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사학회 제373차 역사문화 유적 답사
충청북도 제천답사 자료집
일시: 2026년 05월 30일(토)
지역: 충청북도 제천지역
배론성지(최양업신부 묘소 참배), 제천의병전시관(자양영당),
의림지(의림지역사박물관), 청풍문화유산단지
주최: 서울문화사학회
주제: 청풍명월을 찾아서
일정: 5월30(토)
07:30 출발 준비(종로3가역(3,5호선)6번 출구
08:00 제천으로 출발
10:00 배론성지 관람(최양업신부 묘소참배)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96 ☎043.645-4527)
11:30 출발
11:40 중식 사또회관(☎043.653-4960)
(제천시 봉양읍 제원로 394)
12:40 의병전시관으로 출발
(제천시 봉양읍 의암로 566-7 ☎043.641-4811)
13:10 의병전시관(자영영당) 관람
14:00 의림지로 출발
(제천지 의림지로 33 의림지 주차장 ☎043.651-7101)
14:30 의림지(의림지 역사박물관) 관람
15:30 청풍문화유산단지로 출발
(제천시 청풍면 청풍호로 2048 ☎043.641-6734)
16:10 청풍문화유산단지 관람
17:10 서울로 출발
19:20 서울 양재역 도착(예정)
1. 제천의 지역 개관
가. 지명유래
제천(堤川)이라는 이름은 글자 그대로 '냇둑(제방)'과 '시내'를 뜻합니다. 이는 제천의 상징이자 삼한시대의 대표적인 수리시설인 의림지(義林池)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고구려 시대:당시에는 '내토군(奈吐郡)'이라 불렸습니다. '내(奈)'는 시내(川)를, '토(吐)'는 방죽이나 제방(堤)을 뜻하여, 예나 지금이나 '물과 제방의 고을'이라는 고유의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지명의 정착:고려 성종 때 '제주(堤州)'라는 별칭으로 불리다가,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이르러 비로소 오늘날의 이름인 제천(堤川)으로 정착되었습니다.
나. 역사적 변천
제천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을 갖추어 고대 철기 문화와 중세 문화가 고루 발달한 곳입니다. 선사~삼국 시대:송학면 점말동굴 등에서 구석기 시대 유적이 발견되어 유구한 거주 역사를 증명합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내토군이었으나 신라 진흥왕 때 신라 영토로 편입되었고, 통양군(通洋郡)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조선 시대:1413년 제천현이 되었으며, 중앙과 영남·호서지방을 잇는 주요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제천군과 청풍군으로 각각 승격되었습니다.
근현대~통합 시기: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청풍군이 제천군에 병합되었습니다. 1940년대 이후 중앙선, 태백선, 충북선 철도가 교차하면서 중부 내륙의 핵심 교통 거점이자 시멘트 산업의 중심지로 급성장했습니다. 1980년 제천읍이 제천시로 승격되면서 제천군과 분리되었다가, 1995년 시·군 통합을 거쳐 현재의 통합 제천시가 완성되었습니다.
다. 지역특성
(교통∙물류의 요충지) 3도 접경지역(충북,강원,경북)의 중부내륙권 중심지
+자형철도(중앙선․태백선․충북선 교차)/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 동서고속도로)
(관광휴양도시) 천혜의 자연환경과 관광자원을 보유
3대 국립공원(월악산, 소백산, 치악산) 중심에 위치, 의림지, 박달재, 청풍호반 등
(사계절 축제도시) 계절별 지역 테마를 반영한 축제 개최
청풍호 벚꽃축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한방바이오박람회, 겨울왕국 제천페스티벌
(한방천연물특화도시) 지역 신 성장 동력산업을 창조하고 선도
한방바이오산업, 영상문화산업, 지식재산산업, 유통산업이 지역발전 견인
라. 석회암이 낳은 거대한 시멘트 산업
카르스트 지형을 만든 주성분인 석회암(탄산칼슘)은 시멘트의 핵심 원료입니다. 제천은 양질의 석회암이 무궁무진하게 매장되어 있어, 일찍부터 대한민국 근대화를 이끈 시멘트 산업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산업의 발상지, 송학면과 아세아시멘트:제천시 송학면에는 국내 시멘트 업계의 거두인 아세아시멘트 제천공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가동을 시작한 이 공장은 제천 고유의 풍부한 석회암 매장량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도로, 아파트, 빌딩을 짓는 데 쓰인 시멘트를 쉼 없이 생산해 왔습니다.
***한눈에 보는 우리나라 시멘트 산업 비교***
우리나라 전체 시멘트 연간 총 생산량은 건설 경기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약 4,800만 ~ 5,000만 톤 안팎에서 형성됩니다. 이를 회사별 점유율과 지역으로 묶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 회사명 | 내수점유율 | 주요 공장 위치(지역) | 지형적 물류 특징 |
| 한일·한일현대 | 1위(~23%) | 충북 단양, 강원 영월 | 내륙형 (철도·육로 운송) |
| 쌍용C&E | 2위(~22%) | 강원 동해, 강원 영월 | 해안형 + 내륙형 (선박·철도) |
| 아세아·한라 | 3위(~19%) | 충북 제천, 강원 강릉 | 내륙형 + 해안형 (철도·선박) |
| 성신양회 | 4위(~13%) | 충북 단양 | 내륙형 (철도 중심) |
| 삼표시멘트 | 5위(~12%) | 강원 삼척 | 해안형 (선박 중심) |
마. 행정구역과 인구
제천시는 전형적인 '도농복합도시'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시내 중심가에 인구가 집중된 구조입니다. 제천시의 행정구역은 1읍, 7면, 9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읍·면 지역:봉양읍 / 금성면, 청풍면, 수산면, 덕산면, 한수면, 백운면, 송학면
동 지역:교동, 의림지동, 중앙동, 영서동, 전선동, 화산동, 신백동, 청전동, 두학동 등
인구 현황(26.4,30현재)
- 인 구 수 : 128,382명(남 64,807, 여 63,575)
※ 전월대비 113명 증가 (남 +56, 여 +57)
*고려인 동포 이주 현황(2026. 4. 30. 기준)
- 414세대 1058명(이주 완료 142세대 355명)
특징:지방 소멸 흐름과 맞물려 최근 인구 13만 명 선이 완만하게 붕괴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인구의 약 80% 이상이 시내 동(洞) 권역에 밀집해 거주하고 있으며, 읍·면 지역은 고령화 지수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납니다.
2. 배론성지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위치한 배론성지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고난과 희망, 그리고 거룩한 헌신이 모두 집약되어 있는 가장 대표적인 성역(聖域)입니다.
'배론'이라는 독특한 이름은 성지가 위치한 계곡의 깊고 긴 모양이 마치 배 바닥의 돛대 구멍(舟論)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순우리말 지명입니다. 박해 시대 신자들이 눈을 피해 숨어들었던 이 깊은 골짜기가 한국 천주교회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꾼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곳이 지닌 세 가지 거대한 역사적 의미와 구조를 함께 짚어보시면 좋습니다.
가. 성 요셉 신학교 (한국 최초의 신학교)
배론성지에는 1855년(철종 6년)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한국 최초의 신학 교육기관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있었습니다.
설립 배경:당시는 천주교 박해가 지속되던 시기였으므로, 깊은 골짜기여서 눈에 띄지 않는 배론의 가옥을 위장하여 은밀하게 문을 열었습니다.
역할:최초로 국내에서 현지인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체계적인 라틴어, 수사학, 신학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약 10여 명의 신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하며 장차 한국 천주교를 이끌 목자의 꿈을 키웠습니다.
비극적 마감:그러나 1866년 한국 천주교 최대의 박해인 병인박해가 터지면서, 신학교를 이끌던 프랑스인 교장 프티니콜라 신부와 푸르티에 신부가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신학생들도 뿔뿔이 흩어지면서 신학교는 설립 11년 만에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현재 배론성지에는 당시의 신학교 건물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나. 황사영(1775~1801)백서(黃嗣永 帛書)
본관은 창원. 자는 덕소이다. 승문원 부정자를 역임한 황석범의 유복자로 서울 아현에서 태어났다. 남인 시파에 속한다. 1790년 16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정조는 그를 특별히 불러 격려하면서 나이 20세가 되면 벼슬을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때 정조가 황사영의 손을 잡아주었데, 그는 이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손목을 명주로 감고 다녔다 한다. 같은 해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정난주와 결혼하여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승훈과는 사돈간이 되었고, 초창기의 교회를 이끌던 인물인 정약종과는 처삼촌지간이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였던 황사영이 박해의 참상과 조정의 천주교 탄압 실태를 흰 비단(帛)에 적어 중국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입니다. 이 백서가 작성된 역사적 장소가 바로 배론성지입니다.
배론의 토굴:박해를 피해 배론으로 도피한 황사영은 옹기 구우며 사는 가마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지하 토굴을 파고 숨어 지냈습니다.
백서의 내용:그는 이 어두운 토굴 속에서 가로 62cm, 세로 38cm의 얇은 비단에 무려 13,311자의 가는 붓글씨로 박해의 경과, 순교자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했습니다. 더불어 서양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조선 조정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게 해달라는 극단적인 방책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결말:하지만 이 비단 편지를 품고 북경으로 가려던 가톨릭 신자 황심이 체포되면서 백서는 사전에 압수되었고, 황사영 역시 배론 토굴에서 체포되어 대역죄로 능지처참을 당했습니다. 압수된 원본 백서는 현재 바티칸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배론성지 토굴 안에는 정교한 복제품이 전시되어 그날의 긴박했던 흔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다.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묘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 이어 한국인 역사상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1821~1861)가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는 곳이 바로 배론성지 뒷산입니다.
'땀의 순교자':김대건 신부가 피를 흘려 순교했다면, 최양업 신부는 평생 발로 뛰며 땀을 흘린 순교자였습니다. 그는 신유박해와 기해박해로 흩어진 전국의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11년 동안 매년 수천 리를 걸어 다니며 은밀하게 성사를 집행했습니다.
배론과의 인연과 선종:최양업 신부는 배론 신학교를 세우는 데 깊이 관여했으며, 자신이 사목 순방을 마치면 언제나 배론으로 돌아와 신학생들을 격려하고 휴식을 취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1861년, 격무에 시달린 몸으로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경북 문경 부근에서 40세의 나이로 선종(사망)하셨습니다.
묘소의 위치:그의 시신은 동료 신부와 신자들에 의해 그가 평소 사랑했던 배론으로 운구되어, 당시 성 요셉 신학교가 내려다보이는 진흙 가마터 뒷산 기슭에 안장되었습니다. 현재 그의 묘소는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그의 거룩한 삶과 헌신을 기리며 찾는 핵심 참배지입니다. (현재 교황청에 의해 시복
3. 자영당∙의병기념관
가. 자양영당 (紫陽影堂) — 의병의 정신적 뿌리
자양영당은 충청북도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된 사당으로, 제천의병이 탄생하게 된 사상적 배경과 행동 지침이 마련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설립과 강학:원래 이곳은 조선 후기 화서학파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유중교(柳重敎)가 1889년에 '창주정사'를 세우고 후학을 기르던 학문의 터전이었습니다. 이후 1906년 유림들에 의해 영정을 모시는 사당인 '자양영당'으로 창건되었습니다.
봉안된 인물:유교의 성현인 주자(朱子)와 조선의 거유 우암 송시열, 그리고 화서학파의 주맥을 잇는 이항로, 유중교를 비롯해 훗날 의병장으로 활약한 의암 유인석, 이소응 등 총 6인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역사적 의의 (처변삼사):1895년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와 단발령에 분노한 유생들이 이곳 자양영당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당시 의병장 유인석 선생은 선비들이 나라의 위기에 대처해야 할 세 가지 올바른 길인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했습니다.
거의소청(擧義掃淸):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쓸어버리는 것
거지수구(去之守舊):국외로 망명하여 민족의 자존과 옛 모습을 지키는 것
자정치명(自靖致命):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조를 지키는 것
이 지침에 따라 제천의 유생과 농민들이 일제히 결연히 일어나 격렬한 을미의병 항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나. 제천 의병기념관 (의병전시관) — 불꽃 같은 투쟁의 기록
자양영당 바로 옆에 위치한 제천 의병기념관은 한말 제천을 중심으로 전국 및 해외로 뻗어 나간 의병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활약상을 체계적으로 기록·전시한 박물관입니다.
전시 내용:의암 유인석 총대장을 중심으로 한 제천의병의 탄생부터 격렬했던 남산전투, 그리고 이후 만주와 연해주 등 해외로 이어지는 항일 독립운동의 전 과정을 유물과 미디어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주요 소장품:의병장들이 직접 입었던 옷(심의)과 유품, 당시 의병들이 일제의 신식 무기에 맞서 싸울 때 사용했던 화승총, 칼, 그리고 의병들의 격문과 기록물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4. 의림지
제천10경 중 제1경인 의림지는 삼한시대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저수지로 본래 ‘임지’라 하였습니다. 고려 성종 11년(992)에 군현의 명칭을 개정할 때 제천을 ‘의원현’ 또는 ‘의천’이라 하였는데 그 첫 글자인 ‘의’자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축조된 명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구전에는 신라 진흥왕(540~575) 때 악성 우륵이 용두산(871m)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을 막아 둑을 만든 것이 이 못의 시초라 전해집니다.
그 후 700년이 지나 현감 ‘박의림’이 4개 군민을 동원하여 연못 주위에 돌을 3층으로 쌓아 물이 새는 것을 막는 한편, 배수구 밑바닥 수문은 수백 관이 넘을 정도의 큰 돌을 네모로 다듬어 여러 층으로 쌓아 올려 수문 기둥을 삼았고 돌바닥에는 박의림 현감의 이름을 새겼다고 합니다. 현재는 수리시설보다는 유원지로서 그 명성을 더해가고 있는데, 2006년 국가명승으로 지정된 경승지로 호수 주변에 순조 7년(1807)에 세워진 '영호정'과 1948년에 건립된 ‘경호루’ 그리고 수백 년을 자란 소나무와 수양버들, 30m의 자연폭포 ‘용추폭포’ 등이 어우러져 풍치를 더하며, 호수 주변에 목책 길과 분수와 인공폭포를 설치하여 의림지를 관망하며 산책하기에 좋습니다. 특히, 겨울철 및 해빙기에 잡히는 공어(빙어) 회와 튀김은 담백한 맛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의림지에서 자생했던 순채는 임금의 수라상에 올릴 만큼 유명한 요리재료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 분이며 가야금의 대가인 '우륵' 선생이 노후에 여생을 보낸 곳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가야금을 타던 바위 우륵대(일명 제비바위, 연암, 용바위)와 마시던 '우륵정'이 남아 있습니다.
5. 청풍문화유산단지
1978년부터 시작된 충주다목적댐 건설로 수몰지구가 생기자 이를 아쉬워한 사람들이 이곳에 있던 각종 문화재를 한 곳에 모아 청풍문화유산단지를 조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단지 내에는 보물 2점(한벽루, 석조여래입상), 지방유형문화재 9점(팔영루, 금남루, 금병헌, 응청각, 청풍향교, 고가4동), 지석묘, 문인석, 비석 등 42점과 생활유물 2천여 점이 원형대로 이전 복원되어 있어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이어진 남한강 상류지역 청풍의 역사와 문화를 한자리에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충주댐 건설로 인해 제천 인근 3개 시군의 11개면 101개 리,동, 7천여가구, 4만여명의 인구가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총수몰면적 약50%가 제천지역을 차지하고 있고, 봉황이 호수 위를 나는 듯한 형상을 지닌 비봉산, 낙엽이 금은비단은 수놓은 산 같다 하여 퇴계 이황선생의 사랑을 받은 금수산 등 뛰어난 절경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여기에 비봉산 정상에서 청풍호를 조망할 수 있는 청풍호반 케이블카와 모노레일, 번지점프 등 레저체험, 산악체험, 한방건강체험 등 각종 테마체험시설로 제천 최고의 종합관광지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청풍 김씨***
청풍 김씨(淸風 金氏)는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 가문입니다. 조선 시대에 왕비 2명, 정승(상신) 8명, 대제학 3명을 배출하며 당대 최고의 권력과 학문적 명성을 떨쳤던 세도가 중 하나입니다.
1. 시조와 유래:시조 김대유(金大猷):신라 김알지의 후손으로, 고려 말기에 국가 최고 행정기관의 수장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습니다. 본관의 정착:김대유가 고려 조정에서 공을 세워 청성(淸城, 청풍의 옛 별호) 부원군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청풍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습니다. 시조 김대유의 묘소는 지금도 충북 제천시 수산면 도전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주요 분파:크게 판봉상시사공파(判奉常寺事公派), 청로상장군공파(淸虜上將軍公派), 영동정도총제공파(令同正都摠制公派)의 3대 파종으로 나뉘어 발전했습니다.
2.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 (2명의 왕비 배출)
청풍 김씨는 조선 왕실과 매우 긴밀한 혼인 관계를 맺으며 국구(왕의 장인) 가문으로서 막강한 위상을 가졌습니다.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 (현종의 정비, 숙종의 어머니):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로, 숙종을 낳아 기른 인물입니다. 사촌인 우의정 김석주와 함께 숙종 초반 정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조선 말기의 명성황후 여흥 민씨와는 다른 인물입니다.)효의왕후 김씨 (정조의 정비):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정조의 비가 되어 평생 검소하고 어진 덕을 베풀어 후궁들과 왕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가. 18대 현종의 비, 명성왕후 김씨 (明聖王后)
조선 중기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의 생몰년
출생:1642년 5월 17일(인조 20년, 음력 5월 25일)
사망:1684년 1월 21일(숙종 9년, 음력 12월 5일)
향년:41세(수기로는 42세)로 선종하셨습니다.
역사적 시기:17세기 중후반에 활약했으며, 아들 숙종이 왕권을 확립해 나가던 청년기 시절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위 기간:세자빈(1651~1659) → 왕비(1659~1674) → 왕대비(1674~1683)
나. 22대 정조의 비, 효의왕후 김씨 (孝懿王后)
조선 후기 정조의 곁을 지키며 자애로움을 베풀었던 효의왕후의 생몰년
출생:1754년 1월 5일(영조 29년, 음력 12월 13일)
사망:1821년 4월 10일(순조 21년, 음력 3월 9일)
향년:67세로 당시 기준으로 꽤 장수하셨습니다.
역사적 시기:18세기 중반 영조의 치세에 태어나 정조의 개혁 시기를 함께 보냈으며, 정조 사후 아들(양자)인 순조 대에 이르기까지 19세기 초반까지 생존하며 왕실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습니다.
재위 기간:세손빈(1762~1776) → 왕비(1776~1800) → 왕대비(1800~1821)
두 왕비는 약 112년의 세대 차이를 두고 청풍 김씨 가문의 명예를 높이며 조선 왕실의 역사를 장식했습니다.
3. 역사를 움직인 대표적 인물들 :청풍 김씨는 조선 중기 이후 조정의 핵심 요직을 독식하다시피 하며 수많은 천재 정치가와 학자들을 낳았습니다. 김식(金湜, 1482~1520):중종 때 조광조와 함께 도학 정치와 개혁을 주도했던 대사성(국립대학 총장 격)입니다.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기묘명현' 중 한 사람입니다. 김육(金堉, 1580~1658):김식의 증손자로, 한국 경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정치가입니다.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여준 대동법(大同法)의 실시와 전국적 확대를 위해 평생을 바쳤으며, 상평통보의 주조 및 유통을 주도한 영의정입니다. 김석주(金錫胄, 1634~1684):김육의 손자이자 숙종의 외사촌 형으로, 당대 최고의 지략가이자 우의정을 지냈습니다. 대동법을 완벽히 정착시켰으며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는 데 공을 세웠습니다. 3대 정승과 부자(父子) 영의정:김구(우의정) — 김재로(영의정) — 김치인(영의정)으로 이어지는 3대 연속 정승가문을 이루었으며, 김재로와 김치인은 보기 드문 '부자(父子) 영의정'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김석문(金錫文):조선 최초로 지구가 스스로 돈다는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한 선구적 실학자입니다.
4. 근현대의 인물들 :가문의 명성은 근현대 항일 독립운동과 문화·예술계로도 이어졌습니다. 김규식(金奎植):구한말 및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입니다.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며 민족 분단을 막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김윤식(金允植):구한말의 대문장가이자 정치가로, 3·1 운동 당시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항일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김유정(金裕貞):《봄봄》, 《동백꽃》 등으로 한국 근대 문학에 한 획을 그은 천재 단편소설 작가입니다.
백세청풍(百世淸風)의 정신:청풍 김씨 가문은 대대로 "맑은 바람과 같이 깨끗하고 높은 선비의 절개를 지키며, 백성을 위한 실용적 정치를 편다"는 가문의 자부심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본관지인 제천 청풍면 일대(현재 청풍문화재단지 주변)에는 이들의 자취와 가문 전설이 깊게 배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