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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팔공산, 임진년의 기억 (6)

작성자최상근|작성시간26.06.10|조회수26 목록 댓글 0
□ 5. 참혹한 현실


이분은 서울에서 내려온 고등지라 하오직접 본 전황을 상세히 아뢸 것이오.”
부사께서는 피곤한 기색이었다이런저런 격문으로 대충 전황을 파악하고 있던 참이었다고등지가 한양이 무너진 뒤의 상황을 말하는 순간 부사의 눈빛이 번쩍였다조정이 어느 고을까지 올라갔는지인근 의주 방면에서 군무가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지평양성 함락과 장수들의 패전 소문까지남쪽에서는 들을 수 없는 근접 정보였다.
한참의 보고가 끝난 뒤나는 그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저녁 밥상을 차리고 그를 앉혔다쇠약한 몸으로 젓가락을 드는 모습이 측은했다내가 국을 떠 주었다.
목숨이 남아 있는 것이 그저 기적이오낙재 공을 만나지 못하였다면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몰랐을 것이오.”
그대가 전한 말이 곧 나라의 등불이 되었소어려운 길을 살아 도착한 것만으로 이미 큰 공이오.”
오늘 들은 말들이 머릿속으로 파도처럼 반복해서 밀려 들어왔다서울의 함락조정의 피란백성의 참상모든 것이 이미 우리의 목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의병을 일으키려는 내 결심은 오늘로써 더욱 굳어졌다.


숙부들이 내려왔다떨리는 음성이 방 안의 공기를 멈춰 세웠다.
이제는… 어찌해도 어렵겠구나.”
그날 오후모두가 자리에 앉아 첩을 문병 겸 영결했다나는 감히 눈을 들지 못했다숨이 붙어 있는 사람 앞에서이미 이별을 예감하는 자의 심정은 참혹했다.
잠시 후 내동 쪽에서 급보가 날아왔다.
왜적이 접근 중이라 하옵니다!”
나는 더는 머물 수 없었다불운암의 처마 끝에 걸린 바람이 깃발처럼 흔들렸다.
고등지의 말을 떠올렸다선조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평양으로 향한 일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갈 생각까지 신하들에게 밝힌 일과 왜적이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있다는 이야기.
마음 한편에 오래 눌러 놓았던 무게가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나라가 무너지기 직전이다왕조의 심장부가 텅 비었다그 무너짐의 공백이 의병이 일어설 자리다.
고등지는정황으로 보건대 계속 남쪽으로 혹은 의병장들이 모일 만한 고을로 소식을 전하러 갔을 것이다이런 사람들은 지도자의 명을 받지 않고스스로 움직였다숨은 인재를 찾아 그들에게 나라를 맞길 참이었다그들이야말로 지방과 지방을 잇는 생명줄이었다.


오늘 아침전언 하나가 들어왔다학봉 김성일 공이 바야흐로 한양을 회복할 기세가 있다고 했다고 한다이미 왜군이 도성에 들어간 지 스무날이 넘었다전령은 끊어졌으며왕조차 북으로 밀려 올라가던 때였다.
하루가 멀다고 패전 소식만 들려오던 이 남쪽 끝에서, ‘회복이라는 두 글자는 마치 먼 산 위로 스치는 새 그림자처럼 와 닫지 않았다그러나 이상하게도그 말 한 줄이 가슴 속에서 살아났다.
나는 그것이 적확한 소식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허위일 수도 있고누군가의 바람이 와전되어 부풀려진 것인지도 모른다그런데도 나는 그 소식을 밀어내지 못했다더 정확히는 밀어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마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묘했다절망이 깊어질수록 허튼 말일지라도 희망의 빛을 찾으려 했다.
학봉 공께서는 경상우도의 군민을 규합하는 중책을 맡았다전시 상황이라 사실상 좌도도 통괄했다그분의 말 한마디가 수천 명의 숨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아마 그분도 지금의 암흑을 뚫고자 희망을 말해야만 했을 것이다.
희망 없는 군사는 흩어지기 마련이다흩어진 민심에는 의병이 모이지 않는다전쟁이란 결국 마음을 먼저 지키는 일이다그분의 말은 단지 소문이 아니라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마지막 기척이었다.
나 자신도 그 기척에 기댔다한양을 내일이라도 회복할 것이라 믿은 것은 아니다그러나 그 말이 내 귀에 닿는 순간나는 이 꺼져가던 몸속 어딘가에서 미세한 생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생각 하나가 오늘의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수많은 두려움과 피로 가운데서나는 오랜만에 사람의 기운을 되찾은 듯했다.


극양이 말을 끌고 내려왔다.
이제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팔거로 가자오늘은 반드시 학봉 선생을 뵈어야 하네.”
산천은 어수선했다길가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집을 버린 백성들이 아이를 업고 쏟아져 나왔다울음도신음도묵묵히 걷는 발소리도 한데 섞였다.
들녘은 여름빛으로 가득했다보리는 이미 베어졌다논에는 모가 자라 푸른빛을 번들거릴 때였으나잡풀만 푸르렀다이 황량한 풍경이 마음을 짓눌렀다길가의 버드나무잎에도 전쟁의 열기가 어려 있는 듯했다. ‘이 산하가 언제 제 빛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학봉 선생께서 기다리고 있었다.
병환 중이시라 들었는데이렇게 뵈오니.”
병은 무슨 병인가이 혼란 속에서 편히 자지 못했을 뿐이네.”
얼굴은 수척했으나눈빛만은 살아 있었다그 빛 속에서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나라의 근심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사람이 버티면 다시 세울 수 있지.”
그 한마디가 가슴 깊이 박혔다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펴지는 듯했다.
그대 고을은 무사한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뿐입니다오래 버티기 어렵나이다.”
그대 같은 자가 필요하네.”
그는 흔들리는 숨을 눌러 담았다.
의병의 뜻을 각 읍에 퍼뜨릴 격문을 마련하게붓을 드는 이가 곧 칼을 드는 셈이네.”
나는 그제야 이 부름의 의미를 깨달았다그의 곁에는 몇 통의 서찰과 봉인되지 않은 문서가 쌓여 있었다그것은 각 군현에 보내는 의병 소집을 독려하는 서신이었다.
공의 명을 받들겠나이다당장 초안을 마련하겠습니다.”
좋네그대의 글이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리라 믿겠다.”
잠시 후다른 이가 달려와 학봉에게 귀띔했다.
서울에서 전갈이 왔습니다전하께서 평양에 이르러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가야 할지 신하들과 의논하셨다 합니다대부분이 극력 만류했지만.”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공기가 멎었다.
임금이… 명나라로 들어간다고?”
모두가 얼이 빠진 듯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나는 며칠 전 고등지로부터 들은 정보라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럴 리가 있소더 알아봅시다!”
확실한 모양입니다.”
그동안은 왜적이 아무리 맹렬해도임금이 나라 안에 계신다는 믿음 하나로 버텼지 않았소그마저 무너지게 생겼다니.”
임금도 없는 나라는 이미 나라가 아니오.”
맞소나라도 없으면 백성도 없는 법.”
백성도 없는데 누굴 위해 싸우지요?”
한참 동안 여러 사람의 성토가 이어졌다그때 학봉께서 말했다.
성상께서 몸을 피하시려는 건백성을 살리기 위해 부득이한 처신이리라살아 계신 한나라의 혼은 아직 꺼지지 않았네.”
그렇지요임금이 살아 있는 한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나이다.”
나는 가슴으로 응답했다그 순간만은 계산이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구름 사이로 빛 한 줄기가 비스듬히 흘렀다빛과 그림자가 뒤섞인 세상아직은 완전히 어둡지 않았다.
초유사 어른저희도 이제 돌아가 싸움을 준비하겠나이다.”
그리하게산천이 무너져도뜻은 남아야 하네.”
밖으로 나오니 형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가?”
나라를 위해 붓을 들라 하셨소.”
멀리 공산 줄기가 흐릿한 안개 속에 누워 있었다그 산등성이 어딘가에 내가 써야 할 문장이 기다리고 있었다글은 피보다 먼저 흘러야 했다.
저녁 무렵나는 부인사로 향했다비에 젖은 산길은 축축했고발걸음마다 미끄러졌다내 마음도 그와 같았다.
16자 심법을 암송했다인심유위요 도심유미라 유정유일 윤집궐중이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위태롭고도의 마음은 희미하다지금 그 마음이 곧 조선의 혼이리라그 혼을 오직 정밀하게 하나로 모으면마침내 천하를 지킬 수 있다무엇이 두려운가.
부인사에 이르니자인 고을의 손 생원과 이승증청도의 박경선 등이 돌린 격문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펼쳤다그들의 기상은 자못 장하고 굳세었다한 줄 한 줄에 서린 글귀마다 의지와 적개심이 서려 있었다.
꺼져가던 심지가 다시 불붙는 것 같았다어둠 속에서 횃불을 본 듯나는 숨을 고르며 격문을 닫았다부끄러움이 얼굴을 덮쳤다.
우리 고을은 인구가 번성하여 사방에 사람이 가득하다그런데도 아직 단 한 사람도 분연히 일어나 창의한 자가 없었다한편의 격문이었으되그것은 내 가슴을 뒤흔들어 놓는 천둥과도 같았다.




□ 6창의倡義 결의


6월 초하루였다동화사 인근 미라점에서 나와 뜻을 같이하는 채명서이상문 등 지역 유림을 불러 모았다며칠 전 초유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붓을 드는 이가 곧 칼을 드는 셈이라던 말씀이었다.
다들 더 숨어 지낼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이대로 있다가는 나라의 명맥이 끊어질 것이다백성을 저버린 선비라는 오명을 피할 수도 없다.
우리 대구의 유림은 지금 이 자리에서 의로써 함께 할 것을 맹세해야 하오.”
관군이 무너졌다 하여 우리마저 무너질 수는 없소.”
그렇소우리의 맹약이 바로 난세에 해야 할 선비의 도리이며지역 백성들을 구할 유일한 길이오.”
의병을 일으킬 약속이 약속이 없다면우리는 역사에 그저 힘없는 피난민으로 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흩어진 민심을 모으고 난민을 격려할 공식 문서를 만들기로 했다.
우리가 비록 작은 무리일지라도천하에 우리의 뜻을 밝힐 격문檄文이 필요하오.”
나는 당장 이 결의를 담아 초집향병격문招集鄕兵檄文의 초안을 마련할 것을 제안했다.
이 격문이야말로 우리 향병이 나아갈 길을 밝히는 첫 횃불이 되어야 하오.”
어제 미라점에서 의를 맹세한 후낙애 정광천아우 서행원이경임은복흥 등과 함께 서둘러 동화사로 향했다부사는 여전히 이 지역 관군의 수장이다창의의 뜻을 정식으로 보고하고 관의 협조를 얻는 것이 순서이리라모두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핏기가 돌았다.


부사 나리저희 유림은 어제 미라점에 모여 의병을 일으킬 결의를 했나이다.”
유생들이 의병이라?”
그렇습니다백성들은 길을 잃고 조정은 요원하여 지체할 수 없습니다.”
병력을 모으는 것은 오직 관의 권한이오.”
우리가 직접 의병을 모아 왜적에 대항하기로 했나이다부디 윤허하시고 관에서 최소한의 무기와 군량을 지원해 주시오.”
지금은 조정의 명령 없이 사사로이 병력을 일으킬 때가 아니오!”
나리이미 초유사의 명도 있었잖습니까이것이 조정의 명령 아니오니까백성들의 피가 땅을 적시고 있소이다!”
군사를 먹일 양식은 있소?”
무기와 군량은 차츰 우리가 해결할 터이니관에서는 창의의 뜻에 힘만 실어 주시기 바라오.”
듣자 하니그대들은 병졸들을 모아 부인사 인근에 진을 치고 질서를 잡겠다고 하더군지금이 혼란기에 무장한 사병私兵이 돌아다닌다면자칫 군율을 흐트러트리고 민심을 더욱 흉흉하게 만들까 두렵소!”
부사의 목소리에 경계심이 역력했다.
팔도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나이다격문이 나돌고 전과도 올리는데유독 우리 좌도만 침묵하고 있는 지경이외다.”
부사는 우리의 말을 귓전으로 들었다오히려 나로부터 다짐이라도 받아내기나 하려는 듯 말을 던졌다.
혹시라도 큰 폐단이 생기면그 책임은 고스란히 그대 유생들에게 돌아갈 것이오!”
충의에 귀천이 없고나라를 구하는 일에 때가 있는 것이 아니다부사께서는 전황이 악화하지 않을까만 염려했다지난 4월에 부사께서 스스로 꺼낸 의병 이야기가 어느새 쑥 들어가고 말았다.
부사는 오직 관청의 명령과 자신의 책임 회피에만 급급했다부사라는 이름은 남았으되권위는 사라졌다그는 돌기둥처럼 조용히 남아 있었다일어섬은 멀고전쟁은 너무 가까웠다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우리의 힘이 이 폐허 속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비록 관의 지원은 받지 못했지만어제 유림과 맺은 문약文約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명분이었다이제 우리의 목표는 분명해졌다관의 도움 없이오직 지역민의 힘과 의만을 바탕으로 조직을 키워나가야 했다.
산허리를 휘돌아 내려오던 우리의 발걸음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 들리지 않소?”
낙애가 손을 들어 우리를 멈추게 했다멀리서도 선명히 쇳소리 섞인 함성이 바람을 타고 밀려왔다산줄기를 흔드는 듯한 괴성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왜적이다왜적의 함성이다!”
모두의 얼굴빛은 삽시간에 잿빛으로 돌아갔다.
어찌 이런 때에까지.”
말끝은 허공에 흩어졌다치솟던 의기는 너무도 짧았다남은 것은 다시 덮쳐 오는 공포였다.
우리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이내 말없이 뿔뿔이 흩어졌다함께 있으면 더 눈에 띈다는 직감 때문이었다몇몇이 산길 옆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다른 사람들은 서둘러 마을 쪽으로 달려갔다나 역시 발길을 재촉했다그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알지 못했다그렇게 우리는 함께 모여 기쁨을 나눈 사이였으면서도다시 각자 흩어지는 난민이 되고 말았다길은 분명 하나였지만두려움은 그 길을 갈라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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