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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팔공산, 임진년의 기억 (2)

작성자최상근|작성시간26.06.09|조회수25 목록 댓글 0

  □ 4전란의 시작

 

 

피난은 내게 도망이 아니었다어쩌면 그저 남겨진 자로서의 체념이었을지도 모른다나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머리로는 대의를 되뇌고 있으면서어느새 피난 행렬에 있었다.

사람들의 말이 들렸다,

수성해야 한다끝까지 남아라!”

그 권고들이 내 귀에 따가운 회초리처럼 스며들었다틀리지 않은 말이라는 걸 알기에 더 아팠다.

나 자신을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조롱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명분을 알면서도 현실을 따르는 이 나약함나는 그 어정쩡한 자리에 걸려 떨고 있었다.

 

왜적의 기세는 거센 불길처럼 몰려왔다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더없이 급박했다나는 첩에게 서둘러 짐을 꾸리게 했다손이 떨리는지 보자기 매듭이 몇 번이고 풀어졌다.

연경서원으로 가자그곳이라면 아직 안전할 것이야.”

나으리병든 몸으로 길이 험할까 염려되어요.”

여러 소리 말게길이 끊기기 전에 떠나야 하네.”

집을 나서는 순간우리는 이미 피난민들의 흐름 속에 합류해 있었다울타리 너머로 보이던 마을이 더는 마을이 아니었다문짝이 열린 채로 버려진 집아이를 끌어안고 울음을 삼키는 여인지게에 노모를 모신 채 헐떡이며 내달리는 사내모든 풍경이 흩어진 인간사의 잔해 같았다.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군졸의 신호인지패잔병이 남긴 혼란인지 알 수 없었다다만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사람들의 걸음은 더 빨라지고 숨은 더 거칠어졌다.

저기까지만저기까지만 버티자.”

그 말은 첩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공포로 흔들리는 나 자신을 위한 다짐에 가까웠다지금 멈추면 모든 것이 끊어진다.

나는 발걸음을 서둘러 임연의 집으로 갔다그곳에 모인 집안 어른들을 두루 배알했다모두의 눈가엔 근심이 서려 있었다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전란 속이었다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솟을 듯했다.

대모님을 모시고 모두 연경서원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래야겠지여기는 안전하지 않네.”

우리 일행은 다시 서둘러 길을 나섰다짐수레에는 대모님을 태웠다나머지 식솔은 걸어서 뒤를 따랐다길은 숨이 막히도록 고요했다산비탈마다 들꽃이 젖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새 울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출발 이전에 나는 조상의 신주 묻어 두었던 곳을 다시 팠다흙을 헤치고 드러난 신주를 바라보았다가슴이 먹먹해졌다가문의 뿌리수백 년 이어온 혈맥의 상징이 지금 내 손에 들려 있었다이 난세에 그것마저 지켜내지 못한다면 어찌 얼굴을 들 수 있으랴황급히 상자에 담아 어깨에 멨다신주의 무게는 목숨보다 무거웠다어깨에 진 짐은 단순한 나무상자가 아니라 집안의 역사이자 혼백이었다.

살려면 살고죽으려면 죽는 거지요!”

제부諸父 중 어느 분이 앞에서 내뱉듯 중얼거렸다.

그 말도 사치지지금은 그마저 아무 뜻이 없어.”

제부 한 분이 말을 받았다.

피난은 말 그대로 단도직입적이었다뒤를 돌아볼 틈이 없었다살겠다고 발을 내디디면 살고숨을 고르다 멈추면 거기서 죽는 것이었다삶과 죽음은 경계조차 없었다그저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이었다.

평민천민하인들이 앞서 걸었다그 뒤를 유림의 무리가 이끌리듯 따랐다비틀거리는 노인아이를 업은 여인그리고 묵묵히 짐을 짊어진 사내들그 행렬은 조선의 눈물이었다.

어디로 가시오?”

살아야지요.”

묻는 말도 대답도 막막했다.

저녁 무렵노을이 팔거 너머로 번져갔다핏빛으로 번진 하늘이 각혈하듯 서쪽으로 스러졌다그 붉음이 들녘과 사람들의 얼굴을 한꺼번에 덮었다.

저기 저 불빛 같지저것도사람 목숨이야.”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멀리서 농가 하나가 불타고 있었다.

불이 꺼지면또 누가 살았는지 알겠지.”

어둠이 내리 덮이자적의의 그림자도 잠시 숨을 고르듯 멎었다그 정적은 결코 평화가 아니었다어둠 속에서도 왜적의 칼끝은 예리했다나는 그 예리함을 목덜미에서 먼저 느끼고 있었다.

친속들을 모시고 연경서원의 유학재로 몸을 옮겼다배움의 공간이었으나그날 밤 유학재는 피난민의 잠자리로 변해 있었다책과 강론이 있던 자리에 흐느낌과 두려움이 가득 찼다아이들은 어른 곁에서 잠들지 못했다노인들은 끊임없이 기침을 했다.

 

노복의 아이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다그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내 귀를 찢듯 파고들었다.

왜적이 이미 핍박하여 가까운 거리까지 이르렀소진장은 사방의 문을 열어 적을 맞았으나어떻게 된 지는 알 길이 없나이다불길만 하늘로 치솟았나이다.”

내 심장이 요동쳤다발이 저절로 서문 밖으로 달려가고 있었다동서남북 성문이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바람은 텅 빈 성안을 스치며 음산한 울음을 흩뿌렸다불길이 검붉은 연기를 토해냈다동헌과 객사군영과 무기고의 기둥과 서까래가 타들어 가며 비명을 질렀다그 거대한 불빛은 마치 나라의 숨줄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공물로 받은 곡식 창고인 공곡고公穀庫도 예외는 아니었다기근과 전쟁에 대비한 별도 창고인 진휼고賑恤庫에도 불이 붙었다왜란에 대비한다며 무기와 곡식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던 곳이었다정작 왜적이 들어오자 칼 한 자루 곡식 한 되 건지지 못하고한 줌의 재가 되었다.

이미 북문 밖은 참혹한 광경으로 변해 있었다관속들이 살던 초가집마다 화염이 치솟았다연기는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자욱했다.

성 안에는 병사도관리도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어제까지만 해도 분주히 오가던 거리짚신을 팔던 저잣거리아이들이 웃으며 달리던 골목이 순식간에 텅 비었다불꽃만이 살아 움직이며허물어진 성의 빈자리를 채웠다.

급히 말에 올라 미륵당으로 달려갔다그곳에서 별감 서응겸이 말을 탄 채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성을 지켜야 할 진장과 향청 좌수의 행방조차 알지 못한다고 했다전쟁의 순간지휘관이 자취를 감춘 성은 이미 성이 아니었다남겨진 자들은 길 잃은 짐승처럼 서로 방향도 모른 채 마구 뛰었다.

나는 서응겸과 함께 다시 연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말발굽이 흙먼지를 일으킬 때마다뒤에서 불길이 더 크게 치솟아 올랐다읍성이 우리를 밀어내는 듯했다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사람의 울음인지성이 무너져 내리는 신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어디로 몸을 숨겨야 한단 말인가이 불길 속에서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이며무엇을 두고 떠나야 한단 말인가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최초의 대구읍성은 부사 윤현이 선조宣祖 23(1590)에 선산군위인동仁同 등 3개 읍민을 징발하여 대구부민과 함께 축성이듬해에 완성했다비단 대구뿐만이 아니었다영천청도삼가三嘉성주부산동래진주안동상주좌우병영左右兵營 등 경상도 일원에 걸친 대역사大役事였다왜구의 침략을 우려해서 준비한 평지의 토성이었다. 1592년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1번대 18,725명은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파죽지세로 북상해 들어와 일주일 만인 4월 21일 대구읍성을 함락했다당시 대구읍성은 평지인 데다가 견고하지 못하였으므로 항거 불능이었다.

 

아침에 공산의 중턱 응봉에 올랐다어둠을 밀어내던 여명은 고요했다파잠에서 시작된 불꽃이 상동에 이르기까지 이어졌다그것이 거대한 불의 띠처럼 산과 들을 가르며 퍼져 나가고 있었다이미 왜적의 무리가 경내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다는 증거였다한낮의 햇살조차 불빛에 묻혀 희미했다들판은 연기로 자욱해 길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멀리 수성현에서도 불꽃은 맹렬했다불길은 지붕과 기둥을 삼키며 천지를 울리는 굉음을 냈다시커먼 연기는 허공을 밀어 올려 하늘마저 불태울 듯했다이윽고 그 불길이 읍내로 번졌다낮은 초가든높다란 기와집이든 구별 없이 붉은 혀에 휘말려 사라졌다.

내 몸은 살아 있으되마음은 이미 잿더미 속에 떨어진 듯했다살기가 읍성으로부터 뻗어왔다무겁고 차가운 기운이었다그 살기 위에 왜적의 발자국과 창끝이 실려 올 것이었다.

여태껏 인의예지를 논하고위기지학에 힘써 왔다그러나 지금 내 앞에 닥친 것은 수신의 논리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말로만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책에서 배운 바를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였다마음은 흔들리되 결심은 단단해야 했다사람들의 울음소리들판에 울려 퍼지는 곡성텅 빈 성곽의 적막이 내 가슴을 불태웠다나서지 않으면 그것은 비겁이리라.

지금껏 나는 군자의 도를 배우고 가르쳤다나 또한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다그러나 지금 내 앞에 닥친 상황은 의나 수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칼과 불울부짖음과 피비린내 앞에서도는 너무 멀리 있었다.

책을 덮을 때가 되었네.”

유생인 듯한 젊은이에게 내가 탄식하듯 말했다.

덮는다고요?”

지금은 몸으로 의를 지켜야 할 때일세.”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나 또한 마음이 흔들렸다그러나 결심은 확실했다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판을 가로질러 들려왔다곡성이 허공을 흔들었다.

예론을 펴고 음풍농월을 벗하던 날들이 불과 열흘 전이었다지금은 그 유희가 천길만길 멀어졌다.

다시 시회詩會를 열 날이 오겠지요?”

백성이 웃는 그날이 시회 아니겠나.”

나는 이미 마음속의 책장을 덮고 있었다.

 

노친을 비롯한 가속들을 모시고 어제 올랐던 응봉으로 향했다벗 채응홍 등과 함께였다돌길이라 가팔랐다숲은 어둑했다어둠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모두가 숨을 죽이고 행렬을 이어갔다.

채응홍이 앞장서 길을 살폈다한 걸음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위를 걷는 듯했다서로 기대어 나아가니비로소 길이 이어졌다마침내 응봉에 도착해 숲속에 몸을 숨겼다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슴을 조여왔다.

가문의 존속이란 것이 단지 집과 재산에 있지 않았다노친과 가속벗과 함께하는 데 있었다응봉의 나무와 바위가 우리를 감추어 주었다하늘이 내려준 은혜였다.

십여 명의 왜적이 팔거 도덕봉 고개를 넘어파계사 아래 골짜기로 스며들듯 내려왔다처음으로 마주친 왜적이었다생각보다 몸이 터무니없이 왜소했다장정 하나면 왜적 서넛은 거뜬히 해치울 만했다그들의 붉은 갑옷이 햇빛에 번들거렸다곳곳이 긁히고 진흙으로 얼룩져 있었다칼집 속 장검과 짧은 창이 삐죽이 드러났다허리춤에는 날붙이가 몇 개 달린 자루도 보였다신발은 진흙으로 흠뻑 젖어 발자국마다 땅을 울렸다.

나는 풀숲에 몸을 낮췄다숨이 목구멍에 걸린 듯 가빠졌다그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나무 사이로 비치는 얼굴에는 피로와 초조가 엉켜 있었다서로를 재촉하는 거친 손짓긴장으로 입술이 굳어 있었다그들은 승리자가 아니라패잔병 같았다.

앞서 나가던 한 왜적이 낮게 중얼거렸다알아들을 수 없었다억양과 손짓으로 보아무언가 불편한 이야기하는 듯했다그들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경계심과 두려움이 전해졌다.

코노 야마 와 후키츠 다.” (이 산은 불길하다.)

-료 노 노로이 가 아루 소-.” (스님들의 저주가 있다더라.)

다맛떼 오리요!.” (입 다물고 내려가!)

야츠라 가 오이카케떼 쿠루.” (놈들이 뒤쫓아 온다.)

나는 심장을 억누르며 풀잎에 등을 기댔다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그들의 시선이 잠시 풀숲을 스쳤다나를 발견할 듯 스산한 눈빛이 느껴졌다풀잎과 나무 그림자 속에서 나는 한 점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의 정적 끝에 그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진흙 섞인 갑옷 소리쇠날 부딪히는 소리가 골짜기를 채웠다공포와 피로가 뒤엉킨 그들의 존재가 이 산의 정적 속에서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들이 골짜기를 지나길 기다렸다다음 순간 어디로 움직일지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불확실함이 내 온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산길을 내려갔다멀어지는 발소리가 천천히 희미해졌다전란의 무서움이 비단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그들의 발걸음이 증언하고 있었다.

산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파계사 지붕 위로 연무가 엷게 피어오르고 있었다고요한 산사의 종소리가 멀리서 울려왔다죽음과 생존의 선을 긋는 것처럼.

그때 산허리를 울리는 대포 소리가 났다굉음은 천둥 같아 바위와 숲을 뒤흔들었다몸속 장기도 함께 딸려 나올 듯했다산중에 모여 있던 부모와 자식들이 앞다투어 숨을 곳을 찾아 달아났다피난 온 부녀자들은 초조한 손길로 풀잎을 잘랐다그것으로 햇볕을 가리고 몸을 은폐했다아비는 자식을 돌볼 겨를조차 없었다남편은 아내의 손을 놓아버렸다모두가 오직 자신을 가릴 한 뼘의 구석을 찾을 뿐이었다.

 

이튿날 북봉으로 몸을 피해 올랐다해가 저물 무렵 다시 도로 돌아왔다.

서고동채준남 등이 응봉동 동네 앞 당산나무 어귀를 지나던 때였다멀리서 흙먼지가 가볍게 피어올랐다곧바로 세 사내가 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모두 허름한 왜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왜적이 이미 산과 들을 넘어 민가 어귀까지 스며든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터였다일행은 숨을 삼킨 채 걸음을 멈추었다.

채준남이 활을 겨누었다화살이 날기도 전에 세 사내는 무릎을 꿇으며 무너져 내렸다두 팔을 모아 앞에 올렸다머리를 깊숙이 숙여 스스로 항복의 뜻을 드러냈다말은 했으나 무슨 말인지 또렷이 들리지 않았다겁먹은 농부에 가까웠다왜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누군가 저들이 정탐하러 온 왜종일지 모른다고 말했다군중은 삽시간에 들끓었다돌과 몽둥이가 마구 휘둘러졌다세 사내는 변명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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