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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팔공산, 임진년의 기억 (8)

작성자최상근|작성시간26.06.10|조회수21 목록 댓글 0

□ 6창의倡義 결의

 

인각암에 오르니 산그늘이 아직 젖어 있었다이희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본디 학문을 같이 하던 벗이었으나전란이 일어난 뒤로는 공산의 암자들을 오가며 피난민과 파발관속과 승려들의 말을 묶어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산중으로 흘러드는 세상의 소문이 먼저 그의 귀를 스쳐 지나가는 셈이었다.

그에게 전하의 소식을 물었다.

평양의 공기는 이미 사람 살 곳이 아니오임금의 거취도 바람처럼 흔들린다 하오왜적의 발걸음이 너무 빠릅니다오래 버티기 어렵다는 말을 남쪽으로 오는 사람마다 똑같이 전하고 있소.”

평양이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는 이희의 말이 산바람처럼 가슴 밑을 스쳤다나는 곧장 삼성암으로 향했다공산의 능선 가까이 있는 암자였다산길은 사람의 기척이 끊겨 있었다바람에 흔들리는 잎 소리조차 경계처럼 들렸다나는 마침내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을 거두었다. ‘언제가 아니라 지금이어야 했다.

암자에 도착하니 종기의 모친이 죽 한 그릇을 내어주었다그 따뜻함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잠시 뒤 종기가 밖으로 나왔다얼굴에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의 빛이 서려 있었다.

병장기 마련이 잘돼 가는가?”

쇠를 구할 곳이 없습니다마을은 텅 비었고대장장이들도 다 피난 갔소.”

남은 것만으로는 부족하겠군.”

턱없이 부족하오장정의 수가 늘어나는데창하나 쥐어 줄 수 없는 실정이니군량도 그렇고… 선생님이렇게 모아서 싸움이 되겠나이까?”

나는 죽 그릇을 내려놓고 그의 눈을 보았다.

지금 우리가 물러설 수 있느냐를 먼저 생각해야 하네.”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이 될까 두렵소.”

나도 두렵네.”

말을 잇는 데 한참이 걸렸다.

허나 왜적은 멈추지 않네우리가 멈추면그다음은 고향이고부모고자식일 것이야.”

말씀 잘 새기겠나이다병기 마련을 끝까지 해보겠소.”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한 사람의 어깨가 이토록 가볍고 믿음직스러운지전란은 늘 그 두 극을 동시에 떠안게 했다.

서쪽 산등성이로 몸을 돌렸다굳이 험한 능선을 택한 것은혹 아래 길에 적의 눈이 도사리고 있을지 두려워서였다.

능선을 돌아 견불암에 내려섰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짧은 하루였으나 마음은 수십 리를 헤맨 듯 무거웠다평양의 소식은 나를 결단 쪽으로 몰아세웠다삼성암의 대화는 다시 나를 겁박했다해야 하는 일은 늘 절망적이었다.

 

사람들이 수군댔다.

들었소해촌이… 하루아침에 쑥대밭이 되었다 하오.”

그게 무슨 말이오설마.”

곽재겸의 두 아들도 왜적의 칼끝을 피하지 못했다 하오집안이 통째로 무너졌다 하니.”

세상에나!”

그 애들이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릴 마중 나왔었는데.”

어제 함께 웃던 얼굴들이오늘은 모두 흙이 되었다니.”

서집도 크게 다쳤소어깨를 베여 피투성이가 되었다 하오.”

살아 있다 하나 상처가 목숨을 위협할지도 모른다오.”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해촌의 불길은 단순한 한 고을의 화마가 아니오.”

오늘은 해촌내일은 우리 차례일지 누가 알겠소.”

주위는 더 깊은 정적에 잠겼다.

 

부사는 병사들을 모아놓고도 산중에서 움츠린 채 창의 손잡이만 매만졌다그의 얼굴엔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그 분개가 적을 향한 결의로 이어지지 못했다산중에 오래 머물다 보면처음의 분노와 토적의 기개는 흐려진다끝내는 병력을 거느려 제 몸을 지키는 모습이 되고 만다.

부사는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병력이 모자란다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모두 죽을 뿐이다나라도그대들도 다 잿더미가 될 게 뻔하지 않겠소!”

그가 의병 창의를 싫어하는 까닭은 단순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그는 이미 성 하나를 지키다 무너져 내린 지휘관들의 최후를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었다조정은 명확한 명도 내리지 않고책임은 오롯이 지방 지휘관에게만 덮어씌워지는 현실그 부당함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의병은 공식 군령의 틀 밖에 있었다한 번 일어섰다가 패하면 역적이 되기도 한다이겨도 조정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그는 그 모든 것을 알았다그 앎이 그를 더 깊이 묶어두고 있었다.

의병이란 게 말은 그럴듯해도 결국엔 책임질 곳이 없소죽으면 허망하게 죽는 거요살아남으면 조정에서 뭐라 할지 모르는 일이지이런 판국에 감히 먼저 나서겠다니미혹한 짓이오.”

그 말은 그 자신을 향한 자책인지우리를 향한 경계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그 깊은 염려 속에는 두 자락의 마음이 동시에 어른거리고 있었다나라를 위해 몸을 던져야 한다는 서늘한 의리와한 번 잘못 나서면 죄인의 몸으로 생을 마칠지도 모른다는 현실의 심연그 어둠이 서로 부딪히며그를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산 출신의 한 장수는 주먹을 굳게 움켜쥐고분노를 억누르느라 온몸을 떨었다그의 분노가 무엇이든 부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는 족쇄를 차고 있는 사람이었다그 족쇄는 무엇보다 무겁고 단호했다.

 

천험의 요새라 일컫는 공산성을 직접 보고 싶었다전란의 불길이 사방을 집어삼키는 이때다산세의 험준함과 그 속에 깃든 옛 성의 위용을 눈으로 확인하려는 갈망이 일었다나는 서사술과 함께 몇몇 숙부를 모시고 길을 나섰다피난의 행렬 같으면서도무너진 세상 속에서 마지막으로 붙잡을 수 있는 의지처를 찾는 순례길 같았다.

정각암에 이르니 조계맹유이안서발 등이 먼저 나와 있었다그들의 얼굴빛은 핏기 없이 수척했다모두가 피로에 절어 있었다눈빛만은 날이 선 칼처럼 번뜩였다.

오셨군.”

조계맹이 짧게 말을 건넸다그의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기다렸다는 듯 묵직했다.

흩어졌던 이들이 이렇게 다시 모이는구나.”

이 자리는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다살아남은 자들이 힘을 모으는 순간이었다그 생각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졌다.

길목마다 불어오는 바람은 서늘했다숲은 더 깊이 어두워졌다그 어둠 속에서 서로의 발걸음 소리가 겹칠 때마다 위로가 되었다바람에 묻힌 심장의 고동이 서로를 부르는 듯했다.

견불암의 승려 일혜도 뒤따라왔다그는 두 손을 모으고우리 곁을 걸었다산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스치며 흘렀다견불암에서 들려오던 염송의 소리가 아직 그의 몸에 남아 있는 듯숨소리가 기도의 리듬을 따라가고 있었다.

나의 의는 어느 쪽에 서 있는가왜적을 벨 것인가아니면 그 악을 멈추게 할 것인가왜적의 살기를 마주하면서부터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의로써 그들을 베겠다 다짐했건만내 붓이 다시 흔들렸다그 흔들림이 곧 사람의 마음이리라.

人心惟危道心惟微인심은 위태롭고도심은 미세한 법이다나는 그 사이에서 칼을 들려 하고 있었다성현께서 이르셨다以直報怨以德報德원한에는 곧음으로덕에는 덕으로 갚으라 했다하지만 그 곧음이 반드시 칼이어야 하겠는가?

그러면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나라가 무너지고 백성이 죽어 가는데싸워서 적의 목숨을 거두지 않음이 어찌 의로울 수 있겠나사실 의란 싸움의 모양이 아니다마음의 바름이다미움으로 싸우면미움이 나를 삼킬 것이다칼은 악을 끊을 수 없다조이안이 말을 걸어왔다.

나으리의 의는 이미 칼을 넘어선 듯 보입니다.”

무슨 말인가?”

惟精惟一允執厥中오직 정밀히한결같이그 중심을 붙잡아라이것이 곧 도심이요나라를 살리는 길일 것입니다.”

전란 속에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칼과 활뿐만이 아니었다옆에서 함께 걷는 사람들의 기개묵묵히 이어지는 발걸음침묵 속에서 스며드는 기도의 울림이야말로 공산성으로 향하는 우리의 유일한 길잡이였다.

공산성이라면… 버틸 수 있겠지?”

누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는 대답 대신 성을 떠올렸다산세가 방패 되고칼보다 바위가 먼저 서 있는 그 성이 우리를 품어줄 것인가아니면 그저 돌무더기에 불과할 것인지.

나라가 이리 흔들리는데산성 하나가 버팀목이 되겠나.”

사람의 마음이 무너지면 돌벽도 무너지는 거다우리가 마음을 붙들면다시 나라의 울타리가 될 수 있지 않겠나.”

우리가 기댈 곳은 어디인가발걸음 하나하나에 희미한 믿음과 불안이 교차했다어둠 짙은 산길 위에서 우리의 작은 무리는 그렇게 요새를 향해 나아갔다.

산성에 이른 것은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빛이 산허리를 붉게 물들였다남문으로 들어서니 무너진 성벽 사이로 칡이 자라 있었다돌마다 세월의 흠집이 깊었다그 사이를 뚫고 다시 생명이 피어나는 듯했다나도 모르게 그 돌을 손으로 짚었다차가우면서도 묵직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비장함이 내 가슴안에 서서히 퍼졌다그 느낌이 스며든 자리에 훨씬 깊은 어둠이 존재함을 알았다그 어둠속으로 함께 들어가야 할 이들이 보이지 않았다바람만이 텅 빈 성을 감돌았다.

언제쯤 여기에 다시 사람이 가득 찰 수 있을까차디찬 바닥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이곳이 마지막 보루라 말할 수 있을까성 위로 부서진 꿈들이 흩날리는 듯했다성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돌 하나하나가 우리의 늦은 도착을 속삭였다.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감격이 갑옷으로 변해 나를 감싸안았다참담함도 깊이를 더했다나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성을 둘러보았다그곳은 여전히 폐허였다동시에 묵직한 옛 현장이기도 했다.

우리는 곧장 동쪽 곡성대로 올라갔다잠시 숨을 고르며 앉았다북 삼면을 굽어살폈다영천과 경산팔거의 산과 들강줄기와 마을 터가 발 아래 길게 이어졌다잠시나마 가슴에 맺힌 한이 풀리는 듯했다옛 장수들의 기척이 여전히 산성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지붕은 오래전 훼철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흩어진 기왓조각들이 아직도 땅 위에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손에 쥐어보았다싸늘한 감촉 속에 당년의 웅장함이 어렴풋이 살아났다한때는 군사들의 발걸음이 울렸을 테지화살과 북소리가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나는 폐허 속에서도 그 근고近古를 상상했다.

허물어진 돌과 깨어진 기와 속에서도성곽의 혼백만은 건재하리라나라가 무너져도 산과 성은 남았다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다잡게 하는 것 같았다.

성의 동쪽 길을 따라가니 숲 사이로 허술한 초막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짚과 나뭇가지를 엮어 급히 지은 듯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았다그 수효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몇 달 전만 해도 이 산성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몸을 의탁했었는지를 말해주었다.

막 안을 들여다보니 모두 비어 있었다처음엔 오싹한 두려움이 앞섰다혹 적이 이미 휩쓸고 간 자취가 아닐까숨죽여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떠난 자들은 어딘가 살아 있을 것이다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불씨를 지피리라빈 초막들은 비록 적막했으나그 자체로 다시 살아날 가능성을 품은 흔적이었다.

초막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고 있을 때였다멀리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바람을 헤집으며 다가왔다어스름이 막 내려앉는 시각희미한 그림자들이 성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도경응강충립강홀도진효도진성

한때 동쪽과 서쪽에서 각기 난리를 맞아 생사를 알 길 없이 흩어졌다그들이 세월의 틈을 비집고 나온 듯 하나둘 성안으로 올라오고 있었다가슴을 죄던 긴장이 풀리며다리가 힘을 잃을 듯했다우리는 거의 숨을 멈춘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초췌한 얼굴먼지 묻은 옷자락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언젠가 다시 만나리라 믿어도이렇게 현실이 될 것이라 누가 장담할 수 있었겠는가.

살아 있었구나.”

그 말 한마디에 오래 쌓인 두려움이 사라졌다전란 속에서 잃지 않은 것이 있다면바로 이 순간의 기적이었다.

도경응 등이 밥을 싸서 왔다우리 일행 또한 산 아래에서 가져온 소반을 풀었다성안의 임수 속에 둘러앉으니 해는 이미 서산에 잠겼다산새의 울음도 멀어져 갔다밥 냄새가 전란의 냄새와 뒤섞여묘한 따뜻함이 일었다그저 밥 한 그릇이었지만서로 남은 힘이 되었다말이 없어도 되는 자리였다.

어둠이 성벽의 틈새로 스며들기 시작했다다시 각자의 어둠 속으로 흩어져야 했다떠나는 발걸음이 묘하게 가벼웠다살아 돌아온 이들의 발자국오늘 하루 그 성을 다시 요새로 만들었다.

 

채정응을 만나기 위해 확배점으로 향했다그는 군사전략에 일가견이 있었다나는 그의 전략이 궁금했다동화사를 지나 중로에 이르렀을 때우연히 이간을 만났다그가 전한 말은 피로 쓴 소식이었다.

백헌수백행수 등이 어제 주륙 당했다는 것이다본디 두 사람은 고을의 유생을 자처했다예전에는 문안에도 출입하던 자들이었다전란이 닥치자 적에게 붙어 다니며 신수를 유지했다온몸을 비틀어 바람을 타고 살아남는 데 능했다적을 쫓아다니며 호령을 가장하고백성을 협박하며 재물을 모았다사문斯文을 어지럽힘이 지극하니들은 자 마다 통탄했다어찌 유학의 이름을 빌려 몸을 더럽히랴.

은흥복이 그들을 붙잡아 의로써 처단했다참으로 포상할 만했다그는 본디 향리의 잡직을 맡은 말단이었다변란의 때에 나아가 옳음을 좇았으니신분이 무엇이겠는가대의는 신분을 가리지 않거늘세상은 어찌하여 평소 그를 낮게 보았던가.

사람의 마음이 남아 있다면 세상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것이다하늘의 뜻이 비록 아득하나의로운 자 하나가 세상을 구한다도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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