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더지-이무영
분야: 어문 > 소설 > 중·단편소설
저작자: 이무영
원문 제공: 한국저작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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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앳말 권 서방네가 아들을 따라 서울로 간다는 소문이 퍼지자 동리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기차 놓친 사람들이 호기있게 달리는 차를 바라다보듯 등성이 너머 산부리의 두 집 뜸을 올려다보고 치어다보고 하는 것이었다.
아낙네들이 특히 더했다.
"아니, 삼성이네가 서울로 아주 간다면서유?"
콩으로 메주를 쑨다는 이야기까지도 단정을 해서 말하는 법이 없는 이 지방 사람들은 자기 눈, 귀로 보고 듣고 한 일이건만 이렇게들 떼놓고 한마디 건네본다. 혹시 상대가 아니라고 하기만 하면 자신이 없으면서도 기를 쓰고 그러니라고 우겨댈 판이지만 대개는 이렇게 수작을 붙이는 것이다.
"그렇다네나. 누군 팔자가 좋아서 그런 자식이 태어났누. 그저 사람은 늦팔자가 제일이니 풋고추 못 먹었다구 앵해할 것 없다니까 ─ 어려선 뒤지지두 않는다구 그렇게 성화를 대더니만 늙바탕에 가 그 자식 덕을 보잖나베."
"글씨 말여유. 정부인 마냄두 나막신 끌구 나온다는 가을철에두 즈 아버진 곤두박질을 하구 다니는데 눈치만 사알살 보구 베실베실 겉돌던 그 사람이 즈 아버지 호강 시킬 줄 누가 알았어유."
"그래, 말 새낀 나건 제주도로 보내구 사람의 새낀 서울로 보내랬다더니 그 말이 옳긴 옳군. 그야말루 개똥밭에 인물 나잖았어. 삼정승 사괴지 말구 맘을 바루 가지랬다구 다 즈 아버지 덕이지! 평생 남한테 싫은 소리 한 번 않더니만 늙바탕에 그런 복받이를 하는군그랴."
마침 가을걷이도 거의 끝날 무렵이기도 하여 사랑에고 우물에고 모여앉기만 하면 권 서방네 이야기였다.
하기는 부러워할 만도 할 것이 평생을 두고 손톱이 자랄 새가 없도록 일을 해서 가을에 가서는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마는 이 장앳말 농군들한테는 꿈같은 이야기다. 농사짓기가 싫다고 어려서 집을 뛰쳐나간 외아들 삼성이가 운이 좋아서 굉장한 양옥을 사고는 늙은 부모를 모셔간다는 것이다.
풍이 아니라 장앳말에서도 직접 가본 사람도 있다. 백여 평이나 되는 뜰에는 나무가 가득하고 연못에는 손바닥만큼씩한 금붕어가 놀고 아침저녁으로 지프차가 모시러 오더라는 것이다.
"그 사람 용 됐네 용 됐어! 식모가 둘씩이나 되구 술두 우린 이름두 모를 양주만 내오구. 잠시 술을 먹는 동안에두 전화가 쉴새없이 오구…"
면서기로 있는 동찬이가 갔다 와서 하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잘살아?"
"암! 굉장해! 아주 굉장해! 여편네두 양단으루만 칠칠 감구 금강석 반지를 두 개나 끼었데나. 그런 팔잘 타구난 사람더러 두더쥐처럼 땅을 파랬으니 들어먹을 게 뭔가. 자넨 고향을 뛰쳐나온 보람이 있네 그랬더니만, 그 사람두 그러데나. 개구리가 주저앉을 제는 멀리 뛰자는 뜻이었다구. 아주 정말 굉장해!"
"그래 옛말 그른 데 없어. 큰 고기가 되자면 그저 큰물에서 놀아야느니! 등어리가 커야 고름두 담기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이런 두메 구석에 처박힌 채 백 년을 살아보지. 황모 꼬리 될까봐서? 그저 뉘탓 뉘탓 할 것 없어. 다 저 못나서 그렇지!"
삼성이에 대한 부러움은 자기 한탄으로 떨어져 버린다.
거기에 또 권 서방이 동리를 뜨면서 작별잔치를 베푼다는 것이다. 집에서 기르던 도야지 세 마리 중 두 마리는 어우리로 주고 중돝 한 마리를 잡아서 온통 잔치에 쓴다는 것이다. 그것도 삼성이가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걷음새를 한답시고 가으내 북더기 속에 살았다지만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했던 뀜질 치다꺼리를 하고 나니 다들 빈손이나 진배없었다.
차라리 그나마도 없을 때가 맘이 편했다.
곡식이랍시고 몇 가마 들여놓고 나니 수득세다, 물세다, 비료값이다, 군경원호비다, 지서 대책위원회비, 호별세에, 가옥세, 전근비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세금과 잡부금을 어떻게 떼내며 보릿고개까지 양도를 대자면 모기다리 하나로 동리잔치를 지내야 할 판이라 마음만 쓰여진다.
말이 가을이지 정말 그림의 떡이었다. 너나없이 여름 치르고 난 농군들의 얼굴은 매미껍질처럼 핏기들이 없었다. 이 궁한 판에 고깃국물이라도 얻어먹게 되니 권 서방네 작별 잔칫날이 기다려질밖에 없다.
"언제라나?"
"언젠 뭘 언제. 오늘 저녁에 한다구 지금 그릇 얻어 날르구 법석인데…"
"젠장, 오늘 배 한 번 축여보나부다!"
아침부터 온 동리가 떠들썩했다.
[2]
장앳말은 그만두고 근동 일대가 이렇듯 부러워하는 권 서방네지만 실상 당자인 권 서방은 그래도 무엇이 못마땅한지 신푸녕해가지는 비슬비슬 집 밖으로 겉돌고 있다.
이 몇 해를 두고 장앳말에서는 어느 해 치고서 이농가가 없은 적이 없었다.
말은 농지개혁을 했다지만 생산은 그대로 있고, 아니 토지의 산화와 종자의 자연 퇴화, 노력부족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오히려 감소되고 있는 데 비해서 생필품의 가격이 오르고 보니 자연 지출은 반비례로 늘어가는 데서 분배받은 토지는 옛날 지주한테로 돌아 들어가는 형편이었다.
말은 비료 배급이라지만 배급을 받는 것은 시정 상인이요, 농군들은 몇 다리 거친 비싼 비료를 상인들한테 사야만 하는 것이다.
‘적기배급’이니‘공정가격’이니를 아무리 떠들어보았자 군이나 면에서도 어느 낮도깨비가 언제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통 자기네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쇠귀에 경 읽기였다.
"그래두 초장부터 설치긴 ─ 이건 저의 농사나 되는 듯이 배 놓아라, 감 놓아라, 종자가 어떻구 퇴비 걱정, 가마 걱정까지 하려 들지! 숫제 가만히 들이나 있어주었으면 좋으련만 툭하면 오너라 가거라지!"
그러나 아무리 투덜대어보았자 그 식이 장식이었다.
응당 없어졌어야 했을‘장릿벼’니,‘풋바심’이니‘색거리’니 하는 말들이 농가에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이농가가 근절될 수도 없었다.
금년만 해도 덕보네가 농사 다 지어놓고서 낫도 대어보지 못한 채 그대로 청주 처삼촌을 장대고 동리를 떠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권 서방네는 달랐다. 살지 못해서 떠나가는 것이 아니다. 호강을 하러 서울로 가는 이였다. 사실 모두 부러워할 만도 한 것이 해방은 그만두고 6‧25 이후만 하더라도 삼십 호에 불과한 이 장앳말에서 일곱 집이나 동리를 떴지만 살길이 틔어서 동리를 뜨기는 권 서방이 처음이던 것이다.
그러니 호기있게 뽐낼 만도 한 일이었다.
그러나 권 서방은 통 그런 티를 안 보인다. 호기가 있기는커녕 날개 부러진 새처럼 어깨가 축하니 처져서 지짐질을 한다, 돼지를 삶는다, 온 동리가 떠들썩하건만 부엌에는 근접도 않고 마당을 거니는 눈치더니 어디로인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누구고 동리를 뜨는 날은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모두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부자지를 맞잡고 큰 친구들이었다. 세상이 날로 강박해져서 그렇지 울도 튼 채 살아온 사이들이다. 네것 내것도 별로 없었다.
"나 호박 좀 따가네!"
하고 담 너머로 소리를 치면,
"이 사람, 따가면 따갔지 아뢸 건 뭔가, 저쪽 끝으로 애호박이 두어 개 달렸느니!"
이렇게 맞소리를 치던 사이요,
"아니, 자네네 감잔 제법 알이 들었데나, 자네 불알만큼은 해."
"에끼, 이 사람! 좀 캐가지구 갈 께지? 우린 벌써 손댄 지 오래다네."
"그렇잖아두 여남은 개 캐가지구 가네."
"어어, 잘했네!"
이렇게 살던 사이다.
이 정든 친구들이 솥을 떼어 걸머지고는 어린것들은 앞세우고 동리를 뜨는 것이었다. 떠날 때는 누구나 돈을 벌기만 하면 다시 돌아오겠노라 했었다.
말뿐이 아니다. 그들의 염원은 웬만큼만 형편이 피이면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는 일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땀과 눈물이 밴 농토를 되찾고 조상들이 묻힌 곁에 가서 눕는 것이 소원이었었다.
그러나 한 번 떠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해방 전은 더 말할 것도 없었지마는 해방이 되고도 장앳말을 떠난 사람은 되돌아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단지 하나가 있었지만 굶주리던 끝에 병까지 들어 정거장에서 기어오듯 하다가 무너미 고개를 넘지도 못하고 숨을 걷었었다.
외아들을 6‧25에 죽이고 품이나 팔아먹겠노라 조치원으로 갔던 원 첨지 내외였다. 할멈도 객지에 화장을 하고 외톨이로 굴다가 뼈나 고향 땅에 묻겠노라 장앳말을 찾아 오다가 정든 동리를 내려다보며 숨을 걷었었던 것이다.
그런 뒤로는 누구나 돈을 벌어 가지고 돌아온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잘 가우. 가서 몸이나 성히 있수. 고향을 잊지 말구…"
고향 떠나는 사람을 위해서 대개는 동구 밖 무너미 고개까지 배웅들을 해주었었다. 고개 마루턱에서 나누는 이런 작별 인사가 그대로 그들의 영이별이라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돈 벌거든 고향에 다시 와 삽시다!"
"그러자구 가는 거지!"
말들은 이렇게 하지만 가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살아서 다시 만나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래서 누구고가 고향을 뜨는 날이면 떠나가는 사람들보다도 보내는 사람들이 더 언짢아하던 것이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내가 뜰 차례지!’
누구나가 이런 생각들이었었다. 그래서 그런 날은 온 동리가 마치 떼초상이나 난 것처럼 슬픔에 잠기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은 정반대였다. 보내는 사람들은 흥겨워하는데 신바람이 나야 할 사람이 되레 시무룩해하는 것이다. 오다가다 만나서,
"그래 얼마나 좋은가?"
하고 어렸을 적 친구들이 치하를 해도,
"좋아?"
숫제 퉁명을 부린다.
"그럼 좋지 않구! 자네야말루 이 장앳말 복을 왼통 통차지한 셈이네! 인저 우린 바랄 것두 없어! 자네가 도매금으루 다 넘겨갔거든!
말만이 아니라 모두들 진심으로 이렇게 부러워하던 것이다. 그러나 권 서방은 그런 말을 들은 체도 않고서,
"아니 그래, 대대루 살던 제 고향 뜨는데 좋단 말인가?"
이것은 사뭇 시비조다.
"여북이나 복을 못 타구나서 제 조상이 대대루 묻힌 고향을 등지구 그 살얼음판 같은 서울 바닥으루 쫓겨나겠는가? 거 백사지 땅으루 ─ 뭐니뭐니해두 한 서방 섬기는 게 계집으룬 상팔자구, 조상이 물려준 가대 지키는 게 복 중엔 상복이니! 팔자 중엔 상팔자구! 모르는 사람들은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남이 진 곡식에 남이 지어준 밥 먹는 게 좋은 팔잔 못 되느니! 그저 사람은 제 운력에 사는 게 젤 존 팔자니…"
마치 살다 못해서 남의 집 드난이나 살러 가는 듯싶은 말투다.
그러나 권 서방의 이런 말을 동리 사람들은 또 자기네대로 해석을 하던 것이다.
"그 사람 공연히 똥꾸멍으루 호박씨 까는 수작이지, 안 좋긴 뭐가 안 좋아? 게딱지 같은 촌가에 살다가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식모가 둘씩 셋씩 되구, 아침에 일어나면 영감마님 기침하셨소이까? 하구서 세숫물을 떠다 바친다, 기름이 질질 흐르는 쌀밥에, 고기에, 생선에, 상다리가 척척 휘도록 만수성찬을 차려다 대령하겠다… 아 먹어지자면 술이 없겠나 떡이 없겠나? 그야말루 상감님 부럽잖지만 괜히 하는 소리야! 아무러면 일년내 두더쥐처럼 땅만 파는 신세에다 대?"
"그럼, 다 하는 소리지!"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된 사람이니…그 사람이 사람이 된 것은 딴사람 같아 보게나. 그렇게 뽐내구 서울엔 가게 됐구 하니 희짜두 놓구 풍두 치구 해서 거드럭대련만 다같이 고생하던 사람들은 두구 자기 혼자 잘돼 가니까 그게 맘에 송구스러워서 귀양살이나 가는 듯이 우는 소리를 하거든! 그 사람이 그런 데가 장하니, 장해!"
이렇게 앞질러서까지 선의로 해석해주기도 했지만 아들로부터 서울로 올라오라는 편지를 받은 이후의 권 서방의 심정은 이렇듯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
작년 겨울 삼성이가 집에 다니러 왔을 때도 그런 이야기가 있기는 했었다. 요새 좀 셈이 펴이니 내년 봄쯤에는 품값도 안 나오는 농사 집어치우고 서울로 올라오라던 것이었다. 삼성이는 부대에 채소, 콩나물 같은 부식을 대고 있었지만 무슨 브로커를 한 것이 뜻밖에도 성공을 해서 돈천만 환이나 벌게 됐다는 것이다.
그것만 갖고 잘 굴리면 아버지 어머닌 평생 걱정은 없다고 큰소리를 하고 간 후로는 할멈은 신바람이 나서 서울 서울 했지만, 권 영감은,
"말이 그렇지, 햇비둘기 등성이 넘었겠다구? 제가 벌면 얼마나 벌었을라구! 제 식구만 해두 애들이 셋에, 부리는 애까지 있다니 여섯 식구가 아닌가! 그저 우리 걱정을랑 말구서 저희들이나 끽소리 없이 살라구 그래!"
마치 남의 말 하듯 한 권 서방이다. 서울 소리에 설치고 나서는 할멈을 주장질하느라고 한 소리이기도 했지만 권 서방은 자식의 형편이 좀 피이어 늙은 내외를 불러올려 간다 해도 지척지척 따라설 생각이 아니었다.
첫째 자기 자식이지만 권 서방은 삼성이가 맘에 들지 않았다. 약게는 굴지만 남을 휘감아먹는 버릇이 어려서부터 있던 것이다. 하다못해 밭매기를 해도 그랬다. 아비 눈 속이기에만 이골이 났지 진득하니 일에 집착을 못하는 성격이었다. 어려서 저희들끼리 노는 것을 보아도 판판이 남의 종애만 곯렸었다.
참외 서리를 해도 저는 옷만 맡고 있고 어린것을 꾀어 발가벗겨서 밭에 들여보낸다. 들키면 옷만 갖고 도망을 쳐서 저만 쏙 빠져버린다. 이런 꾀가 자라서 결국 삼성이는 농사를 내어던지고 집을 나가버렸지만, 콩 심어 콩 걷고 팥 심어 팥 걷이 할 줄밖에 모르는 권 서방한테는 박덩굴에서 수박을 따는 재주를 피우는 삼성이가 마음에 들지도 않던 것이다.
"다른 것이 도둑눔이 아니니라. 씨 안 뿌리고 추수해 먹자는 심사가 바루 도둑눔의 심사! 공짜 바라는 게 바루 도둑눔이란 말야…"
아들의 그런 일면을 발견한 후부터 권 서방은 아들과 마주 앉기만 하면 이렇게 타일렀었다.
"너 노름꾼 잘사는 것 보았더냐? 늘 따지! 늘 따는 것 같지? 허지만 공으루 들어온 재물은 공으루 없어져! 제것만 갖구 나감 또 좋게시리? 물구 나가! 물구서! 그런 맘보 갖군 농사꾼은 못 되느니라!"
"아니, 왜 걔가 농사꾼 되기가 소원이래유? 그 알량한 농사꾼 될까봐 겁나우! 남들은 이 짓 않구서두 잘만 먹구 삽디다."
아내가 하던 소리다.
"그래, 어떤 짓을 하구 먹구 살던고? 남의 집 중방 밑 파구서?"
"왜 하필 도둑질에다 갖다붙여!"
"그럼 뭐야? 제 처지 생각 않구 남의 것 넘겨다보는 게 도둑이지, 도둑은 뭐 다른 줄 알아? 이 멍추야! 농군의 자식이 농삿일 잘 배워서 농사질 생각은 않구 괜시리 남 복 많이 잘사는 살림만 넘겨다보니 도둑눔이지 뭐야? 재물이구 복이구 다 제가 구실을 해야만 차례가 오는 거야! 복받을 구실은 않구서 복이 쏟아지기만 바래? 그물을 치구서야 고기 잡히길 바래야지? 그래 남들은 대학교까지 다니구서두 헤어나지를 못하는데 게우 그 잘난 눔의 시골구석의 농업학교 다니구서 왼 세상 큰 재물이란 재물은 모두 탐을 내?"
삼성이가 석간수 다리 청부를 맡아서 돈 십오만 환이나 벌었을 때만 해도 그랬다.
일 년 가야 천환 한 번 만져보기가 어려운 시골구석에서 십오만 환 돈을 벌었고 보니 이웃간에도 이야깃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권 서방은 그 십오만 환 돈을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저 십오만 환이 저 자식 아주 버려줄 껄그랴!"
하고 외면을 했었다.
"원 즈 아버지두! 나이 어린것이 그렇게 큰돈을 벌었으니 추어주진 못하구, 웬 윽박지르기만 한대유!"
못마땅해하는 할멈을 권 서방은,
"거 등신 같은 소리 작작 해! 저게 숙맥이라니까, 숙매! 나라서 일 시킬 제 품이나 팔아먹으라구 시켰겠지, 단지 보름에 십오만 환씩이나 벌어먹게 시켰을 상싶어서 하는 소리야? 제 눔이 누구 등을 치거나 쳤기에 그런 돈이 떨어졌지! 품삯을 잡아 떼었거나 물자를 덜 썼거나 그 멘서기눔하구 짰거나, 안 그렇구야 그런 큰돈을 떨어질 리 없잖아? 보름 일에 십오만환씩 떨어지게 나라의 돈을 내줬다면 그눔의 나라 망했지 별수 있던가베! 저 자식 인저 그 십오만환에 맛을 들였으니 틀렸어! 틀려! 공돈만 눈에 버언해서 되나? 더구나 콩 심어 콩밖에 안 나는 농사에 취밀 붙이겠다구? 두구 봐요, 글쎄. 내 말이 그른가 ─ "
권 서방의 예언은 빗나가지 않았었다. 삼성이는 그 십오만 환을 가지고 집을 뛰쳐나가더니 어떻게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병정도 안 가고서 군복을 입고 몇 해에 한 번씩 집에 들어오고는 하던 것이다.
그 끝에 어쩌다 모갯돈이 생겼다는 것이니 권 서방한테는 미덥지도 않았거니와,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찐덥게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권 서방이 서울 간다는 게 그렇게 신푸녕해하는 데는 이보다도 더 큰 딴 이유가 있었다. 농터를 버리고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농터라야 논 엿 마지기에 밭 하루갈이가 있을 뿐이었지만 이 엿 마지기가 그야말로 육십 평생 피땀을 흘려 겨우 마련한 농토였다. 왜정 때는 감히 꿈도 못 꾸었던 자작농이었다. 해방이 되자 한동안 무상으로 농토를 나누어준다고 했지만 천지 이치가 공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 신념이 되어 있는 권 서방한테는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었다.
"무슨 눔의 팔자에 내 땅을 부쳐보랴."
이렇게 체념을 하고 그저 꾸벅꾸벅 남의 소작을 해오는 권 서방 앞에 뜻밖에도 희한한 기적이 나타났었다. 새로 선 우리나라 정부가 지주들한테서 땅을 빼앗아서 연부로 작인들한테 판다는 것이다.
"그건 말이 되는 말이야!"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연부로 준다는 말만은 권 서방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권 서방이 아직 어렸을 적 일이지만 왜정 때도 그런 일이 한 번 있었던 지라 제 땅은 평생 가져보지 못하느니라고 단념하고 있던 권 서방은 신바람이 났던 것이다.
물론 제가 부치던 땅은 작인한테 살 권리가 있다던 말대로는 안 되었지만 지주와 바꿈질을 해서 지금의 엿 마지기를 샀던 것이다. 이 마석지기 밖에 안 되는 모래논을 그야말로 연차계획을 배토도 하고 환토도 해서 지금은 제법 흙이 제 빛이었다. 남들이 상환미를 반도 못 물고 옛날 지주한테 빚을 쓰는 동안에도 권 서방은 이를 악물고 이것을 갚았었다.
나이 육십에 오름길만으로 십리가 넘는 칠왕산 먼산나무를 해서 이십 리나 되는 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짚신 신는 풍습이 없어진 지도 오랜 장앳말이다. 그러나 권 서방은 짚신도 삼아 신었고 담배도 반으로 줄였었다. 정말 눈을 뒤집어쓰고 상환을 끝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금년 봄이다.
이 농터를 버리고 고향을 뜬다는 것이 권 서방한테는 참기 어려운 미련이었다. 아니 고통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삼성이는 농터와 집 일체를 팔아버리라는 것이다. 다 듣는다 해도 이것만은 죽어도 싫었다.
"놔두면 누가 떼 메고 간다더냐? 어우리로 해서 가을에 양식을 갖다 먹어도 자미구… 그것만은 안 된다! 농토까지 팔아버리잔다면 난 안 간다… 가겠으면 즈 어머니나 가우. 난 혼자서라두 여기서 살 테나!"
논 엿 마지기, 밭이 천이백 평에 밤갓 관리권까지 넘긴다면 백오십만 환까지 주겠다는 사람까지 나섰고 보니 이런 돈을 묻어둘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아들의 말이었다.
"백오십만 환이면 한 달에 팔부만 쳐두 십이만 환이어요! 그만두 일 년이면 백사십만 환 아닙니까. 이런 구석에다 쌀 서너 가마 받자구 썩여서 뭘해요?"
이것이 아들의 주장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기도 했다. 그러나 권 서방은 막무가내였다. 죽으면 죽었지 땅만은 파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들로 본다면 그만 돈을 시골에다 처박아둘 필요도 없었지만 사실 이만 돈도 당장 큰 보탬이 되어서였지만 어쩔 도리는 없었다.
그래서 땅은 가장 착실한 성춘식한테 어우리로 주기로 하구 권서방네 세 식구만이 서울로 올라갔던 것이다.
"이것두 다 갖다 쓰게나."
하구 권 서방은 가래며 써레, 괭이, 삽, 호미 등 농구는 물론 맷돌이다, 절구다, 키, 체, 심지어 자리를, 신골까지를 차곡차곡 챙기어주며 이렇게 말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다지는 것도 잊지 않았었다.
"허지만 아주 주는 것은 아닐세! 나 다시 내려올 땐 써서 없어지지 않는 건 다 내주어야 하내!"
그리고 권 서방은 온 동리 사람들의 배웅을 받고 서울로 올라갔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