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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전란의 시작
아침이 밝자 식솔들은 서둘러 밥을 지어 먹었다. 마당에는 이미 장정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내동도 불안해 동편 어실곡으로 들어갈 참이었다.
“대모님을 모셔라!”
작은 가마가 마당으로 옮겨졌다. 대모께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늙은이가 짐만 되는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대모님.”
협곡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러 친족이 줄줄이 따라나섰다.
이튿날이었다. 나는 부인리로 가서 진평을 찾았다.
“진 공, 집 한 채만 부탁하네. 식솔들이 많아 갈 곳이 없네.”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큰 집이 하나 비어 있소. 어서 사람들을 불러들이시오.”
높은 봉우리로 올라 아래를 살폈다. 검단리 쪽까지 연기불이 줄지어 번졌다. 숨을 곳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어실곡으로 돌아와 즉시 숙부님들에게 알렸다.
“숨을 곳을 마련했사오니, 지체하지 마시옵소서.”
나는 대모님을 등에 업고 또다시 길을 나섰다. 노구의 몸은 가벼웠다. 내 어깨는 천근만근 무거웠다. 뒤이어 가속들이 재를 넘어 진평의 집으로 들어섰다. 짐을 부여잡은 손들이 떨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첩을 옮겨야 했다. 병든 몸이라 스스로 걸을 수 없었다. 노복 개석이 첩을 업고 힘겹게 따라왔다.
“근심 마옵소서. 소인이 끝까지 모실 터이오니.”
개석의 이마에는 땀이 줄줄 흘렀다. 이 길은 비탈져서 험했다.
계부의 가속은 가장 뒤처져 재를 넘지 못했다. 짐바리 또한 다 옮기지 못한 채 산허리에 남아 있었다. 나는 산봉우리 위를 서성였다. 발 아래 안개가 흩날렸다.
“항아! 짐바리를 옮겨라! 서둘러라!”
나는 산허리를 향해 계부와 함께 있는 종제에게 소리쳤다. 멀리서 희미한 대답이 들려왔다.
불길한 소문이 퍼졌다.
“왜적 두세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오!”
헐레벌떡 달려온 친족이 소리쳤다.
“뭐라 했느냐! 벌써 숲 안까지 들어왔다고?”
그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골짜기에 피해가 났다는 말이 여기저기 돌고 있습니다. 왜적이 숲속에 숨어 있다고도 하나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산길에 남은 짐과 사람들 모두 위험했다.
“항아! 항아! 어서 짐을 버리고 올라오너라! 늦으면 모두 잡힌다!”
메아리가 된 내 목소리가 골짜기에 울렸다. 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 숲속에서는 바람에 휘청이는 나뭇가지 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손에 땀이 배어 바짓가랑이를 움켜쥐었다. 숲속 어딘가에서 사람 그림자가 흔들리듯 지나갔다. 적인지, 우리 사람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종제 서사건이 숙모를 모시고 오는 길로 내려갔다가 알려주었다. 항아는 이미 골짜기를 벗어나 재를 넘었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놓였다. 나는 울면서 재를 넘었다.
왜적을 피하는 사람들이 황황하게 산으로 올라왔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밤에 비가 왔다.
계속 비가 왔다. 내동으로 피난 온 사람들은 기력이 떨어져 마을에 머물렀다. 나는 위태롭게 여겨 대모님을 모시고 나왔다. 여러 숙부가 따라왔다. 계부는 또 뒤처져 출발하지 않았다. 일행이 진흙을 튀기며 간신히 옮겨 견불암에 투숙했다. 부장 홍응삼이 일찍부터 머무르고 있었다.
경첩 또한 병든 몸을 이끌고 피란길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몸조차 가누기 힘든 처지에 어둠 속 산길을 얼마나 더딘 걸음으로 올라왔을지. 나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지만, 곧바로 노배 하나를 불러 등불을 쥐여 주며 말했다.
“지금 당장 내려가라. 병든 첩과 계부 일행을 어디서든 찾아 모셔 오너라. 길이 험해도 절대로 놓치지 말라.”
한밤중 무렵, 멀리서 희미한 등불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며 다가왔다. 노배와 함께 첩과 계부의 가솔이 흙과 물에 뒤범벅된 모습으로 오르고 있었다. 촉촉한 숨결만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인간의 연은 실처럼 가늘었다.
오늘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는 불안. 그 두 감정이 동시에 우리 가슴에 스며들었다.
이튿날, 뒤에 남았던 이가 허둥지둥 달려와 알렸다.
“왜적이 내동으로부터 부인리까지 들이닥쳤나이다! 숨 돌릴 틈이 없사옵니다!”
사방에서 북새통 같은 아우성이 터졌다. 이상문과 채명서 등은 급하게 사람들을 모았다.
“장정들은 모두 활을 잡아라! 한 줌의 기력이라도 짜내어 막아야 하느니라!”
장정들이 떨리는 손으로 시위를 당겼다. 왜적의 기세가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쇳빛 갑옷이 햇빛을 받아 번쩍이며 숲 어귀를 뒤덮었다. 피비린내가 바람보다 먼저 밀려왔다. 창끝이 숲을 긁는 소리만 들려도 간담이 털썩 내려앉았다.
“더는 못 막겠소! 물러서오!”
“뒤로! 뒤로!”
누구랄 것도 없이 발이 풀린 듯 달아났다. 사람들은 숨이 턱에 차도록 뛰었다. 왜적은 짐승 같은 기세로 견불암 뒤 숲까지 바싹 추격해 왔다. 짙은 그늘 사이로 칼날이 간간이 드러났다. 잠시만 늦어도 등짝이 베일 듯했다.
땅은 진흙처럼 미끄러지고, 숨은 목구멍에서 씻겨 나갈 듯 가빴다. 뒤를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돌아보는 순간 곧 죽음이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바람이 급히 달아나는 사람들 뒤를 밀어붙였다.
마을은 이미 무너져가는 소리로 가득했다. 누구도 안전한 이는 없었다. 무엇 하나 붙잡고 설 자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목숨의 털끝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채명서는 말 두 필을 잃었다. 적이 들이닥친 순간, 말이 놀라 뛰어 달아났다. 그는 숲에 홀로 남겨졌다. 계속해서 비가 왔다. 젖은 겉옷을 움켜쥐고 몸을 숨겼다. 어둠 속에서 말발굽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같은 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 죽음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기다렸다.
채성중 부자父子의 상황은 더 다급했다. 그들은 각기 흩어져 달아나다가 각각 아내를 잃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도망치기 위해 급히 몸을 날리다 보니 옷자락은 찢기고, 바지마저 벗겨졌다. 결국 아버지도 아들도 벌거벗은 몸으로 숲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가까이서 들리는 발소리에 서로의 입을 틀어막으며 숨죽였다.
그들이 숲속에서 본 것은 하늘도 땅도 아니었다. 그저 캄캄한 생존의 한 귀퉁이였다.
□ 5월. 참혹한 현실
5월로 접어들자, 왜적의 기세가 더욱 극성을 부렸다. 이제는 산골짜기마다 병화가 들끓었다. 숲의 바람마저 불덩이를 싣고 다녔다.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던 자리에도 연기가 자욱하여 숨이 막혔다. 골짜기를 채운 불은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원혼의 행렬 같았다. 뜨거운 재는 바람을 타고 흩날려 얼굴과 옷에 달라붙었다. 가축의 울음과 사람의 곡성이 뒤엉켰다.
이 땅이 피난처가 아님을 절감했다. 불꽃은 나라와 고을을 집어삼키는 전란의 입김이었다. 산과 강마저도 피할 수 없었다.
“나으리, 난세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꿈에서 젊은 유생이 나타나 내게 물었다. 그의 눈은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말하는 중에도 눈이 감겼다.
“군자는 의를 으뜸으로 삼는다는 선현의 말씀을 기억하게.”
“지금 상황에서 그 말씀이 유효한가요?”
“상황 따라 달라진다면 진리가 될 수 없지. 지금의 이 의義 없는 싸움은 도적질이니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분노나 탐욕으로 창칼을 들지 말게. 모름지기 의를 세워 앞으로 나가게.”
“의를 앞세우면 이길까요?”
“그대와 나는 피난민일 뿐이다. 명분도, 병력도 없다. 그렇지만 승리보다 의를 먼저 세워야 한다.”
“이기지 못하는 의도 의라고 하는지요?”
“의가 있으면 도는 살아 있다. 도가 살아 있는 한 다시 일어설 때가 있느니라.”
‘지자는 미혹하지 않고, 인자는 근심하지 않으며, 용자勇者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인가. 미혹은 가득하고, 근심은 끝이 없어 두려움이 날마다 자란다. 그 모든 것 속에서도 한 줄기 의가 나를 지탱했으면 싶었다.
암자에 모여 앉아 빗소리를 듣고 있던 때였다. 조정의 소식을 들었다. 북쪽에서 온 피난민을 통해서였다.
“신 장군께서 충주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답니다. 병세兵勢가 엇갈려 부득이 양산으로 물러갔답니다.”
한 유림이 말을 받았다.
“그건 허명일 수도 있소. 충주에서 싸움이 워낙 치열했다 하니, 패한 뒤를 덮으려 한 말일지도 모르오.”
곁에 있던 사람이 끼어들었다.
“허명이라 해도 믿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지. 장수 하나라도 버텨주어야 백성이 숨을 고를 수 있지 않겠소.”
전란의 소식은 늘 이렇게 모호하게 찾아왔다. 누군가는 승전이라 하고, 누군가는 패전이라 했다. 확실한 건 단 하나. 산천이 이미 두려움에 젖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김륵을 우도의 안집사, 김성일을 초유사로 삼았다고 했다. 숙부 한 분이 낮게 중얼거렸다.
“조정이 드디어 뜻을 세운 것이로구나. 경상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는.”
“그를 불러 초유사를 맡겼다면…, 조정이 정신을 차린 셈이지.”
곁에 있던 또 다른 친척은 고개를 저었다.
“적의 기세가 날로 강성한데, 이제야 사람을 세우니….”
빗방울이 줄기차게 견불암 처마를 두드렸다. 그것이 음울한 공기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동화사 서편에 인접한 정각암으로 피했다. 돌층계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초여름 기운을 품고 있었다. 공기는 한결 무거웠다. 산 아래 마을로 피란 행렬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말도 없이 서로의 얼굴만 훔쳐보며 모여들었다.
암자의 동대 난간에 누군가 홀로 서 있었다. 누더기까지는 아니지만, 먼 길을 걸은 흔적이 역력한 옷차림. 이경임이었다. 나보다 세 살 아래였으나 시문에 밝고, 글씨 또한 단아하여 일찍부터 이름이 나 있던 사림이었다.
그도 나를 알아보고, 미간의 어둠을 걷어냈다.
“서공을 이런 곳에서 뵐 줄이야….”
“그대 얼굴을 보니 새삼 마음이 진정되는구려. 언제 이곳까지 온 것인가?”
“대구부로 향했다가 적이 청도로 들었다는 말을 듣고… 이리 북쪽 산길로 비켰소.”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배어 있었다. 말을 잇는 사이에도 큰 숨을 몰아쉬었다. 우리가 모두 얼마나 벼랑 끝에 몰려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혹 조정의 소식은 들었는가?”
“어제저녁에 내려온 피란민 중 한 사람이 말하길, 평양이 위태롭다는 말이 떠돈다 하였소. 허나 사실인지 분간할 길이 없구려. 전령이 다 끊겨, 남도에서도 무슨 변고가 일어났는지 알 수 없소이다.”
그는 허리춤에서 돌돌 말린 종이를 꺼냈다. 몇 줄의 급하게 적은 글과 그 아래 난잡한 도로 지도가 보였다. 그가 손가락으로 선 하나를 짚었다.
“여기, 길목이 완전히 막혔다 하오. 상주에서 패했다는 말도 들었는데…”
나는 그 지도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손때 묻은 종이의 구겨진 자국들이 그의 지난 며칠을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대도 피란인가, 아니면 누구와 합류하려는 것인가?”
“피란이라기보다, 살아남기 위한 임시 숨구멍을 찾는 중이라 해야겠지요.”
말은 아꼈으나 그가 뜻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각암은 동화사 인근이고 동화사에는 부사가 전시행정을 펴고 있다.
“일가를 어디에 모셨는가.”
“험한 산중을 헤매는 중입니다. 공은 가족을 무사히 모셨나이까?”
“간신히.”
그 한마디에 그간의 밤길, 피난 행렬에서의 혼란, 병약한 사람들을 찾아 헤매던 기억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서로 소식을 나누면서 지내지요. 지금 같을 때는…, 말 한마디가 길을 바꿔놓기도 하니.”
멀리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산벼랑 사이로 끊임없이 흰 연기 같은 안개가 오르고, 그 위로 독수리 한 마리가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경임! 이 난리가 끝나면 우리가 다시 펴놓을 문장은 어떤 색깔을 띠고 있을까.”
“우리가 쓰는 글은 이전과는 다른 성정의 것이 될 것이오. 글은 이제 허명을 버리고, 살아 있는 혼의 기록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이까.”
그날 바람은 차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잠시나마 혼란의 시대 속에서 암묵적으로 뜻을 같이했다. 인간이 지켜야 할 마음의 중심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정각암은 이름만 암자였다. 실상은 바위 아래 움막에 지나지 않았다. 돌벽에 등을 기대고 누웠다. 바람이 살을 파고들었다. 그 차가움이 곧 나의 이불이었다. 밤이면 별빛이 돌벽에 박혀 있었다. 그것은 위안이면서도,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적의 그림자를 더 선명하게 떠올리게 했다.
아침마다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산짐승의 울음소리였다. 멀리서 꿩이 날아올랐다. 토끼가 풀숲을 헤치고 달아났다. 그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짐승조차 제 집을 지니고 살거늘. 나는 조상의 신주와 몇 점의 살림을 부여잡은 채 떠도는 나그네에 불과했다.
발 딛는 자리가 집이 되었다. 다시 그 집을 버리고 또 다른 자리를 찾아 나서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어제의 거처가 오늘은 불길에 휩싸였다. 오늘의 거처가 내일은 적의 발자취에 더럽혀졌다. 나는 겨우 돌벽 하나에 등을 기대며 살아 있음을 확인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