살아 있는 지귀의 등을 떠미는 듯했다.
지귀가 신라로 귀국한 후였다. 혜초를 미리 봐 둔 열암곡 암벽에 새기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지귀는 그 옛날 대면했던 혜초의 모습을 떠올렸다. 얼굴은 길쭉했다. 그에 어울리게 두 귀의 귓밥이 목까지 닿을 만큼 축 늘어져 있었다. 터무니없이 큰 입은 조금 벌어져 웃는 인상을 주었지만, 눈매는 날카로운 데가 있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느낌을 받게 했다.
혜초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 싶지는 않았다. 성불로써의 영성스러운 느낌이 나도록 해야 했다. 지귀의 눈에는 혜초가 부처요 부처가 혜초로 보였다. 혜초의 형상은 결국 부처의 몸을 빌려와 입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부처를 송두리째 닮게 할 수는 없었다. 두 발만은 혜초의 발 그대로 두고 싶었다.
서 있는 불상이라면 발을 가지런히 한 예불형식이거나 선정에 드는 순간을 형상화한 것이 기본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두 발을 살짝 벌려 멀리 서역에서 걸어오는 혜초의 형상임을 암시했다. 결국 마애불의 두 발은 혜초의 숨겨진 이름표 역할을 하는 셈이 되고 말았다.
열암곡 마애불이 혜초로 밝혀지는 날에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부처에 대한 불경죄로 죽음과도 같은 파문을 당할 수도 있었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지만 지귀는 개의치 않았다. 인과 연의 법이 뚜렷한데 그 무엇이 두렵겠는가. 마애불을 우르러 오체두지하며 정진만 거듭했다.
열암곡 마애불은 하체에 비해 얼굴과 상체가 크게 발달해 있다. 비대칭으로 조각한 이유는 뭘까? 밑에서 올려 볼 때의 시각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지만, 믿기지 않았다. 왠지 탄생의 신비처럼 느껴졌다.
불두가 어미의 자궁에서 맨 처음 세상 밖으로 디미는 갓난아기의 커다란 머리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 첫울음 소리가 퍼져 나가 온 세상을 일깨우리라. 그 소리는 존재의 근원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한순간의 짧은 만남으로 혜초를 평생 사승으로 섬겼던 지귀는 마애불을 이처럼 다의적으로 해석하게 해 놓았다. 지귀에게는 혜초가 그만큼 숱한 영감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석불은 대개 앉거나 바로 서서 묵언으로 불법을 설한다. 누워서도 한다. 그런데 이 마애불은 엎드려서까지 귓속말로 조곤조곤 불법을 들려준다. ‘일체중생은 불성을 지녔느니라. 이 불성을 계발하면 그것이 바로 부처니, 해탈이 별것이 아니다. 무릇 생명 있는 존재라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존재 스스로가 부처인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니라.’ 땅 밑으로 나직이 마애불의 음성이 번져 나가면, 그 위로 나무가 자라고 새들이 지저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무나 새도 불성을 가진 것이지.
지귀가 대흥선사에서 혜초를 대면하기 몇 해 전이었다. 지귀는 혜초가 신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당시 장안에 회자하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여러 번 읽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혜초의 시 한 수가 실려 있었다.
…… ……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和答)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남방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鷄林)으로 날아가리
…… …… 日南無有雁 誰爲向林飛 (일남무유안 수위향립비)
고국으로 금의환향할 마음이 왜 없었겠나. 성불하겠다는 마음이 하도 간절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려 했다. 해탈을 향한 일념 외에 다른 마음이 없었다. 대신 누군가가 혜초 자신이 이룬 불법을 고국에 전해주었으면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 조국 신라를 위하는 길이며, 불법에 귀의한 자의 자세이기도 하리라 생각했다.
열암곡 마애불은 급경사면에 상체가 아래로 향한 채 엎드려 있었다. 그 모습은 낭떠어지 험한 길 같은 득도의 지난함을 형상화해 놓은 것은 아닌지. 때로는 엎어져 있는 모습이 좌절을 의미하는 형상처럼 보였다. 해탈의 기쁨에 휩싸여 펄펄 뛰다가, 문득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 서둘러 엎어버린 듯한 모양 또는 결국 흙으로 돌아감을 예시한 몸짓 같은.
코가 바닥에 거의 닿을듯했다. 16C 지진 이후 지금까지 오백여 년 동안 이러고 있었다니. 안타깝기도 했지만, 신비롭기도 했다. 번뇌 가득한 속세를 향해 꽃을 들어 보이시는가. 반달 닮은 반쪽 얼굴에 오뚝 선 콧날을 타고 흐르는 무념무상이 깊고 그윽했다.
뭇 시선이 엎어진 마애불의 틈새로 꼬깃꼬깃 몰려들었다. ‘전생의 업장을 멸하여주소서.’ ‘선정을 닦은 만큼만 소멸하느니라.’ 마애불은 모른 척 태연하게 엎드려 있지만, 설법을 안 한 날은 지금까지 단 하루도 없었다.
이 마애불이 혜초란 사실을 알 리 없는 사람들. 이국땅 당나라에서 생을 마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혜초의 고뇌를 짐작이나 할까. 그 고통을 발판 삼아 마침내 정각에 이르렀던 자초지종까지도.
혜초에 관한 세상의 무지는 지금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 옛날 16C 때도 그랬다. 그때 어느 해, 먹구름이 유달리 짙게 하늘을 가린 날이 있었다.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는 혜초의 육성. 뒤이어 벼락이 쳤다. 세상을 향해 내리는 혜초의 죽비 치는 소리였다.
세상을 향해 무주상 보시를 실천하라는 당부의 말을 시나브로 내려도 사람들은 세속의 이해관계에 더 정신을 팔았다. 나라에서는 숭유억불 정책을 공공연하게 펼쳤다. 혜초의 천둥, 벼락만으로는 이 땅에 더는 불교적 이상 세계를 구현할 수 없었다.
혜초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혜초는 큰 지진을 불러와 자신의 형상인 마애불을 거대한 지진의 소용돌이 속에 내팽개치고 말았다. 순간 하늘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열암곡 마애불이 병풍처럼 둘러선 바위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소리였다. 마애불의 순교의식은 그렇게 치러졌다.
사람들의 몰이해에 매몰된 마애불이지만, 진실이야 묻힐 리 없다. 마애불의 모습이 부처라기보다는 너무 인간적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혜초 생존 시기와 마애불 조성 시기가 일치하고 있다는 역사성도 의미심장하다. 왕오천축국전의 문맥을 짚어보면 혜초 자신만의 깊고 오묘한 불법을 완성했던 사실 역시 진실임을 알 수 있다.
석가모니가 정각을 이룬 부다가야의 대 보리사를 방문해 대탑을 보았을 그때였다. 혜초는 석가모니처럼 고집멸도의 이치를 곧 깨달아 묘리를 터득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환희심을 노래한 적이 있다.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하지 않는데, 어찌 녹야원을 멀다고 걱정하리오.’라며 득도의 순간을 실토하고 말았다. 이때를 전후해 깨달은 불법을 고국 신라에 전파하여 길이 보전케 하고 싶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왕오천축국전의 시작은 동부 인도 기행부터다. 혜초는 거기서 쿠시나가라라는 석가모니가 입멸한 곳을 견문하고, 다비장과 열반한 사원 등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동쪽으로 향하여 불교 역사상 최초의 사원이었던 죽림정사를 경배하고, 법화경의 설법지인 영축산을 방문한다. 그 남쪽으로 내려가서 석가모니가 대각을 이룬 부다가야를 참배하고, 대각사와 보리수 등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어서 서북쪽으로 가서 석가의 탄생지인 룸비니를 찾아간다. 진언을 외우고 불상을 마음에 두는 체험을 통해 쉽게 부처와 일체가 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얼핏 보면 코끼리 숫자나 세고, 각 나라의 기이한 풍습이나 기록한 여행기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 이면에는 이처럼 성불의 영감을 얻으려는 혜초의 치열한 몸부림이 관찰된다.
혜초는 구도승이다. 그 먼 인도까지 목숨 걸고 간 이유는 부처의 수행처를 직접 목격하고 부처의 불심 자체를 체화하기 위해서 간 것이다. 단지 잡다한 불교 경전을 수집하러 간 구법승은 아니었다. 왕오천축국전 어디에도 경전을 구했다는 내용이 없다.
열암곡 마애불의 당초 입불 위치를 점쳐보았다. 지금도 바위들이 엉키듯 있는 서남향 능선에 시선이 갔다. 능선에서 아래를 굽어보며 서 있는 마애불의 위상이 저절로 그려졌다. 일명 죽음의 문이라 불리는 사마라칸트 사막에서 걸어오는 혜초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모래벌판에서 앞서간 사람이 죽어서 남긴 해골을 이정표 삼아 길을 만들어 왔던 혜초. 그가 경주 남산에 와서야 비로소 마애불로 우뚝 섰다.
해가 뜨면 붉은 기운이 마애불을 감쌌을 터. 부처께서 성도하는 순간도 붉은 기운을 띤 새벽이라 했다. 이 마애불은 매일 새벽 그 장면을 연출하고도 남았을 것이니, 그윽한 숭고미가 온 신라에 퍼졌으리라. 지귀는 혜초를 그렇게 묘사해 놓았다.
당시 신라는 한마디로 불국토 자체였다. 불력을 빌어 나라를 통일까지 할 수 있었던 사회적 분위기가 그대로 법열로 이어졌다. 젊은 학승들은 중국으로 또는 까마득한 인도까지 앞다투어 유학의 길에 올랐다. 그들이 귀국해 남산을 기도처로 삼았다. 지귀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토록 모국 신라를 그리워했으면서도 갈 수 없었던 고뇌를 성불의 의지로 극복하려 했던 혜초. 그 마음에 이끌려 혜초를 마애불로 모시면서 스스로 타오르고 말았던 지귀. 그 인연의 끈이 마애불에서 매듭지어졌지만, 논리적으로 세세하게 설명하기는 벅차다. 차라리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불가사의하다고 말해두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이 마애불을 원래대로 입불하려는 노력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다. 혜초의 바램이 새롭게 이루어지려는가. 그렇다면 입불의 순간은 점안식이 될 터, 남산의 심장이 뛰고, 혜초의 시대가 다시 도래할 것이다. 몇천 년 만에 핀다는 우담바라 꽃이 피고, 서라벌 곳곳에 그 옛날의 법열이 되살아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