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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향 수필방

납량이제-백신애

작성자오솔향|작성시간26.06.12|조회수32 목록 댓글 0

납량이제-백신애

 

분야: 어문 > 수필 > 경수필/수필

저작자: 백신애

원문 제공: 한국저작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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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水[수]○○千葉際[천엽제]

樹[수]○風雨百年間[풍우백년간]

 

이라는 한시구(漢詩句)는 뒷방에서 목청 빼가며 글 읽을 때, 나이는 열두어 살 되는 그때에 담뱃대 물고 것덕 것덕 졸기 잘하던 노선생(老先生)에게서 얻어 들은 것이었다. 그때 배우기는 꽤 숱하게 배우는 척은 했었지만 지금 간간이 그때 책을 펴보아도 ‘네 언제 배웠더냐’하고 모조리 초면(初面)같다.

 

앵무새 말 배우듯, 맹인(盲人) 단청(丹靑) 구경하듯 입으로 줄줄 외우기만 하면 뜻이야 알던 모르던 관계 없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따금 어쩌다가 한마디씩 잊혀지지 않고 정답게 ‘왜 그때 언제 나를 배우지 않았니?’하고 기억 위에 나타나 줄 때가 있는 것이다.

 

연전(年前)에도 이른 더위 어느 날 노소(老小)를 섞어 가정부녀(家政婦女) 몇 사람들과 팔공산중(八空山中)에 약수(藥水)를 찾아갔다가, 그 곳의 산수경개(山水景槪) 하도 좋아 좁은 가슴이 감흥(感興)에 못 이겨 깨어질 것 같았는데 이 시(詩)가 문득 생각났었다.

 

만고강산(萬古江山) 유람할 제

죽장(竹丈) 집고 망해신어라.

 

하고 여인(女人)들은 제각기 한마디씩 소리를 내놓았다. 얌전스런 여염집 부녀(婦女)들이라도 소리 한 곡조 모르는 이가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 소리도 모르는 이는 둥실둥실 춤을 추고, 또 이도저도 다 모르는 이는 "좋다." 하고 타자(字) 한자(字)만을 음악적 고성(音樂的 高聲)으로 하여 제각기 흥을 푼다.

 

그때 비로소 처음 느낀 바는 아니었지마는 사람이란 괴상스런 동물(動物)이라. 좋은 경개(景槪)를 보면 왜 작고 소리를 지르고 슬픈 것인지. 절승경개(絶勝景槪)를 대하여 묵묵히 입 다물고 있지는 못하는 것 같았었다. 고일(高一) 꼼꼼히 얍얍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비록 여자(女子)라 하더라도, 아무리 제가 제라도

 

"에 ─ 아 ─ 무짝에도 못 쓰는 뺑, 뺑덕이"

 

라는 것이다. 사람이란 체면상으로라도 좋은 경개(景槪)를 대하여 한 곡조(曲調)로나마 풀어내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여럿은 제각기 박록주(朴綠珠)도 되고 이동백(李東伯)도 되어 세○와 화열(火熱)을 ○적 벗겨주는 그 시원스런 풍경(風景)속에서 각자(各自)를 잊고 잊고

 

"이런 경치(景致)가 또 있나! 좋다 ─."

 

라고 쪼들리던 인우(人牛)들이 대자연(大自然) 앞에서 비로소 해방(解放)을 밟은 듯이 "즐거워." 라고 야단들이었다.

 

이 판 속에서 부끄럽고 기막히게도 나는 그렇게 흔해 빠진 "아리랑 흥흥흥."도 하나 내놓을 수 없는 쫄딱 무식(無識) 성텅이였지마는 가슴에 감흥(感興)만은 남들같이 푹푹 솟아 나와 어쩔 길이 없었다. 그래서 되는 대로 목구멍을 뒤져 대니까 천만의외에 미리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한번 들은 이후 뒷풀이도 해 본 적이 없는 이 시구(詩句)가 툭 튀어 나왔던 것이다.

 

이 곳에 오니 부채도 소용 없다 부서지려거든 부서지렴.

 

“윤수(潤水)는 은 ○○아아 ─ 아” 제법 무엇같이 수렴 떨며 발바닥 두들기고 "으어 ─ 어." 하고 시(詩) 읊조리던 노선생(老先生)의 그 본 그대로 고래고래 소리를 높여 읊조려 던졌다.

 

제가 무슨 유식(有識)자랑이나 하려고 한시(漢詩)를 척 ─ 내놓은 것은 결코 아님을 알아줌인지 뜻이야 알았던 몰랐던지 간에 여럿은 "좋다."를 연발하며 장단을 운치(韻致)있게 맞추었다.

 

그때 얼른 생각해보니 어찌된 심판이든 간에 그 답답하던 때 생광스럽게도 잊혀지지 않고 목구멍에 떠올라와 준 그 시(詩)가 고맙고도 감사하였다. 그뿐 아니라 더 다행(多幸)은 그 시(詩)가 그 날 그 경치(景致)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으므로 새삼스럽게

 

"맹인단청(盲人丹靑) 구경도 영 허사(虛事)가 아니로다."

 

라는 느낌이 생겨났다. 맑은 무른 게골 풀잎사귀 사이로, 사이로 옥(玉)을 굴리며 진주(眞珠)를 띄우며, 흘러 흘러 내리고, 구부러진 늙은 장송(長松)은 만리(萬里) 저쪽 소식(消息)을 알려는 듯 서늘한 바람결을 잡고 현들거리고 푸른 풀, 축여진 흙은 유향(幽香)을 떨쳐 사람에게 신선(神仙)의 맛을 알게하며, 그 위에 또 새까지 노래하여 일운(一韻)을 돋우니

 

약사량공막차경(若使良工模此景)

기어림하조성하(其於林下鳥聲何)

 

라는 예 생각이 또 하나 떠오르며, ‘새소리야 토끼에 부탁하지만은 이 향(香)내는 어찌할가……’하는 즉흥(卽興)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작년(昨年) 가을 신문부록(新聞附錄)으로 불어온 추(秋) 제(題)란 그림을 보았든 그때 또 ○○○○○○○이라는 시(詩)가 생각났다. 기억에 남은 것이 이 시(詩) 하나뿐인지 풍경(風景)을 대하면 이 시(詩)가 나오니 나의 무식(無識)이 새삼스럽게 느끼워지지 않는 바는 아니나 추이제중(秋二題中)이라는 그림은 맑은 공기(空氣) 서늘한 산(山) 그림자에 담뿍 한 포기 사리나무를 근경(近景)으로 그린 것인데, 그 둥글 갈숨한 잎사귀. 잎사귀 사이로 미풍(微風)이 살랑거리고 있는 듯한 그 산뜻하고 살랑살랑한 맛이 ○○○○○○○의 경(景)을 연상(連想)케 하였던 것이었다.

 

또 한 장은 홍엽(紅葉)이란 제(題)의 그림으로서 수목(樹木)이 울울한 산중심곡(山中深谷)에 붉은 물이 방금 들리려는 황록(黃綠)의 간색(間色)인 수목(樹木)의 천겹 만겹 엉키인 잎사귀는 심곡(深谷) 깊은 곳까지 와 욱하게 보이며 근경(近景)에 홍엽(紅葉) 몇 가지가 이리저리 내밀어 나무 아래 우거진 풀들 사이에 암청(暗靑)으로 흐르는 물 위에 뻗쳐 있었는데 그 심유(深幽)한 맛이 수○풍우백년간(樹○風雨百年間○)이라는 박굿짝과 한데 붙는 그림과 같이 느껴지며 마음에 들었다.

 

왜 그런지 그림과 시(詩)의 안짝이 불경(不敬)하고 죄송하나 맘에 탈스럽지 않게 여기어졌다. 마치 담력(膽力)은 없으면서도 두○頭○만 영리하여지며, 살살 눈앞이나 수습하려고, 이기(利己)○○고, 까불거리고, 자칫하면 팍 솟아지고, 까딱하면 작돌아가는 소(小)부루적(的) ‘모더 ─’젋은이들의 취미에나 들어 맞을 것 같다고 생각되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두 그림 중에서 ○를 취(取)할 사람은 없을거야’라고 나는 제 주관(主觀)만을 만족하고 두 그림을 벽에 붙였다. 그 후 어느 때 한 동무에게 시험적으로 물어봤다. 나는 그때 동무의 눈을 내 눈으로 믿었음인지 미리 그의 대답을 속으로 예측해 맞힌 후

 

"만일 이 그림을 더 큰 종이에다 그린다면 이 수림(樹林) 위에 고령(高嶺)이 솟고 그 위에 ○○한 백운(白雲)이 걸려 있게 할 거야. 사람이 이런 풍경(風景) 속에 있으면 나 같은 소인(小人)이라도 좀 커질 것이며, 진정(眞正)한 용기(勇氣)와 침착(沈着)한 지혜(知慧)도 생겨나면 단련될 거야."

 

하고 한껏 홍엽화(紅葉畵)를 올려 세우는 중인데 그 동무 입이 비슷하며

 

"아이, 이 그림은 산뜻한 맛이 없구려, 나는 명랑하고 산들산들한 맛이 있어 맘에 드는데. 저런 무늬로 여름 치마 해 입었으면……."

 

하고 나의 입을 떡 달라붙게 하였다.

 

"에 ─ 취미도 천박(淺薄)하다."

 

나는 비위가 틀어졌다.

 

"그러면 이 음울하고 명랑하지 못한 홍엽화(紅葉畵)가 좋단 말인가? 현대인(現代人)은 좌우간 명랑(明朗)이 제일(第一)이야."

 

그는 나를 조롱한다.

 

"글쎄, 높은 산이 있으니까 가픈 골이 있는 것이니, 세상(世上)이 모두 꼭 한 가지, 한 모양뿐이라면 우스울 걸……."

 

나는 이렇게 간신히 자위(自慰)하며 입을 닫아 버렸다.

 

[2]

 

벌써 몇 해 전(前) 일이다. 아주 더운 여름 사십 일(四十日)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아서 콩 볶듯 사람이 타닥타닥 볶일 것 같이 덥던 여름날이었다.

 

자미 더움을 잊고서 새로 지은 백색(白色) 옷을 산뜻하게 가려 입고 동무와 같이 늘 다니는 식당(食堂)에 갔었다. 이 식당(食堂)에는 여름이면 커다란 빙주(氷柱)를 해 세워둠으로 우리들은 이 기둥 곁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스윽 들어갔다. 머리카락 사이가 으쓱하여지며 말라붙어 숨만 나오던 목구멍○○○○○○○○○얀 크로스 일륜갑 꽃병 든 눈에 ○미(味)를 도우며 몹시 상쾌하였다.

 

"예, 여름에는 흰 것보다 옥색(玉色)이 더 시원해 보이더라. 이 식탁 크로스도 옥색(玉色)이면."

 

하고 나는 비로 백색(白色) 옷을 입었을망정 옥색(玉色) 예찬을 하였다. 공교롭게도 옥색(玉色) 드레스를 입은 동무는 자기를 비꼬는가 함인지 벌컥

 

"어떻단 말이냐. 네 옷도 옥색(玉色) 칠을 해줄까 보다."

 

싱거웁고 장난 잘하기는 피차 미치지 않는 사이였음으로 행여나 하는 생각에 잠잠하였더니 그는 자꾸 티를 뜯기 시작하였다.

 

"더울 때는 뜨거운 것을 마셔야 덜 더워."

 

하며 그는 뜨거운 커피를 주문하였다. 나는 밀크 쉐이크를 주문하고 있는 판인데 급사가 주문한 것을 가져오니까 그는 달랑 밀크 쉐이크를 들고 가버린다. 나는 사람들이 보는 식당에서 싸움도 못 하겠고 그대로 꿀꺽 참으며 뜨꺼운 커피를 앞에 놓았다.

 

"어디 보자."

 

나는 깃굿 동무를 흘겨 주고 다시 밀크 쉐이크를 더 주문하였다.

 

"넌 참 우습더라. 시켜서 먹으려거든 아예 당초에 찬 것을 청하지……."

 

하고 시치미를 뗐다.

 

"넌 그러면 이 커피를 죄다 비옷에 들어 부을테야."

 

나는 분이 나서 울어대니까 그는 덜렁 커피잔을 들고

 

"더울 때는 냉수욕(冷水浴)보다 뜨거운 물로 해야 되는 거야. 나는 목욕을 했어. 그만 둘 테냐. 너나 시켜줄까……."

 

하며 나에게 뿌릴 형용을 했다.

 

"오냐 뿌릴려거든 뿌려보아라."

 

나도 기가 나서 덤벼들었다.

 

"정말이냐? 사정없다……."

 

"그래 뿌려나 보자."

 

이럴 때 내 편에서 뿌리라고 덤벼들면 들수록 상대(相對)편이 슬슬 뒷걸음치는 것이 보통인 터이라, 나는 그의 진검(眞儉)한 표정(表情)에 호기심(好氣心)이 바싹 일어나서

 

"네까짓 것이 붓기만 해봐라."

 

하고 치마를 치켜들었다.

 

그는 나의 가슴을 향(向)하여 활짝 커피를 쏟아 부었다. 그리고는 태연스럽게 씩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순간(瞬間) 뜨거운 것도 새 옷을 죄다 버린 것도 생각나지 않고 그저 놀랐었다.

 

칼을 들고 찌르려는데 피해 달아나는 사람보다

 

"찔러라 하고 배를 내미는 사람이 더 비겁(卑怯)한 것이다."

 

라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스스로 부으라고 덤벼들은 나의 비겁(卑怯)함이 부끄러워져서 행여나 동무가 불쾌하게 느낄까하여 나도 태연하게 있었다. 뜨겁던 것도 일순간 뿐 커피가 새어든 가슴과 배에는 여름 공기가 풍겨서 뱀이 안긴 듯 차가웠다.

 

"나는 충실한 너의 동무이니까 부으라는 그 원을 안 들어 줄 수야 있나. 고맙단 말은 말아라."

 

그는 예사였다.

 

"흐흥 하이칼라 같은 수작 말아라."

 

하고 서로 웃고 말았다.

 

좌우간 야금야금 생각만 하다 마는 것이 아니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면 덜컥 무턱대고 해놓고 보는 그러한 용단성이 있어야 진취(進就)가 있는 거며, 인생(人生)이란 모든 것이 다 모험(冒險)이니까 그는 반드시 나에게 가르침이 될 좋은 동무다. 라고 생각되었다.

 

그 후 어느 때 그는 나에게

 

"예, 너같이 미련한 인간은 다시는 없을 거야. 보통 사람이면 갓 갈아입은 옷이 그만치 버려지면 벌떡 일어나 피하든지 수건으로 닦으려고나 해 보던지 얼른 집에 가서 빨기라도 할 것인데. 너는 마치 남의 옷을 버린 것 같이 한번 내려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어느 때같이 그대로 입고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못 이겼다. 항복한다 하였다. 대단히 미안한 일일세."

 

하였다. 그 말에 나는 ‘이 동무도 별일 없는 평범한 인간(人間)에 불과(不過)하구나’하는 실망(失望)이 들었다. 나는 동무가 커피를 붓고도 속까지 태연해 주었으면 싶었던 까닭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라는 인간(人間)도 왼만히 이단(異端)에 가까웠던 것임을 알겠다.

 

<재편집: 오솔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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