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월. 참혹한 현실 “이분은 서울에서 내려온 고등지라 하오. 직접 본 전황을 상세히 아뢸 것이오.” 부사께서는 피곤한 기색이었다. 이런저런 격문으로 대충 전황을 파악하고 있던 참이었다. 고등지가 한양이 무너진 뒤의 상황을 말하는 순간 부사의 눈빛이 번쩍였다. 조정이 어느 고을까지 올라갔는지, 인근 의주 방면에서 군무가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지, 평양성 함락과 장수들의 패전 소문까지. 남쪽에서는 들을 수 없는 근접 정보였다. 한참의 보고가 끝난 뒤, 나는 그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밥상을 차리고 그를 앉혔다. 쇠약한 몸으로 젓가락을 드는 모습이 측은했다. 내가 국을 떠 주었다. “목숨이 남아 있는 것이 그저 기적이오…. 낙재 공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몰랐을 것이오.” “그대가 전한 말이 곧 나라의 등불이 되었소. 어려운 길을 살아 도착한 것만으로 이미 큰 공이오.” 오늘 들은 말들이 머릿속으로 파도처럼 반복해서 밀려 들어왔다. 서울의 함락, 조정의 피란, 백성의 참상…. 모든 것이 이미 우리의 목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의병을 일으키려는 내 결심은 오늘로써 더욱 굳어졌다. 숙부들이 내려왔다. 떨리는 음성이 방 안의 공기를 멈춰 세웠다. “이제는… 어찌해도 어렵겠구나.” 그날 오후, 모두가 자리에 앉아 첩을 문병 겸 영결했다. 나는 감히 눈을 들지 못했다. 숨이 붙어 있는 사람 앞에서, 이미 이별을 예감하는 자의 심정은 참혹했다. 잠시 후 내동 쪽에서 급보가 날아왔다. “왜적이 접근 중이라 하옵니다!” 나는 더는 머물 수 없었다. 불운암의 처마 끝에 걸린 바람이 깃발처럼 흔들렸다. 고등지의 말을 떠올렸다. 선조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평양으로 향한 일,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갈 생각까지 신하들에게 밝힌 일과 왜적이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있다는 이야기…. 마음 한편에 오래 눌러 놓았던 무게가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라가 무너지기 직전이다. 왕조의 심장부가 텅 비었다. 그 무너짐의 공백이 의병이 일어설 자리다. 고등지는, 정황으로 보건대 계속 남쪽으로 혹은 의병장들이 모일 만한 고을로 소식을 전하러 갔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지도자의 명을 받지 않고스스로 움직였다. 숨은 인재를 찾아 그들에게 나라를 맞길 참이었다. 그들이야말로 지방과 지방을 잇는 생명줄이었다. 오늘 아침, 전언 하나가 들어왔다. 학봉 김성일 공이 바야흐로 한양을 회복할 기세가 있다고 했다고 한다. 이미 왜군이 도성에 들어간 지 스무날이 넘었다. 전령은 끊어졌으며, 왕조차 북으로 밀려 올라가던 때였다. 하루가 멀다고 패전 소식만 들려오던 이 남쪽 끝에서, ‘회복’이라는 두 글자는 마치 먼 산 위로 스치는 새 그림자처럼 와 닫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말 한 줄이 가슴 속에서 살아났다. 나는 그것이 적확한 소식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허위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바람이 와전되어 부풀려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그 소식을 밀어내지 못했다. 더 정확히는 밀어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마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묘했다. 절망이 깊어질수록 허튼 말일지라도 희망의 빛을 찾으려 했다. 학봉 공께서는 경상우도의 군민을 규합하는 중책을 맡았다. 전시 상황이라 사실상 좌도도 통괄했다. 그분의 말 한마디가 수천 명의 숨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아마 그분도 지금의 암흑을 뚫고자 희망을 말해야만 했을 것이다. 희망 없는 군사는 흩어지기 마련이다. 흩어진 민심에는 의병이 모이지 않는다. 전쟁이란 결국 마음을 먼저 지키는 일이다. 그분의 말은 단지 ‘소문’이 아니라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마지막 기척이었다. 나 자신도 그 기척에 기댔다. 한양을 내일이라도 회복할 것이라 믿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말이 내 귀에 닿는 순간, 나는 이 꺼져가던 몸속 어딘가에서 미세한 생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생각 하나가 오늘의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수많은 두려움과 피로 가운데서, 나는 오랜만에 사람의 기운을 되찾은 듯했다. 극양이 말을 끌고 내려왔다. “이제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팔거로 가자. 오늘은 반드시 학봉 선생을 뵈어야 하네.” 산천은 어수선했다. 길가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집을 버린 백성들이 아이를 업고 쏟아져 나왔다. 울음도, 신음도, 묵묵히 걷는 발소리도 한데 섞였다. 들녘은 여름빛으로 가득했다. 보리는 이미 베어졌다. 논에는 모가 자라 푸른빛을 번들거릴 때였으나, 잡풀만 푸르렀다. 이 황량한 풍경이 마음을 짓눌렀다. 길가의 버드나무잎에도 전쟁의 열기가 어려 있는 듯했다. ‘이 산하가 언제 제 빛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학봉 선생께서 기다리고 있었다. “병환 중이시라 들었는데, 이렇게 뵈오니….” “병은 무슨 병인가. 이 혼란 속에서 편히 자지 못했을 뿐이네.” 얼굴은 수척했으나,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그 빛 속에서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나라의 근심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사람이 버티면 다시 세울 수 있지.” 그 한마디가 가슴 깊이 박혔다.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펴지는 듯했다. “그대 고을은 무사한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뿐입니다. 오래 버티기 어렵나이다.” “그대 같은 자가 필요하네.” 그는 흔들리는 숨을 눌러 담았다. “의병의 뜻을 각 읍에 퍼뜨릴 격문을 마련하게. 붓을 드는 이가 곧 칼을 드는 셈이네.” 나는 그제야 이 부름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의 곁에는 몇 통의 서찰과 봉인되지 않은 문서가 쌓여 있었다. 그것은 각 군현에 보내는 의병 소집을 독려하는 서신이었다. “공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당장 초안을 마련하겠습니다.” “좋네. 그대의 글이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리라 믿겠다.” 잠시 후, 다른 이가 달려와 학봉에게 귀띔했다. “서울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전하께서 평양에 이르러,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가야 할지 신하들과 의논하셨다 합니다. 대부분이 극력 만류했지만.”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공기가 멎었다. “임금이… 명나라로 들어간다고?” 모두가 얼이 빠진 듯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나는 며칠 전 고등지로부터 들은 정보라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럴 리가 있소. 더 알아봅시다!” “확실한 모양입니다.” “그동안은 왜적이 아무리 맹렬해도, 임금이 나라 안에 계신다는 믿음 하나로 버텼지 않았소. 그마저 무너지게 생겼다니….” “임금도 없는 나라는 이미 나라가 아니오.” “맞소. 나라도 없으면 백성도 없는 법.” “백성도 없는데 누굴 위해 싸우지요?” 한참 동안 여러 사람의 성토가 이어졌다. 그때 학봉께서 말했다. “성상께서 몸을 피하시려는 건, 백성을 살리기 위해 부득이한 처신이리라. 살아 계신 한, 나라의 혼은 아직 꺼지지 않았네.” “그렇지요. 임금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나이다.” 나는 가슴으로 응답했다. 그 순간만은 계산이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사이로 빛 한 줄기가 비스듬히 흘렀다. 빛과 그림자가 뒤섞인 세상, 아직은 완전히 어둡지 않았다. “초유사 어른, 저희도 이제 돌아가 싸움을 준비하겠나이다.” “그리하게. 산천이 무너져도, 뜻은 남아야 하네.” 밖으로 나오니 형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가?” “나라를 위해 붓을 들라 하셨소.” 멀리 공산 줄기가 흐릿한 안개 속에 누워 있었다. 그 산등성이 어딘가에 내가 써야 할 문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글은 피보다 먼저 흘러야 했다. 저녁 무렵, 나는 부인사로 향했다. 비에 젖은 산길은 축축했고, 발걸음마다 미끄러졌다. 내 마음도 그와 같았다. 16자 심법을 암송했다. 인심유위요 도심유미라 유정유일 윤집궐중이라.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희미하다. 지금 그 마음이 곧 조선의 혼이리라. 그 혼을 오직 정밀하게 하나로 모으면, 마침내 천하를 지킬 수 있다. 무엇이 두려운가. 부인사에 이르니, 자인 고을의 손 생원과 이승증, 청도의 박경선 등이 돌린 격문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펼쳤다. 그들의 기상은 자못 장하고 굳세었다. 한 줄 한 줄에 서린 글귀마다 의지와 적개심이 서려 있었다. 꺼져가던 심지가 다시 불붙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횃불을 본 듯, 나는 숨을 고르며 격문을 닫았다. 부끄러움이 얼굴을 덮쳤다. 우리 고을은 인구가 번성하여 사방에 사람이 가득하다. 그런데도 아직 단 한 사람도 분연히 일어나 창의한 자가 없었다. 한편의 격문이었으되, 그것은 내 가슴을 뒤흔들어 놓는 천둥과도 같았다. □ 6월. 창의倡義 결의 6월 초하루였다. 동화사 인근 미라점에서 나와 뜻을 같이하는 채명서, 이상문 등 지역 유림을 불러 모았다. 며칠 전 초유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붓을 드는 이가 곧 칼을 드는 셈이라던 말씀이었다. 다들 더 숨어 지낼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나라의 명맥이 끊어질 것이다. 백성을 저버린 선비라는 오명을 피할 수도 없다. “우리 대구의 유림은 지금 이 자리에서 의로써 함께 할 것을 맹세해야 하오.” “관군이 무너졌다 하여 우리마저 무너질 수는 없소.” “그렇소. 우리의 맹약이 바로 난세에 해야 할 선비의 도리이며, 지역 백성들을 구할 유일한 길이오.” 의병을 일으킬 약속. 이 약속이 없다면, 우리는 역사에 그저 힘없는 피난민으로 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흩어진 민심을 모으고 난민을 격려할 공식 문서를 만들기로 했다. “우리가 비록 작은 무리일지라도, 천하에 우리의 뜻을 밝힐 격문檄文이 필요하오.” 나는 당장 이 결의를 담아 초집향병격문招集鄕兵檄文의 초안을 마련할 것을 제안했다. “이 격문이야말로 우리 향병이 나아갈 길을 밝히는 첫 횃불이 되어야 하오.” 어제 미라점에서 의를 맹세한 후, 낙애 정광천, 아우 서행원, 이경임, 은복흥 등과 함께 서둘러 동화사로 향했다. 부사는 여전히 이 지역 관군의 수장이다. 창의의 뜻을 정식으로 보고하고 관의 협조를 얻는 것이 순서이리라. 모두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핏기가 돌았다. “부사 나리, 저희 유림은 어제 미라점에 모여 의병을 일으킬 결의를 했나이다.” “유생들이 의병이라?” “그렇습니다. 백성들은 길을 잃고 조정은 요원하여 지체할 수 없습니다.” “병력을 모으는 것은 오직 관의 권한이오.” “우리가 직접 의병을 모아 왜적에 대항하기로 했나이다. 부디 윤허하시고 관에서 최소한의 무기와 군량을 지원해 주시오.” “지금은 조정의 명령 없이 사사로이 병력을 일으킬 때가 아니오!” “나리! 이미 초유사의 명도 있었잖습니까. 이것이 조정의 명령 아니오니까! 백성들의 피가 땅을 적시고 있소이다!” “군사를 먹일 양식은 있소?” “무기와 군량은 차츰 우리가 해결할 터이니, 관에서는 창의의 뜻에 힘만 실어 주시기 바라오.” “듣자 하니, 그대들은 병졸들을 모아 부인사 인근에 진을 치고 질서를 잡겠다고 하더군. 지금, 이 혼란기에 무장한 사병私兵이 돌아다닌다면, 자칫 군율을 흐트러트리고 민심을 더욱 흉흉하게 만들까 두렵소!” 부사의 목소리에 경계심이 역력했다. “팔도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나이다. 격문이 나돌고 전과도 올리는데, 유독 우리 좌도만 침묵하고 있는 지경이외다.” 부사는 우리의 말을 귓전으로 들었다. 오히려 나로부터 다짐이라도 받아내기나 하려는 듯 말을 던졌다. “혹시라도 큰 폐단이 생기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그대 유생들에게 돌아갈 것이오!” 충의에 귀천이 없고, 나라를 구하는 일에 때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부사께서는 전황이 악화하지 않을까만 염려했다. 지난 4월에 부사께서 스스로 꺼낸 의병 이야기가 어느새 쑥 들어가고 말았다. 부사는 오직 관청의 명령과 자신의 책임 회피에만 급급했다. 부사라는 이름은 남았으되, 권위는 사라졌다. 그는 돌기둥처럼 조용히 남아 있었다. 일어섬은 멀고, 전쟁은 너무 가까웠다.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힘이 이 폐허 속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비록 관의 지원은 받지 못했지만, 어제 유림과 맺은 문약文約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명분이었다. 이제 우리의 목표는 분명해졌다. 관의 도움 없이, 오직 지역민의 힘과 의만을 바탕으로 조직을 키워나가야 했다. 산허리를 휘돌아 내려오던 우리의 발걸음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쉿… 들리지 않소?” 낙애가 손을 들어 우리를 멈추게 했다. 멀리서도 선명히 쇳소리 섞인 함성이 바람을 타고 밀려왔다. 산줄기를 흔드는 듯한 괴성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왜적이다…, 왜적의 함성이다!” 모두의 얼굴빛은 삽시간에 잿빛으로 돌아갔다. “어찌 이런 때에까지….” 말끝은 허공에 흩어졌다. 치솟던 의기는 너무도 짧았다. 남은 것은 다시 덮쳐 오는 공포였다. 우리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내 말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함께 있으면 더 눈에 띈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몇몇이 산길 옆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다른 사람들은 서둘러 마을 쪽으로 달려갔다. 나 역시 발길을 재촉했다.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모여 기쁨을 나눈 사이였으면서도, 다시 각자 흩어지는 난민이 되고 말았다. 길은 분명 하나였지만, 두려움은 그 길을 갈라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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