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스 (2010)
The Class
7.9
- 감독
- 로랑 캉테
- 출연
- 프랑소와 베고도, 에스메랄다 오우에르타니, 프랑크 케이타, 레이첼 레귈리에
- 정보
- 드라마 | 프랑스 | 128 분 | 2010-04-01
부끄럽고 불편한 진실, the class
백서윤 (따사모, 검단고)
1. 몇 장의 스케치
S#. 1 교무실
한 해가 지나갔을 때 모두들 용기를 잃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올해 말 정년을 앞둔 질레 선생님은 학년 초 직원회의(우리식으로 말하면)에서 다른 선생님들께 이렇게 말한다. 교사로서의 희열, 좌절, 안주, 허무 등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그는 왜 나머지 교사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용기를 잃어버리지 말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용기란 헤라클래스 같은 용사에게만 필요한 덕목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교사로서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고, 아이들에게는 긍정적 변화가 가능하다는 신념을 놓아버리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그렇지만 교사들은 학교 생활에서 얼마나 용기를 잃어버리기 쉬운가?
S#. 2 교실
조용히 하자
이 영화의 주인공인 올해 4년차 교사 프랑수아가 교실에서 하는 첫마디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가 가장 처음 하는 말이 ‘조용히 하자’였다. 아마 나도 그런 것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복도에 다닐 때도 까치발로 조용히 다니라고 했던 것 같다. 학교에서는 정숙을 강요한다. 학교에서 강조하는 정숙은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필요한 ‘고요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학교에서의 정숙은 권위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일본의 학교 폭력 연구물을 읽은 적이 있는데 자신의 사회에서 특히 심각한 학교 폭력에 대한 나름대로의 처방이 자기가 처한 폭력 상황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였다. 조금 허무한 해결책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찌 보면 거대한 폭력에 대해 사회적으로 침묵을 강요했던 그네들의 나라가 이제 폭력에 대한 그 대안으로 ‘말하기’를 내세웠다는 것은 맥락적으로 보면 이해될 수 있는 해결책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겨우 겨우 아이들의 시선을 잡고 수업을 이끌어가는 프랑수아의 수업에서 작은 틈바구니를 비집고 아이들은 말을 한다.
선생님 제 펜이 터졌어요
선생님은 동성애자예요?
저도 그렇고 다른 애들도 선생님 수업 힘들어해요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S#. 3 교무실
저 버릇없는 녀석들 못 참겠어. 지긋지긋해. 더 이상 못 견디겠어. 인간들도 아냐.
프랑수아가 교무실에 왔을 때 한 교사가 분노를 폭발하고 있었다. 어떤 상황 때문에 화가 났는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교사는 견딜 수 없는 듯이 분노하고 있었다. 상황이 나와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들도 이런 분노의 상황을 직면할 때가 있다.
내가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때때로 불합리하고 부적절했던 과거까지도 용서하고 더 나아가 향수를 느낄 때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 대해 거부하는 성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 명제가 참이라면 역사는 항상 퇴보해야 맞다. 그런데 학교를 보면 나 역시 아름다웠던 옛날을 찬양하는 ‘구관이 명관’론자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가 점점 더 분노를 유발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교사들의 분노 뿐 아니라, 아이들의 분노도 때로는 극에 달하고 있다. 무엇이 모두를 이렇게 분노로 몰아가는 것일까?
S#. 4 교실
선생님께 무례하게 군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이제 가 봐도 되죠?
수업 시간에 교사는 한 아이에게 책을 읽을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그 아이는 읽기 싫다고 말한다. 이 상황에서 교사는 아이에게 다시 ‘난 단지 너에게 책을 읽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라며 다시 책을 읽어 줄 것을 요구한다. 결국 책 읽기를 시도하지 않는 아이에 대해 수업이 끝나고 교사는 사과를 요청한다. 구체적인 멘트까지 가르쳐 주면서. 교실 앞문을 통해 교실 밖에서 두 명의 아이가 이러한 교사와 아이의 실랑이를 즐기고 있다. 교사가 요구했던 말을
겨우 내 뱉은 그 아이는 프랑수아에게 결정타를 날린다. ‘이제 가 봐도 되죠?’ 아이들의 순수성에 대해 의심하게 되는 순간, 진심어린 말로써 아이들을 타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바로 이 순간 교사가 용기를 잃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S#. 5 면담실
집에서는 문제가 없어요
오랫동안 학교에서 문제아로 지적받은 슐레이만을 대상으로 우리 나라 학교에서의 ‘학생선도위원회’가 열렸는데 여기에 참석한 슐레이만의 어머니는 이 모든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집에서는 집안 일을 도와주는 착한 아들인데, 학교에서 문제아 취급을 받으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슐레이만의 어머니가 하고 있는 대사는 어딘지 낯익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회상해보니 좀 문제가 있어 보이는 아이들의 학부모와 상담을 하면서 나도 자주 들었던 것 같다. 그들은 한결 같이 알고 보면 아이가 얼마나 착한지, 집에서는 ‘절대로’ 부모님한테 대드는 아이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다. 동서양의 차이도 뛰어넘는 어머니들의 공통적인 대사 속에는 아이를 변호하는 어머니의 거짓말이라는 성분이 대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조금의 진실도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 아이들은 집과 학교에서 다르게 행동할까?’
S#. 6 교실
동네 죽순이에게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아이들과 교사의 갈등은 일방적인 손해를 가져올 수 없다. 교사에게, 그리고 학생 모두에게 상처가 되는 것이다. 화를 낸 적이 없는 프랑수아 선생님은 ‘국가론’을 읽었다는 학생의 말에 비웃음이 들어간 대사를 날린다.
어제 회의에서 선생님께서 절 쫓아내기로 하셨다면서요?
그렇게 웃고 떠들고 하는 것들이 길거리에 ‘나가요’하는 애들 같았어.
학생 위원회에 참가하여 진지하지 못하고 계속 키득거렸던 학생들에게 교사는 길거리의 여성들 같았다는 실언을 한다. 그 말이 곧 아이들에게 빌미가 되어 프랑수아 선생님은 곤란에 빠지게 된다.
#7. 운동장
그래서 원하는 게 뭐니?
선생님이 처벌 받는 거요.
미치겠어.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다들 싸움닭처럼 덤벼드니
교사와 학생의 갈등은 드디어 극에 달한다. 이 쯤 되면 누구나 교육이라는 큰 명분은 잊어 버린 채, 빨리 무사히 한 해가 끝나기를 바라게 되거나 내가 교사로 적합한 인물인가 회의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교사로서의 용기는 찾아 볼 수 없는 순간이 온 것이다.
2. 누가 좀 가려 줬으면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 같은 이 영화는 우리의 수업 장면을 몰래 촬영한 느낌이 든다. 아이들의 피부색, 말썽꾸러기를 교장 선생님께 데려 가는 장면 등 우리의 교실 상황과는 조금은 다른 점이 존재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대한민국의 선생님들은 대부분 ‘동병상련’의 반응을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문제 의식이 프랑스라는 지협적인 교육문제에 그치지 않고 전세계적으로 공감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찌 보면 이 영화는 별로 특별한 것도 없고 지루하기까지 했다. 우리가 매일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영화로 만들어 놨으니 교사들에게 뭐가 특별할 게 있겠는가? 프랑스 영화가 원래 그러려니 하고 일반화시키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그만큼 일상적인 내용을 충실히 담고 있다는 뜻이다.
‘성공’을 이야기하기는 쉬워도 ‘실패’를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함께 하나같이’ 교사와 학생들의 운동 경기를 하면서 아름다운 마무리로 끝나는 것 같지만, 이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훈훈한 마무리로, 아름다운 성공으로 이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겪은 일이라면 누가 좀 가려 줬으면 좋을 이 내용을 굳이 영화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3.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 교사의 문제?
프랑수아 선생님은 왜 아이들에게 휘둘렸을까? 외모가 너무 평범해서? 카리스마가 없어서? 그러면 평범한 외모의 선생님이나 타고난 카리스마가 그다지 없는 보통의 선생님들은 그와 같은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일까? 프랑수아와 같이 평범한 교사들을 구제할 다른 길은 없을까?
- 선생님이 체벌을 안 해서?
교사가 너무 아이들을 안 잡아서 아이들이 제멋대로라는 식의 해석을 할 수 있지만, 최근 사회적으로 대두되고 있는 체벌 금지와 관련해서 보면 단순히 교사의 개인적인 문제라고만 볼 수 없고 교사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왜 프랑수아는 저렇게 관용적일까, 소리를 지르며 분노를 보여줘야지, 저런 애들은 매를 때려서 잡아야 돼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 학생권의 무분별한 성장?
이 영화에 보면 아이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의견을 잘 피력한다. 교사가 학생들에 대한 평어를 줄 때도 ‘학생 위원회’처럼 학생들이 참여하여 그 과정을 지켜보게 한다. 이와 같이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참여도를 높여서 아이들이 제 목소리를 내게 하는 일련의 조치들이 교실내에서 교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제멋대로 된 아이들을 양산하는 데에 기여했을까?
- 복잡한 인종 문제 및 빈부 격차?
이 영화에서는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 그리고 불법 체류하는 외국인 등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을 보여 준다. 이런 것들은 우리와는 정도가 다른 부분이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도 여전히 학교 폭력이 존재한다. 그러면 인종이나 빈부의 문제는 학교 폭력에 있어서 우리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 양상으로 작동할까?
- 민주주의의 한계?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프랑스는 우리 보다 훨씬 더 민주적인 나라, 그만큼 토론과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그런데 왜 그들의 나라에서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훌륭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한 민주적인 사회의 분위기가 오히려 학생과 교사의 갈등을 야기하고 해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4. 교사가 분명히 놓치는 것이 있다!
- 왜 집과 학교에서 아이들의 행동이 다를까?
슐레이만의 어머니는 선생님과의 개별 면담이나 ‘선도위원회’에서 자신의 아들이 문제가 없으며 얼마나 착한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슐레이만은 프랑스에서 인종적으로 경제적으로 약자인 부모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자연스럽지 않고 타인을 의식하며 공격적이다. 슐레이만의 공격적인 성향은 어쩌면 자신에 대한 방어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교실에서 다른 이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스스로 가시로 온몸을 무장한 고슴도치가 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효하며 다른 사람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킬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 슐레이만은 전학 온 아이에게 왜 지나치게 화를 냈을까?
교사에게 쫓겨나기 전 슐레이만은 전학 온 한 친구에게 대해 지나치게 반감을 표시하며 화를 낸다. 슐레이만은 그 아이에게 ‘원숭이 같은 몰골에 방금 전학 온 주제에 벌써부터 짱 먹으려고 하냐’고 비난한다. 물론 그러다가 쫓겨났지만 말이다. 이 말은 슐레이만은 그 아이를 경쟁자로 느끼고 있음을 의미한다. 자신보다 나아보일 게 없는 그 아이가 아이들과 교사들에게 인정받는 것(결국 그 전학생도 프랑수아 선생님에게 반감을 표시하며 아이들과 한통속이 되었지만)이 슐레이만은 싫은 것이다. 슐레이만이 교실에서 나가면서 동시에 그는 그 전학생과의 경쟁 구도에서 패배자가 된 것이다.
- 가방으로 얼굴을 맞아 상처를 입은 그 여학생은 왜 슐레이만에게 화내지 않았을까?
슐레이만이 교실에서 뛰쳐나가면서 가방으로 한 여학생의 얼굴을 치는 바람에 여학생의 얼굴에서 피가 난다. 그 여학생은 소리를 지르며 울음을 터트렸을 법도 한데 의외로 그 여학생은 별일 아닌 듯이 상황을 종료시킨다. 걱정스러운 듯한 프랑수아의 태도에 아무런 상관도 없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의연하게 반응한다.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며 심각하게 반응하는 것은 슐레이만에게 불리하고 프랑수아에게 유리하다. 왜냐하면 그럴수록 슐레이만은 나쁜 아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여학생은 슐레이만을 나쁜 아이로 만드는 대신 그녀를 걱정하는 프랑수아를 더 바보로 만든다. 그 여학생이 걱정할 필요 없다는 태도는 그런 의미이다. 이로써 이 반의 권력 구조를 보면 ‘전학생> 슐레이만 > 프랑수아(교사)’로 표현될 수 있다. 슐레이만은 전학생 보다 못하다. 그런데 프랑수아 선생님의 말이 전혀 먹히지 않고 슐레이만에게 더 유리한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프랑수아 선생님의 권력이 슐레이만보다 못한 것이다.
5. 간간히 보이는 나약한 희망
- 농담하고 신경 쓰이게 하고 다들 부끄러움이 없어요.
교실에 있는 모든 아이들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모두들 프랑수아를 골탕 먹이고 무슨 문제를 일으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아이들 같다. 그런 와중에 한 아이가 이런 말을 한다. ‘농담하고 신경 쓰이게 하고 다들 부끄러움이 없어요.’ 중국인 아이이다. 교사와의문답 중에 나온 말이라 대사에 대한 비중이 없지만 이 교실 상황을 이 보다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이 반에서 가장 권력이 약한 프랑수아 선생님의 인정을 받는, 프랑스 사회에서 소수인 불법 체류외국인의 아들인 것이다.
- 저 임신했어요
교무실에서 심각한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한 선생님이 자신의 임신 사실을 말한다. 모두들 그녀의 임신을 축하한다. 어찌 보면, 구관이 명관이고 세상은 나빠져만 가는데 어쩌자고 아이들은 새로 태어나는 것일까? 말세지말(末世之末)이니, 종말이니 하는 말로 표현되는 지금의 세상은 마치 악화 일로에 있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쩌자고 교육을 하고 있으며, 어쩌자고 희망을 말하고 있는가? 빨리 각자 마음의 집에 들어가 문 닫고 발 씻고 오늘도 무사했음을 다행하며 연명해가야 옳을 것 같은 데 말이다. 엉망진창인 학교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임신 소식을 알리는 한 여선생의 가느다란 말소리가 말세지말이라고 하는 사회의 공기 속에서 교육을 하고 있고, 희망을 말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유사하지 않은가?
6. 당신에게는 가르칠 용기가 있는가?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가르칠 수 있는 용기라지만,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이 용기를 잃어버리는 일은 쉬운 일이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지금까지 학교나 교육이 존재할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가르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직업인으로서의 교사로 남아 왔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즐겁고 유쾌한 마무리가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우울하게 하는 이 영화는 교실 상황의 정확한 재연이라는 점, 그것을 통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분명히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국의 교육 상황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프랑스의 교실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가 나에게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이렇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다시 보기를 해도 여전히 그렇다. 나에게는 진정 가르칠 용기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