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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본 글,2

[스크랩] 폐 시 상11 가난1.-이발소 현모양처인 가난, 사의 찬미/Maksim Mrvica/ Prokofiev Fantasy

작성자古今|작성시간26.06.19|조회수1 목록 댓글 0

난 내 아이들에게 미안한게 있다.

그건 내가 가난하지 않은 애들에겐

무엇이 가장 어렵고 힘들지 이해조차 못했다는거다.

 

위 열까지 이상 나는 날 키워주고 일으켜준 시인들이 있었노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 중심은 풍요치 못함 즉  가난함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창조란 부족함의 내용 바로  필요성을 해결하는  것 아닐까 .

10여년 전에 나는 '가난, 그 영롱함을 노래함'이란 글을 쓴 적 있다.

글은 사창가 이야기 였는데 너무 긴 글이어서 여기 못 싣겠지만

 이 다음에 조금 더 다듬어지면  보여드릴 수 있을 꺼다.

그저 가난에 대한 이야기이니 잠깐 얘기 하자면

그곳에 피치 못해 사는 사람들의 외려 그 밖에서 그들을 천시 할 수 있을텐데

그밖에사는 인종이랄 내가 보기엔 사창가도 아닌 곳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삶을

그 사람들에게서 보았어요, 라고 쓴 글이다.

 

가난이란 사람을 낭떠러지로 밀어 떨구는 것일 수도 있지만

기실 그것은 그상황을 이겨낼 잠재적 에너지의 충전 기회이기도 하다.라는

 당시 이야기와는 다른 가난의 모습을 얘기 하려는 오늘이다.

내 할머니가 들려준 가난에 대한 금언은 두가지였다.

그 하나는 가난은 호랭이보다 무섭다는 거 였고

다른 하나는 가난이 제일 훌륭한 스승이란 거 였다.

우린 호환보다 무서운 가난을 피하는 것 하나에서 많은 걸 얻어내었다.

그런데 후손들에게 스슴으로의 가난을 빼앗아 버린 셈이다.

 

'고셰신부의 불노주'라는 도데의 글을 기억 하시려나?

난 그글을 떠올리면

'빠따멩빠따땅

따라뺑따라빵'

이라는 술취한 고셰신부의 노래 생각이 난다.

읽은지 수십년도 더 된 글이었는데도 말이다.

 

알자스로렌지방이란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으로 이나라 영토였다가 저 나라 영토가 되도록

전쟁이 많았어서 가난한 지방이었다.

해서 수도원도 가난 할 수 밖에.

그때 한 수도원에 미친 노파가 기르다 견습 수사로 들어온

고셰라는 염소나 기르던 신부가 있었는데

 수도원장 신부에게 자신이 베공노파에게 배운 술 담그는 비법이 있으니

술을 담가 팔아 돈을 벌면 수도원이  가난은 벗어날 수 있지않겠느냐고 한 것이다.

원장신부도 해보자 했는데 그게 대박이 난 것이다.

해서 잘 살게 됬는데 그 술을 만들 때 맛을 보느라고 고셰신부가 술에 취해

예배실에 와서 주정으로 고래 고래 노랠 부른 것이 위의 그런 노래였다.

 

해서 고셰신부가 맛을 보지않고 술을 주조하겠다니

원장신부가  맛을 안보면 맛이 달라져 술이 안팔리면 안된다고

그런 실수를 할 때면 모든 신부들이 대속의 기도를 할테니

예배에 참석말고 혼자 방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는거다.

이렇게 해서 그 지방의 명주가 탄생했고

신앙의 다른 폭도 생긴 것이 아니겠는가.

그얘기다.

 

그렇게 좋은 가난이라면 그걸 위해 돈도 벌지말고

가난해지라는 말인가?

 아니다.

 그게 아니고 가난하지 않아도 제품 개발의 지혜가 튀어나올 다른 잠재 에너지원을 찾고

 신앙의 자유로운 폭도 넓힐 수 있는 자세도 알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말이다.

 

세상 모든 나라들은 우리가 이렇게 큰 부를 만든 걸 한강의 기적이란다.

헌데 난 기적이라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전후 우리나라 사람 모두들은 어떻게 살고 어찌 지냈던지....

 

나도 1979년도에 중동에 간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곳서 버스를 타면 우리나라 사람은 앉을 수 없었다.

앉았다가도 중동사람이나 영국인 미국인이 타면 자리를 내놓고 일어나야했다.

휴일이어도 외국인들은 수상스키를 타거나 해수욕장을 가도

우리들은 낚시를 하거나 낙지를 잡으러 다녔다.

밤에 바닷가에 나가보면 빈 바다를 향해

자신들의 아내나 애들 이름을 부르며 우는 남자들이 아주 많았다.

일년을 일하면 고국에 돌아갔다 올 수 있으나 그러는 사람은 거의 아니 아주 없었다.

그 비행기 삯을 회사서 받고 잔업수당을 받으며 계속 일을 했다.

 

내가 중동서 돌아오는 날 나랑 친하던 작업반장이 같이 돌아왔다.

그가 왜 돌아가는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자기 딸애가 이번에 시집을 간단다 해서 가지만 다시 나올 꺼 란다.

그래서 자기가 다이아를 하나 샀단다.

여기선 다이아가 싸서 샀다지만 나도 알고 있었다.

그 퀄리티가 낮은 것이다.

내게 자랑해서 그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감춰야 세관에 안걸리고 가져갈까 고민하다가

그다이아를  모자에 있는 장식뒤에 본드로 붙였다.

그장식이 쇠붙이이니 엑스선도 통과 못 할  꺼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고도 날더러  세관 통과 때는

그중 나이 많은 세관원 줄에 서야한다고 충고까지 했다.

헌데 비행기서 내려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세관원 줄에 우리 둘 다 섰는데

다른 귀국인들도 모두들 거기에 서서 너무 길어 

우리 둘은 거기서 짤려 다른 세관원 줄로 가야했다.

비료드 옷감에 소니스테레오 카세트 셋트 코끼리밥통등 많은 짐을 끌고 

다른 줄로가서 서야 했다.

그사람을 앞세우고 난 그뒤에 서서 다른 조금 젊어뵈는 세관원이 있는 줄로 옮겨 갔는데

그가 배기지를 세관대에 올리려는데 똑또구르 뭔가 세관대 위를 구르는 소리가 났다.

다행히 그게 멀리 튀진 않고 세관원 앞에  있었다.

내가 멀리서 보아도 그 건 잘 감춘다고 모자 장식에 붙였던 알다이아였다.

그때부턴 그 양반도 바들대느라고 배기지도 못열어 보이고  있었다.

그 세관원이 말했다.

'짐 올릴 필요 없어요.

저거 줏어갖고 얼른가시오.

자 다음 분 빨리빨리 오시고.'

 

난 중동다녀온 사람만 열사에 고생했노랄 생각은 애쌔없다.

당시를 산 우리나라  사람 서로는

다른이의 모든 상황을 다 이해할 수 있었고

세관에 있는 사람이나 조사받는 사람이나 서로 서로 

형편을 살펴줘야 하는 걸 피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

당시를 살고 지나온 나도 지금은 어째야 될 지 모르겠다.

헌데 지금만 살 젊은이들은 더 모를 수 밖엔 없지 않을까?

우린 좋은 선생님들 좋은 시들 정말 진심의 정을 알 수 밖엔 없었다.

헌데 지금은 자신의 눈으로 귀로 피부로 부딪히며 터득한 게 아니고 

간추린 참고서 지식으로 지혜를 쌓았을테니

그런 싯적인 삶을 알 수나 있으려나 참 안스럽다.

 

살다보니 난 간암과 특발성 폐섬유증이라는 질환을 얻었다.

그건 스미듯 천천히 생명을 포기하란 천명같았다.

해서 두세달 마다 서울까지 다녀와야 했다.

그건 두세달마다 검사받고

그 일주일 후엔 의사에게 결과를 들으러 가야 한다.

그때마다 아들을 만나 심장 상태도진료 받고 

딸네 집서 일주일 가량 신세를 져야 한다.

그때 친구들도 만나곤 했는데 이번엔 막내동생을 만나 볼 계획을 세웠다.

 

검사를 받아야 할 첫날

검사를 끝내곤 아들을 만나러 김포엘 갔다.

심장은 더 나빠진 게 없어요란 말과 함께

아들은 점심을 먹자고 했다.

 

점심을 먹는데 아들은 며늘애가 연수를 받으러 미국엘 간단다.

애들은?

이라고 묻자 애들도 데려간단다.

그럼 너는 혼자 있을게냐? 물으니

틈이 나면 자기도 중간중간 다녀오겠단다.

 

그럼 한주간 서울 있을 동안 손주들도 한 번 보자 했더니

아이들이 할 게 많단다.

초등학생들이 뭘 할 게 그리 많냐니 

이번 주말이나 다음 진료전에 뵈러 데리고 오겠단다.

그럼 그 사이 막내 고모를 만나고 오마고 하고

처삼촌 뵈러 인천을 갔다가 이틀 묵고

딸이 세종시에 데려다 주어 사나흘 막내동생을 보고 다녀왔다.

 

세종시 식물원엔 바오밥 나무가 너덧 그루 있었다.

커단 몸집 것은 한 그루

다른 그루는 이름표가 없으면 알아보지도 못하게 가는 나무였다.

나무가 잎을 죄 떨구어 섬칫해 죽어가는 거냐고 식물원 직원에게 물으니

오뉴월  이후엔 잎을 다시 피울 꺼란다.

막내동생에겐 잎이 나오거든 사진하나만 찍어 보내달랬다.

바오밥 나무란게 세상에 있다는 건

쎙떡 쥐뻬리의 어린왕자에서 읽고 알았는데 그게 정말 세상에 있었고 

그게 죽어가는 걸지 모른다는  낙망하는  사이로 직원을 찾아 묻기 전

내 죽음이 그려졌었다.

 

직원 말을 듣고 안심하자  식물원을 나와 내가 간 곳은

은행 ATM 기계앞이다.

올라가면  내 친손주 둘을 만날텐데 큰 돈은 못줘도

용돈을 조금이라도쥐어 줘야지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내가 몇번이나 용채를 그들에게 줘 볼 기회가 남았으려나  생각난 것이다.

 

헌데 서울로 다시 올라와 친손주들과 식사 약속은 잡았냐니 딸이 그러는 거다.

이번에도 바빠서 못온다고 했다고

나는 낙망했다.

그리고 조용히 그밤을 자고 병원을 가서 의사를 만나야겠는데

잠이 오지않는 거다.

 

내가 몇번이나 친손주의 세배를 받아보았는가?

아니 세배말고 만나 본 건 도대체 몇번이나 되려나?

 

다음날 새벽 난 일어나 주섬 주섬 옷을 챙겨입고 제주도 내려갈 채비를 하고

딸네 집을 나섰다.

내 기척에 딸네 식구들은 모두 깨었다.

딸이 자기가 모시고 병원 갈텐데 왜 이리 이른 시간에 혼자 가시려 하냐는 거다.

 

너도 모르겠냐?

그럼 너도 지자식들과 언제 죽을 지도 모를 애비게

문안 인사도 안드리고 외국까지 가려는 저녀석과 똑같구나.

넌 그놈의 누나라며 동생에게 그럼 안된단 말 한마디도 못하지 않았느냐?

그럼 나래도 마지막일지 모르지만 가르칠테다.

사람의 도리 예의의 첫발자욱은 자신들의 문안을 여쭙는게 첫번째다.

그조차 못할 자식들을 길렀으면 나도 그런 대접받을 생각 없어 그냥가련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내집도 내딸네도 아들네도

죽을 때가 되니 심롱스러워 졌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살았던 흔적은 남길테다.

가난이란 스승을 빼앗은 벌은 내가 질테다.

그저 못난 애비랄 스승은 갖거라

 

딸이 병원으로 쫒아와

다음 주말이라도 지네 식구 모두 함께 제주도로 찾아뵙겠다고 했다고 했다.

그동안 전화벨도 여러번 울렸건만 난 핸드폰 앞면에 뜬 이름자만 뵈면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음주 자기네 집식구 모두 제주도 왔다는 말은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보지도 않았다.

이런 내 마음속같은 분란통을 그들도 불편해 할 것을 미안해 하는거지

난 어떤 이승의 미련은 없다..

 

내형제들 내 어머니  내 친구들 돌아갈 때 흘린 눈물에 

날 위로하느라 읊조린 글을 아래 실어본다.

어느게 진정 내 마음일까?

난 모르겠다.

 

하지만 이분란을 겪으며

 내 평생앓던 혼자 주절거리는 병이 도졌다'

그게 글이라 생각하고

그게 시의 마음이리라 믿어본다.

잘쓰지는 못했다.

공부한 문법도 없다.

허나 내 진심에서 한 자락도 비끼지 않은 글을 남겨보련다.

그게 내 이 '폐 시 상'이란 글을 계획한 소이이다.

몇부까지나 가려나?

자신없기도 하지만 100부이상 쓰고싶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란 글을 오십편쯤 써 본 일 있고

장미꽃 품종마다로도 100편 넘게 써보았고

제주도꽃타령이란 글도 100부작은 썼었고

오페라도 100편은 썼던 것 같으니

 제주도 귀농교육서부터 시작해 제주도의 마음을 읽어보려 몇편 글을 주억거렸잖은가?

 완성은 없을 글일지 모르지만

 몇편을 쓸 수있을지 모르지만 미완성은 아닐게다.

 외려 이글을 쓰다가 내가 그만 살더라도 그도 멋진 후회없는 삶이 될 수도 있으리라.

 

세상에 억울하고 분할 때 내가 평생하던 그 짓들!!!

그게 바로 나 아니었던가?

가난이 내게 일러준 불만스런 세상과 맞서는 방법이 이 하나라는 그런 생각이다.

 

이발소/ 古今

 

동대문 동네에는 이발소가 두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행길에서 들어와 경원탕 곁에 있었고,
하나는 낙산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에 있었습니다.
목욕탕곁의 그 이발소는 의자도 자동으로 푹신하고 편했고,
깎은후 머리를 행궈주는 세면대도 깨끗해
아무 냄새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낙산 오르막의 이발소는 의자도 불편했고
세면대에서 퀴퀴한 냄새도 났지만
그곳이 행길가까이 이발소보다 반값밖에 안되는데도
그곳을 가기 싫은 이유는 그곳은 언제나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고,
거기 있던 사람들과 주인은 사람이 기다리는데도
시척하면 지직거리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에
설전을 벌리기 일쑤여서
사람수에 비해서도 더 오래 기다리게 되는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 김의원이 국회에 똥물을 퍼부었다네."
설전을 나중에 끼어든 사람들에게 설명까지 하며
시척하면 국회에서 그랬으니 우리 나라가 아직도
민주주의가 멀었다거니
썩은 생각밖에 없는 이들에게 잘 한 짓이라느니
나중 온 사람들까지 함께 설전을 시작하는거였습니다.
그러면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도
그 이발소 아저씨는 그 이야기에 끼어들어
자신의 정치관을 피력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겠는 이야기로 시끄럽고 지저분하며
오래 기다려야하는 그곳보다는
전 행길의 이발소에 가고 싶었지요.
해도 낙산 밑에서 깎아야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것은 엄마가 시장에서 식구들 먹이고 싶은 것들을
몇번이나 참은 후에나
저의 아발소 가는 행사가 가능했던 걸 잘 알기 때문이었지요.

차곡 차곡 이러한 마음이 원하는 것과
내가 해야하는 바와의 거리가 마음속에 싸여가며
자랐습니다.
공부하기 싫었을 때
자식들이 미울 때
아내가 원망스러울 때
일하기 싫을 때
나는 가만히 그들의 좋은 점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가난이란 아주 못생긴 아내와 같은 존재입니다.
누구나 미스코리아같은 부인을 바라지만
그들은 그 아름다움만을 위해서도
사랑하는 이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허나 가난은 겸손과 부끄러움으로
상대를 북돋우고 없는 돈에도 살림을 일궈가며
어떤 하나도 자신의 덕으로 삼는 경우란 없습니다.
이건 제일 착한 아내들의 덕목아닙니까?
그래서 가난이란 수수무탈한 좋은 부인과 같습니다.

아무곳에서도 우리 마누라라고
자랑하기 부끄러운 듯해도,
길 걸을 때 저만치 멀리서 관계없는 사람인 척 걸어도
못생긴 아내는 투정하지 않습니다.
가난은 매일 원망해도
그를 떨어버리자고 아무리 기를 써도
그걸 조용히 도우려 들면 들었지
숨어서 훔치는 눈물조차 내비치지 않습니다.
공부하다 졸때도 졸립지 않게 주린배로 지켜보아 주었고,
작은 돈벌이에도 대견한듯 방실방실 미소띄어 줍니다.
게다가 건방이라도 질양이면 독촉장이다, 카드결제금이다
조용히 디밀어줍니다.

자신이 옷이 헐었다고
자신도 잘 입으면 미녀부럽잖은 미모라고
염장 지르는 일 없습니다.
자신도 배고프다고
맛있는 음식을 달라고 조를 때도,
자신도 섹스하고 싶다고
교태부리는 때도 없습니다.

 

 

사의 찬미/ 古今

 

지인을 하나 둘
떠나보내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는 거 같다.

조금쯤
아주 조금쯤
아쉬움이 남고
외로울까
두렵기도하지만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뽑히며도
죽지못하는
그이상의 괴로움으로
외로움들이
켜켜히 쌓여갈
삶의 소외앞에
법원의 송달 문서 처럼

나의 고통들을
유한책임으로
만들어주는
삶의 의무에서
놓여난다는
노비문서를
태우는듯한
주인의 은혜처럼

무한하게 향유했던
그 사랑
그 우정


이 모두를
배신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는 사면이 아닌가.
이는 가장 큰 삶의 축복이지 않을까.

 

Maksim Mrvica /Prokofiev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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