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형은 미국으로 떠났다.
형은 공부하려 간다고 했지만
더 많은 주윗 사람들은 그건 회피라고 했고
나머지 우리 형제들과 어머니는 형의 말을 믿고싶었다.
형은 당시 원자력원을 형수와 다니고 있었고 딸과 아들을 갖고있었다.
애들은 나중에 자리가 잡히면 데려가겠다고 했고
예과 대학에 다니던 내게는 내 등록금은 꼭 보내마 라고 했었다.
내가 본과에 갔을 때
형은 자신이 장학금을 받던 걸 물어줘야 했다.
거기서 점수가 나빠 물어주게 되어
미국서 캐나다로 옮기며
물리학을 계속하지 못하고 컴퓨터공학으로 옮겨갔다.
이로 내등록금을 보내주지 못하게 되어 나는 한 해 휴학을 했다.
이듬해 내가 다시 본과 일학년을 마치며 남동생은 법대에 붙어주었다.
그후로는 그 애는 하루 서너군데 씩 과외를 했다.
나는 하루 하나 씩 했지만 서울대 법대생에겐 과외를 받고 싶은 부모가 많았다.
형은 둘씩이나 대학을 다니니 학비는 반도 못되게 보냈다.
해서 조카애들도 기르기 힘들어 형네로 보냈다.
그때가 우리 집을 갖고 있던 마지막 때였다.
잠실 시영아파트.
그래 잠실 장미 아파트 옆의 12평짜리 아파트.
두해쯤 거기서 산 것같다.
그 이후는 월세로 몽촌토성 곁 방이동에서 살았다.
1990년 외국여행 자유화가 시작된 해 이다.
그때는 우리집도 인천에 단독주택도 있고 나도 개업을 하고 있었다.
동생들도 결혼을 했다.
여행 자유화가 되자마자 난 캐나다를 갔다..
그리곤 형더러 왜 미국을 갔던지 이야기 해 달라고 했다.
난 내가 불구라고 누구에게도 부끄러운 적 없었다.
헌대 어머니가 일본 사람인 건 정말 부끄러웠었다.
해도 그 어머니 덕에 자랐고 형편도 안되는 공부도 했었으니
그조차 입에 담지못하고 살았다.
형은 공부던 싸움이던 누구에게나 지려 않았었다.
그까닭이 어머니가 일본 사람이란 이유였다고 했다.
아마 지금 젊은이들은 외국인과의 걸혼도 많으니 이해안되겠지만
그 당시는 튀기를 튀기라고도 안했다.
아이노꼬라고 했다.
아이노꼬란 유리구슬을 사기와 유리를 섞어 만든 거 였었다.
자신에게 그리 말하는 걸 견디기 어려워 싸움도 많이 했고
공부도 절대 안지려 해서 잘 했던 걸 자기는 머리가 좋아 잘 할 수 있었다 라 알았는데
외국 나가 경쟁해 보니 아니었다는 거였다.
해서 나도 다른이들이 말하던 도피였던 거냐고 했고 향은 그런 거 같다고 했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겐 언제나 일등은 말라셨다.
무얼하던지 일등은 나쁘다는 거 였었다.
난 그게 이상했었는데 형의 고백을 들으며 알게 되었다
매번 일등하려 애쓰는 아들을 길렀고
다툼도 일등이라는 것에 시기질투가 더해져 아이노꼬란 다름을 찾아내었던
질시의 눈길들과 다툼으로 힘들었던 아들을 기른 것이다.
어머니도 형도 이해되었다.
이후 자주 캐나다를 갔었고
형의 그러한 전투력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보았다.
형은 자신이 순수 혈통 아닌 것에 상처를 받았노라 했고
그런 멸시의 눈길을 피했노라고 했지만 내 두 조카는
모두 외국인들과 짝이 지어졌다.
그걸 보며 우리가 고통과는 맞서는 거지
도피는 일조도 삶에 주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그도 나는 내가 똑똑해서 알게 됬다기 보다는
내가 지나친 그 참혹스럽던 가난이란 스승 덕인듯 싶다.
난 평생을 어머니께는 거짓말을 못해보고 살았노라 자부하며 살았다.
헌데 이글을 연재하며 보니 나도 지독히 거짓말을 많이 했네.
형님은 팔 구 년 전에 갑자기 한국엘 왔다.
무슨일이냐니 자기가 찾아보았는데 요트로 세계 일주를 한 한국 사람은 없더란다.
해서 자기가 요트를 사고 지금 태평양을 건너왔고 한국서 며칠 쉬다가
남태평양 인도양을 거쳐 대서양을 건너려 한다는 거였다.
요트로 세계일주를 한다는 것은 적도를 지나 남반부를 지나쳐야 한단다.
헌데 해보니 돈이 많이 들더란다.
해서 동기들을 만나보고 사업하는 친구들에겐
이런 일주를 처음한다는 걸로 기업 이미지도 넓힐 수 있을테니
찬조 좀 받아보겠다는 거였다.
허나 아무데서도 찬조를 못받았고
남태평양으로 떠났다.
그 두달후 전라남도 함평에 왔다고 연락이 왔다.
아직 떠나지않았냐니
필리핀 까지 갔다가 병이 나서 돌아 왔단다.
어디가 아프냐니 필리핀 의사들은 뭔지도 모르겠다고 했단다.
근데 웬 함평이냐니 자기가 아는 사람이 광주에 있어 거기 로 왔다가
함께 함평을 왔다고 했다.
많이 아프냐니 좀 그런거 같단다.
난 놀래서 병원에 병가를 내곤 함평으로 내려갔다.
그랬더니 형 친구란 사람은 없었다.
어느병원이든 가자니 자기 동창들에게 연락해 서울대를 가기로 했단다.
아니 형친구들은 이젠 다 손 놓았을 텐데 라고 얼토당토 않다고 생각 했는데
피를 한 사발 쯤 쏱는 거였다.
헌데 객혈 색깔이 아니었다.
그럼 소화기 쪽일텐데...
형은 까부러지는 거였다.
서울대로 차를 몰았다.
위암인데 너무 퍼져 손도 못댄다는 거였다.
내가 있는 병원으로 가자니 여기서 최선을 다 해 보겠단다.
그 이틀후 형은 죽었다.
난 누구도 어머니껜 이말 전하지 말라고 했다
몇년전 남동생 죽었을 때 기진하시던 걸 보았기 때문이다.
형님을 가족 묘에 같이 모신 다음날에야 형수만 왔다.
난 병원에서도 전의사 회의를 할 때면 시를 통해 실제 생활을 보도록
젊은 의사들에게 짧은 시를 들려주곤 했다.
형이 한국 온 날 나보다 아홉살이나 많은 영감이
요트로 세계일주를 하겠다고 지구 반바퀴를 돌아왔노라고
사무엘 얼만의 시를 소개해 줬었다.
근데 얼마 후 형이 죽자 그래 늙은 청춘도 청춘 이라 해보자.구
그런들 뭐 뭐가 청춘인데 씨잘데기 없는 소릴 한담 이라고
역경을 헤치고 살아온 삶에 그런 청춘이란 말 부치는 것도 부질없다 싶었다.
도피하려면 죽음으로 부터나 도피하게 좀 몸 좀 체크하고 요트를 탈 것이지...
억지 춘양은 어딘가 다 못 건사한 구석이 생기는 거다.싶다.내게도 형님에게도
내 누나도 내 동생도 청춘은 특별히 청춘으로 구별될 시절은 없었다.
그저 가난으로 부터의 도피만이 있었다.
내가 이 얼만의 시를 쓰잘데기 없는 흰소리라고 감상한들
그걸 너는 틀린 감상을 했다고 꾸짖겠는가?
이런 거다.
감상을 어찌 한단 건 없다.
그걸 보는 마음은 또 작중의도와는 다른 가치의 무엇이다.
그럼 내게 청춘이란 무얼까?
지금의 내게는 청춘이란
한 생물체가 가진 부적합한 환경을 피할 힘일 뿐
그 이상의 가치로는 모르겠다.
그 처지의 도피가 옳을지 아닐지를 결과로 유추함은 틀렸다.
그건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은 아니다.
이리 생각하며 다시 얼만의 시를 들여다 보자.
청춘 /새무엘 얼만
.
.
.
청춘은
인생의 어떤 시절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다.
그것은
장미빛 볼, 붉은 입술
그리고 유연한
관절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의지와
상상력의 우수성,
감성적 활력의 문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같은
신선함이다.
청춘은
욕망의 소심함을 넘는
용기와
타고난 우월감과 안이를 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청춘은 때때로
20세의 청년보다
70세의 노인에게
아름답게 존재한다.
단지 나이의 숫자로
늙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황폐해진 이상적 사고에 의해
늙게 되는 것일 뿐이다.
세월은
피부를 주름지게 하지만,
열정을 버리는 것은
영혼을 주름지게 한다.
고뇌! 공포! 자기불신은
마음을 굴복시키고,
흙속으로 영혼을
되돌아 가게 한다.
70세이든 18세이든
그 사람의 마음속에
경이로운 것에 대한 매혹,
무언가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
삶 속의 환희가 존재 한다면...
희망! 희열! 용기! 와
힘의 메시지를 갖는 한...
그대의 젊음은
오래도록 지속되리라.
안테나가 내려지고
그대의 영혼이
냉소의 눈과
비관의 얼음으로 덮이면
육신이 20세일지라도
이미 늙은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안테나를 올리고,
낙관주의의 물결을 잡는다면
그대 80세일지라도
청춘으로 살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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