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시에 정착하니 몸은 말랑해지는 거 같고 정신은 무뎌지고 마음은 다채로와 진 것 같다.
전에 살던 대도시도 딱히 나쁘다거나 불편하다고 느끼진 않았던 거 같은데
아니 오히려 많이 누렸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살다보니 그동안 무엇을 까맣게 잊었었는지 새삼 알게 되었고
내 삶에 어린 아이 같은 온전한 평화가 훅 들어온 느낌이다.
논과 밭들도 아파트 건물과 공존하며 당당히 주인공으로 펼쳐진 곳,
도로을 덮어 버릴 듯 하거나 내 머리위로 쏟아져 내릴 듯한 고층 건물들이 없는 곳,
이 곳에서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전에 살던 대도시, 도로 양쪽으로 고층 상가 건물들
그리고 바로 이어 겹겹 아파트 단지들이 산 중턱까지 들어차 있던 곳.
실체가 뭔지 몰랐지만 뭔가 막힌 듯,
도로에 서면 큐브에서 큐브로만 옮겨 다니는 느낌.
시애틀에서 차를 렌트해 서남쪽으로 운전할 때의 비슷한 답답함이랄까.
도로 양편 울창한 가로수 병풍들 탓에 오로지 전면 도로만 보이고
하늘조차 길다란 막대기 처럼 보이는 그 지루함.
근까 조화, 요 것 조 것 이 사람 저 사람들의 부작위적 어울림,의 부족으로 인한 천편일률.
대한민국의 대도시는 그 답답함의 시작이 바로 도로와 주거지의 구분이 모호하단 것.
도로, 상가, 공원이나 녹지 이런 순서로 완충지대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주거지도 치고 나와 상가와 경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빈느낌을 잊게 만드는 대도시의 매력은
시민들을 위한 잘 꾸며진 편의시설과 휴게시설,
도로가 계절따라 피고지는 꽃밭들, 넓고 깨끗한 공원들이 멀지 않고
조금만 부지런하면 다양한 이벤트와 체험들을 참여해 볼 기회도 많지 않던가.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주로 집에 있을 때가 많긴 했지만...
이사 오고 나서야 내가 원했던 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대도시 삶에서 내가 갈증을 느꼈던 실체, 그건 바로 물리적 여유, 공간이었다.
굳이 고층에 살지 않아도 그리고 번화가 거리를 걸어도
멀리 까지 뚫고 갈 수 있는 시야의 허락 말이다
이 곳에서 어릴 적 그랬던 그 안정감이 찾아 왔다.
얼마나 잘한 선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