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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free 수상록

양화진 탐방 4 - 메리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 1832-1909) 선교사 - 선교사들의 어머니

작성자psyfree|작성시간14.09.06|조회수828 목록 댓글 0

 김옥균의 갑신정변 3일천하가 1884년(고종 21)입니다. 격랑의 시기인 1885년 의사인 외아들(윌리엄 B.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과 함께 의료와 교육 선교의 꿈을 가지고 한국에 왔던 그녀는 당시 30세 전후의 의료 선교사들의 대모와 같았던 존재입니다. 실제 많은 젊은 선교사들이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며 그녀를 어머니처럼 따르고 상의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양화진 탐방 2에 나오는 헤론 부부와 언더우드 가족들이 함께 남한산성으로 휴가를 갔다가 고종의 어의였던 헤론이 설사 증세가 심해지면서 먼저 서울로 돌아왔었다는 1890년도의 소설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21세 결혼하여 40세에 사별했던 그녀는 아들과 함께 52세(1885)에 우리나라로 왔다가 77세(1909)에 하나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1886년 자신의 거처가 있던 서울 정동에 1명의 여성을 맞아 한국 근대여성교육의 효시인 여학교를 세웠는데 1887년 명성왕후는 이 학교에 '梨花'라는 교명을 내려주었습니다 '梨花'라는 교명은 명성왕후께서 하사한 것으로 정동 일대가 배밭이었고, '이화정'이라는 건물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 여성이 배꽃같이 순결하고 배맛같이 시원하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묘하게 느꼈던 사실은 김활란 여사와 김옥길 여사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스파이짓을 한다며 탄압을 일삼던 제의 강압에 의하여 이화학당을 맡고 있던 아젤러가 물러나고 1939년 4월 김활란 여사는 제7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생존을 위하여 살아남아 있었던 모든 지식인들에게 친일파라는 멍에가 씌여졌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과 비교하면 친일파라는 오명을 면할 길이 없어보이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 이화학당을 지키기 위하여 오명을 뒤집에쓴 채 살아남았던 그들을 단칼에 친일파로 단죄함이 옳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 살아온 한겨레, 한민족이라면 누구를 위하여, 누가 원하여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의 황국신민이 되어 2차세계대전에 침략자로 참여하기를 원하였겠습니까? 배웠다는 명분이 그들에게 오명을 더 크게 쓰게 했지만 그들도 지식인으로서 위안부 할머니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큰 피해자입니다. 정신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더욱 큰 고초를 겪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해방 후 6.25전쟁 중에도 부산으로 피난가서까지 이화여자대학교의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10월유신(1972~1979) 때의 김옥길 여사를 의과대학 시절에 이화여대 총장실에서 딱 한 번 뵈었습니다.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 혈기의 대학생들에게 그들은 유신정부를 지탱시키게 한 또 다른 권력자요, 5공 정부의 각료를 했으니 5.18 광주의 원흉에 일조한 꼴이 되었습니다. 그런 각도로 보면 필자를 포함하여 그 시절 이 땅 살아서 존재한 모든 국민은 감옥으로 앞장서서 들어가지 않았으면 다 죄인인 셈입니다. 그러나 서슬이 퍼렇던 공포정치 시절에도 타 대학교의 총장들보다 훨씬 의연함과 교육자로서 도리를 다하려고 노력했음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그런 원인을 또 다른 각도인 그들의 독신생활의 피폐에서 찾아보려고 스승인 김활란 여사까지 뒤졌지만 자식을,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친자식을 낳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인생의 반만 살았다고 얘기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남성의 독신은 더욱 망가져서 신문지상에 이상한 가십거리를 만들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자기 자식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보지 못한 사람이 인생을 가르치고 젊은이를 선도한다는 생각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까지 드는 것은 소생 혼자만의 기우일까요? 특히 공포정치 시절, 목숨을 담보로 한 결정에 뛰어든 젊은이들의 입장에서 본 그들은 권력자와 진배없는 것입니다.

 진리와 정의와 사랑 앞에서 말로만 고뇌하는 지성, 행동이 없는 신앙, 죽음의 불섶으로 뛰어드는 자식들을 보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지성인들의 위선.. 말로만 국민들을 위한다는 거짓말쟁이들의 집합체 같은 이 땅의 위정자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개화기와 같은 시대적인 격랑의 시절에도 파당만을 좇았던 선조들의 발자취를 그대로 걸어가는 듯하여 갑갑한 심정입니다. 이런 일은 조현병인지 조울병인 분간이 필요없을 정도로 하염없이 과량의 약물을 복용하며 평생 갇힌 듯이 살아가는 조현병환우들을 보면서도 측은지심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 동료들과 같습니다. 도처에 어디서나 배운 자들이 몸과 마음으로 헌신하지 않으면 이는 하늘의 경을 칠 일을 죽어서라도 치룰 것입니다.

 

 양화진 탐방을 이어가면서 거듭 소생의 직업이 의사였음을 하늘에 감사드립니다. 굳이 아프리카로 가지 않더라도 이 땅에서 소외된 환우들, 지금도 과량의 약물로 폐인의 길로 걸어들어가는 젊은이들을 단 한 명이라도 구해내는 이 일이 얼마나 값진 것일런지요?

 스크랜턴 여사는 자식과 같은 젊은 의료 선교사들이 타국 멀리 우리나라에 와서 전염병의 진료 현장에서 발진티푸스와 이질에 걸려 우리나라 민초들과 함께 죽어서 묻혔던 양화진 묘지가 '조선을 사랑하던 서양 사람들의 종점이 아니라 사랑의 출발지'라는 어머니 같은 뭉킁한 말씀을 남겨 주셨습니다. 모성의 한없는 사랑을 느끼게 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120년이 지난 이 시점, 이 새벽에 복받혀 오르는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2014.9.6.새벽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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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의 글들은 인터넷 검색으로 유용한 정보들을 발췌한 것입니다)


 

 

메리 F. 스크랜턴(Mary F. Scranton)

1885년 아들 윌리엄 B. 스크랜턴과 함께 입국한 뒤,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하였으며 이것이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입니다. 1909년 사망하여, 합정동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메리 F. 스크랜튼(출처: http://www.kchmuseum.org/)

 

 

 

윌리엄 B.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미국 북감리회 의료선교사로 1885년 모친인 메리 F. 스크랜튼과 함께 입국하였습니다. 시병원(施病院)의 원장을 지냈으며, 초기 성서번역에도 공헌한 바 있습니다.



↑ 윌리엄 B. 스크랜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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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개척자 메리 F.스크랜튼(1832-1909)

 

 

 한국근대 여성 교육의 개척자로서 큰 빛을 남긴 '스크랜튼' 여사의 본명은 '메리 프리쳐벤톤'이며 , 1832129일 미 매사츠세츠주 벨쳐타운에서 태어났으며, 1853W.T스크랜튼과 결혼하였고, 1872년 사별하였다. 그녀는 외아들과 같이 다니며 선교를 하다가 52세의 나이로 한국에 왔으며 1909108일에 하나님의 품으로 갔다.

평소 해외 선교에 대한 꿈을 갖고 있던 중 1884년 한국에서 의료와 교육 여선교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사인 아들을 설득하여 선교사로 지원하도록 했고, 그 자신도 미감리회 해외선교부 파송을 받아, 1885년에 아들 내외와 아펜젤러 가족과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의 유교적인 질서 속에 얽매여 있는 여성의 전통인 미덕과 품성 위에 선진문명을 받아들여 개화를 시키고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가진 학교를 설립하기고 결심하였다.

한국에 온 최초 여선교사로서 1886년 자신의 거처가 있던 서울 정동에 1명의 여성을 맞아 한국 근대여성교육의 효시인 여학교를 세웠는데 1887년 명성왕후는 이 학교에 '梨花'라는 교명을 내려주었다. 이와 함께 18881월에 이화학당 교내에 한국 최초로 주일학교가 개설되어 한국 여성선교의 본산이었다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梨花'라는 교명은 명성왕후께서 하사한 것으로 정동일대가 배밭이었고, '이화정'이라는 건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이 배꽃같이 순결하고 배맛같이 시원하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는 스크랜튼 여사의 학당 설립 정신을 왕실에서 보여주는 최대의 찬사였고 학당의 발전을 기대하는 은혜였다.

1890년대 들어 개화파 지도자인 朴泳孝의 딸이 학당에 들어와서 스크랜튼과 기거하며 빈민출신과 함께 공부를 했다. 스크랜튼 여사는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 아들이 경영하는 '병원'에서 보살피게 하다가 여의사인 메타하워를 초청하여 한국최초의 부인병원인 보구여관(保救旅館)을 운영하였다. 保救旅館은 민비가 하사한 이름이며 나중에 '梨花女大병원'의 전신이 되었다.

스크랜튼 여사는 1891년 이화학당을 후배 선교사 로드와일러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아들과 함께 남대문 시장으로 거처를 옮겨 '尙洞敎會'를 설립, 전도했고 이곳에서 부인성경학원을 설립, 여성목회자를 양성했으며 말년까지 수원, 시흥, 공주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했다.

이화학당이 오늘날 세계적인 학교가 된 배후에는 스크랜튼 여사의 공로가 있다. 여성교육의 새로운 장을 연 그녀는 여성운동의 등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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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를 세운 메리 스크랜튼 여사 

 

윌리엄 B.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은 미국 예일대학 출신으로 뉴욕대학에서 의과학을 공부하고 클리브랜에서 개업을 하고 있던 스크랜튼이 감리교선교사로 임명받자 평소 선교사업에 뜻을 두고 있던 그의 어머니 스크랜튼 부인도 아들과 함께 일하기로 결심하고 1885620일 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한국에 도착하였다.


유교적인 질서 속에 얽매여 있는 여성을 위한 교육이 시급함을 절감한 그녀는 한국여성의 전통인 미덕과 품성 위에 선진문명을 받아들여 개화를 시키고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가진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심하였다.

 

1886531일 하인을 거느린 정장한 한 부인이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왔다.
1년을 기다리던 학생과 113개월간 영어공부를 하였는데, 그 학생은 고관의 소실인 김부인이라는 기혼여성이었다. 그 부인은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관이 되리라는 소망으로 공부를 했으며 한 달 뒤에 조별단이라는 극심하게 가난한 소녀가 들어오게 되었다. 조별단의 아버지는 수위겸 청소부였고 어머니는 부엌일을 맡았고 188610월에는 4명이 늘고 그해 말에는 7명이 되었다.

 

1890년대 들어 개화파 지도자인 박영효의 딸이 학당에 들어와서 스크랜튼과 기거하며 빈민출신과 함께 공부를 했다. 스크랜튼 부인은 학생들의 건강을 아들이 경영하는 시병원에서 보살피게 하다가 여의사인 메타하워를 초청하여 한국최초의 부인병원인 보구여관을 운영하였다. 이 보구여관은 민비가 하사한 이름이며 나중에 동대문에 있는 이화여대 병원의 전신이 되었다.

 

18881월에 이화학당 교내에 한국최초로 주일학교가 개설되어 한국 여성선교의 본산이었다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화라는 교명은 고종께서 하사한 것으로 정동일대가 배밭이었고 이화정이라는 건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이 배꽃같이 순결하며 배맛같이 시원하고 향기로운 열배를 맺으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는 스크랜튼 선교사의 학당 설립정신을 왕실에서 보여주는 최대의 찬사였고 학당의 발전을 기대하는 은혜였다.


스크랜튼 부인의 본명은 메리 프리쳐 벤톤이며 1832129일 매사츠세츠 벨쳐타운에서 태어났으며 1853W.T스크랜튼과 결혼하였고 1872년 사별하였다. 그녀는 외아들과 같이 다니며 선교를 하다가 52세의 나이로 한국에 왔으며 1909108일에 하나의 품으로 갔다.그녀가 1886531일 한명으로 시작한 이화학당은 한국 최초의 여성 신교육의 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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