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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팔공산, 임진년의 기억 (3)

작성자최상근|작성시간26.06.10|조회수22 목록 댓글 0


뒤늦게 그들이 용덕리 배감관의 하급 노복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왜적의 옷차림은 버려진 옷을 걸친 것뿐이라 했다이 말을 들은 이들도 이미 자신들의 손으로 일을 저질러 놓은 뒤였다그들은 피란길에서 되돌아온 이들까지 합류한 군중들이었다겁과 분노며칠째 이어진 피난과 약탈의 소문이 한데 엉켜 모두의 이성이 덮인 상태였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사람들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죄책감말할 수 없는 혼란이 엇갈려 있었다.
사람들은 전쟁 이전부터 가혹한 부역에 시달렸다재빠르게 왜적에 투항한 사람들이 많았다왜적의 상당 부분이 조선 사람들이라 했다이들이 적의 향도 노릇하며 돌아다녔다고을 사람들에게 낯이 익은 자들은 종이로 얼굴을 가렸다적도가 된 사람들에게도 신변 보호가 필요했다사람 중에 누가 왜적인지 알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그들은 이름도 모르고 먹는 떡에 체해서 죽는 줄 모르는 듯했다.
소문이 돌아다녔다.
부사께서 병영을 버리고 동화사로 몸을 옮겼다지?”
관아의 관리들은 염불암으로 들어갔대.”
고을을 지키고백성을 돌봐야 할 부사께서 먼저 성을 등지고 도망쳤다니!”
우리 같은 사람만 남았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부사께서는 처음부터 임시 병영을 동화사로 내정했던 것인가멀리서 우는 학의 울음소리산중의 정적모든 것이 지금 우리의 처지를 비웃는 듯했다.
전란 앞에서 사대부의 글과 말은 무력했다성문은 지켜내지 못했다한 가지 다짐만큼은 흐려지지 않았다. ‘물러서지 않겠다.’ 방책은 마련하지 못했다허리만 곧추세웠다.
동화사와 염불암은 수행과 염불의 산문이지만무력한 권력자들의 은신처로 변해 있었다경내에 울려 퍼졌을 목탁 소리와 범종 소리가 도망친 이들의 가쁜 숨을 위로해 주었을까산중의 고요가 그들의 두려움을 감추는 장막이 되었을지도.


대구부사 윤현은 경상좌병사 이각의 명령에 따라 4월 15일 울산 좌병영을 향해 군대를 이끌고 출전했다그러나 이각이 도주해 버렸다결국 싸워보지도 못하고 4월 24일 하릴없이 대구로 퇴각했다읍성은 이미 고니시 휘하 병력이 점령한 뒤였다일본군은 대략 1,600명가량을 대구성에 주둔시키고 곧장 더 북쪽을 향해 진군했다.
대구가 적의 수중에 들어간 이상 부사는 읍성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궁여지책으로 그는 팔공산 동쪽 기슭의 동화사로 들어가그곳을 임시 관군 본영으로 삼았다대구부의 관리들과 속관들 또한 산내 암자인 염불암 등지로 흩어져 몸을 피했다.


나는 동화사로 올라가 숙부를 모시고 부사에게 나아가 배알했다몸은 피폐했으나 예를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사는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초췌한 얼굴이었다눈빛만큼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으리상한 데는 없는지요.”
나는 억울하고 분한 기운을 억눌렀다.
서 공지금 그대가 오며 본 것들이 곧 이 나라의 형편일세.”
군사가 흩어지고 백성들이 산으로 몰리니고을의 문이 비어버렸소이다.”
패한 것이 아니오잠시 흩어진 것이니.”
부사께서는 한숨 같은 숨을 길게 들이켰다.
이각 병사兵使가 도주한 탓에 우리는 발을 붙일 땅을 잃었네.”
싸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싸울 자리를 빼앗긴 것일 테지요.”
나 역시 읍성으로 돌아갈 수 없었네왜적이 먼저 깃발을 꽂아버렸으니.”
이제 우리의 방도는 무엇이옵니까?”
동화사는 일시적인 거처일 뿐이네우리는 다시 군을 모아야 하오.”
성을 잃으니 마음까지 잃을까 두렵나이다.”
흩어진 장정들을 불러 모아야 하오식량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걱정이구려.”
그의 말투는 단정했다현실의 무게가 느껴졌다.
관군이라 하나지금 수십 명에 지나지 않소.”
산에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나이다.”
그들이 곧 병력이고희망일 것이지만 내 손에는 없네.”
그는 잠시 대화를 멈추고 내 손등을 바라보았다.
두려움이 지나가면 결심이 남지 않겠소?”
부사 나리미약하나마 저 또한 남은 힘을 다하겠나이다.”
그래주시오오늘부터 공은 이곳 동화사 본진의 눈과 귀가 되시오
왜적의 움직임을 살피고산 아래 사람들의 처지를 전해 올리겠나이다.”
작은 일이라도 공이 전하면그것이 장차 큰 물줄기를 이룰 것이오.”
그 말은 명령이었지만어딘가 위안처럼 들렸다.
기필코 따르겠나이다.”
살아서 따르시오!”
죽음으로 의를 이루려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소우리는 의를 세워야 하니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소.”
동화사 법당의 종소리가 멀리서 울려왔다허물어진 고을과 잿빛 흙바람 속에서도다시 모으려는 작은 의지들이 퍼져가는 듯했다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떠올랐다.
노배들이 우마를 몰고 대구읍성 근처인 우리 집으로 가 양식을 가져오다가모든 짐을 빼앗기고 말았다불시에 왜적을 만났기 때문이다우리 손에는 곡식 한 줌 남지 않았다함께 나선 사람들은 허탈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앞날은 끝내 알 수 없는 안개 속에 묻혔다.
밀양 부사였던 박진이 피신 중에 죽패를 차고 있는 무리를 만났다고 했다.
죽패라니그게 무슨 패란 말인가?”
왜적에게 항복한 자들이 받는 표식이라오.”
무슨 이득을 얻는가?”
약탈을 면한답니다.”
왜적과 한편이 된다는 거요?”
그러나이다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글귀가 있사옵니다. ‘군현의 백성들은 속히 옛집으로 돌아가라남자는 모를 심고 보리를 거두고여자는 누에를 치고 실을 뽑아라각각 자기 집 일에만 힘쓰라만약 우리 군사가 법을 어기면 반드시 처벌한다— 평의지.’ 이렇게 서명까지 되어 있었다 하오.”
왜적들이 백성을 다스리는 척하며 나라를 농락하는구나.”
그 패를 받은 자들이 부지기수라 합니다.”
그걸 목에 걸면 왜적의 진영도 드나들 수 있다네요.”
기가 막혔다살기 위해 무릎을 꿇다니그 무릎 다시 펴는 날이 오겠는가.
백여 명에 이르는 식솔들이 함께 움직였다집안의 노인과 어린아이부녀와 종들이 한데 섞여 있었다누구도 고향에 남을 수 없었다.
사람이 많은 만큼 곡식은 빠르게 줄어들었다어느새 양식은 동이 났다남은 것은 들풀뿐이었다.
고을의 좌수 유화숙을 찾아갔다그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요청을 받고 있을 것인가내 곤궁한 처지가 죄스러웠다유 좌수는 굳이 내 말을 다 듣지 않아도 짐작하고 있었다.
서 공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오나 역시 사방에서 밀려드는 요청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소하지만 공의 처지를 듣고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소.”
그는 머슴을 시켜 창고 구석에 남은 곡식을 뒤지게 했다이윽고 자루 몇 개가 끌려 나왔다보리쌀이었다오래 묵은 데다벌레가 파먹은 흔적이 역력했다.
이 몸이 넉넉지 못해 이토록 묵은 양식을 내어 드리오그래도 여섯 섬 정도는 될 듯하니부디 허기를 면하는 데 쓰시오.”
굶주림이 코앞인 우리 식솔들에게는 그것만도 감지덕지였다평생 학문을 닦으며 나라에 이바지하고자 했건만곡식 한 줌에 기뻐하고 슬퍼하는 범부의 처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왜적이 인근까지 다가왔다는 소문이 돌았다나는 곧바로 연경서원의 북동쪽공산의 품속 깊이 자리한 내동으로 이동했다그곳은 산세가 험해 외부의 눈길이 쉽게 닿지 않았다.


적의 기세는 날로 사납게 번져갔으나기이하게도 읍내와의 소문 줄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피난에 지친 이들이 헐떡이며 들고 온 말혹은 한밤중을 틈타 목숨을 걸고 성을 빠져나온 자들이 떨리는 입술로 전한 소식이 간헐적으로 이어졌다그들의 눈빛에는 아직 말로 옮기지 못한 것들이 수두룩했다.
성안에서는 칼과 창이 무자비하게 휘둘러졌다고 했다골목마다 죽은 이들이 쓰러져 서로의 몸을 베개 삼듯 겹겹이 쌓여 있었다시냇물은 피로 물들어 흐름이 더뎠다성루 아래에는 살점이 떨어져 파리 떼가 들끓었다고 했다.
말끝마다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사흘 전 아침이었소왜적이 성문을 부수고 들어왔소처음엔 함성만 들렸지요곧 사람들의 비명이 뒤엉켰소마치 짐승 우리를 부수고 미친개들이 튀어나온 것만 같았소.”
나는 장터 골목 뒤편에 숨어 있었소한 무리의 왜적이 골목으로 몰려왔소그들이 칼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지요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지금도 귓가를 떠나질 않소그 뒤엔 바로.”
백성들이 도망치다가 쓰러졌소넘어지면 그대로 끝이었지요왜적 하나가 쓰러진 사람을 발로 걷어찼는데곧이어 칼을 내려쳤소짚단을 자르듯망설임이 없었소.”
젊은 여인이 품에 아이를 안고 있었소살려달라고 애원하더이다칼날이 번쩍이더니 여인은 그대로 쓰러졌다오품에서 떨어진 아이만 까르르 울며 바닥을 기었소더는 볼 수 없었소.”
왜적들이 집마다 문짝을 걷어차고는 횃불을 던졌지요불길이 번지면서안에 있던 사람들이 기침하며 나오면기다렸다는 듯 칼로 내리쳤소피 냄새와 연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오.”
그날 이후로 귀가 멀어버린 것 같소살려달라는 소리울음비명… 모든 게 한데 섞여 웅웅거리오.”
성안에서는 아직도 살아남은 이들을 찾아 끌고 다닌다고 하오숨어 있는 이가 있으면 벽을 부수고천장을 뜯어냈다오마침내 찾아내면 웃으며 칼을 내리쳤다오누구 칼이 잘 드는지 시합하는 듯했소.”
그곳에 남아 있는 이들은 목숨을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오.”
서덕희가 죽임을 당했다는 전언은 내 숨을 거칠게 흔들었다평소 함께 글을 논하고 의를 말하던 벗이었다도의로 맺은 서약도 있었다전란의 소용돌이가 더는 바깥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었다마치 죽음의 서슬이 내 목덜미까지 다가와 냉기 어린 손을 얹은 듯했다.
왜적에게 조선은 생소한 땅이다산천도 낯설고풍속도 다르다여기에 온 까닭조차 모르지 않는가적개심을 품을 이유가 없다원한을 맺은 바도 없다그럼에도 그들은 마을을 훑으며 칼춤을 추었다불을 지르고울부짖는 사람들의 배를 갈랐다도대체 저자들은 무엇을 원한단 말인가살기만 걷잡을 수 없이 흘러넘쳤다.
그들은 벌레 떼처럼 몰려다녔다분별이 있을 리가 없었다그저 무너뜨릴 수 있으니 무너뜨리는 것뿐이었다무너지는 것은 집만이 아니었다문턱에 남아 있던 체온마루에 스며든 숨결어제까지 이어지던 말들의 끝자락까지 함께 짓밟았다생각은 뒤따르지 않았다생각이 닿기 전에 이미 칼이 내려갔고불이 번졌으며울음은 끊겼다.
저놈들은 사람의 말을 쓰지도 않나이다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듭니다말이 통할 리 없지요눈빛을 보면그저 미쳐 있는 거나 다름없나이다.”
피난민의 진술은 끊어질 듯 이어졌다그들의 살기는 충도 아니고의도 아니었다도리와 인륜을 아는 인간의 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저 독충들.’ 그 생각이 지나치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오히려 공포와 분노를 담기에는 너무도 약한 비유였다이 땅에 들끓는 독충을 쓸어버리지 않고는누가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그 절박한 자각이야말로 우리의 마지막 이성이었다.


피난처를 부인사로 옮기려던 계획은 결국 접어야 했다산길마다 왜적이 다니며 해를 끼쳤다나설 수 있는 길이란 어디에도 없었다사람들은 저마다 목숨을 부지하려 숲속으로 숨어들었다그늘에 엎드린 얼굴은 서로 알아볼 수도 없었다. ‘왜적의 끄나풀이 아닐까.’ 사람이 사람을 의심했다이웃이 이웃을 잃어버렸다울창한 숲은 두려움에 잠긴 사람들이 머무는 동굴이었다.
숲과 계곡은 은신처이면서 고립의 공간이었다한 사람도 용기를 내어 왜적을 향하지 못했다모두의 발걸음이 달랐다나는 깊은 애통과 부끄러움에 젖었다나라가 기울고 고을이 무너져도 손 놓고 있었다그 사실이 칼날보다 더 아프게 내 가슴을 찔렀다.
들려온 소식은 더욱 참담했다고을의 창고에는 이미 곡식이 남아 있지 않았다어떻게 내일을 버티겠는가왜적의 칼끝만이 아니었다배고픔의 그림자가 더 큰 재앙으로 다가왔다.
읍성 안에서 건어물을 팔던 배지수가 다가왔다.
나으리나라님은 씨방 뭐 하고 있을까요?”
잠시 이 왜란을 학이시습하시는 중일 것이네.”
어느 천년에 끝내실는지요백성들이 다 죽어가는 판에.”
자네부터 팔 걷고 나서게도망 다니며 살 궁리만 하지 말고.”
나으리께서는 씨방 붓으로만 싸우시지요?”
이 자가 .’
내가 병기를 몸으로 익힌 바는 없다하지만 내 어찌 시들시들 살면서 이불 속에서 명줄을 놓겠는가필부의 뜻만은 빼앗을 수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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