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폐시상3. 서정주,오승철,강우식 그리고 옌 아이린...Andrés Segovia "Recuerdos de la Alhambra"
작성자古今작성시간26.06.13조회수0 목록 댓글 0
내가 서정주 시인의 글들이나
도종환의 접씨꽃
용혜원의 글들은
시로 보이기 전에 그들의 삶에 대한 변명같아서 별로 즐기지 않는다고
여러차례 말했다.
추천사를 삐딱하게 읽기란 글을 오랫동안 계시 했었으니
대충 무슨얘긴지는 아실게다.
오늘은 '연꽃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란 글을
한번 오승철,강우식 시인과 옌 아이린 시인의 글을 소개 할 이곳에 함께 싣는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 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무슨 시같은가?
난 이전에 변산엘 다녀오다가
서정주 문학관이란 곳을 가 본 적 있다.
그분의 시란 글들과 그분의 삶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글을 보면서는 어떤 것들이 쥐어지셨을까?
뭐이 섭했을까?
내생 어느때라도 다시 만날 이별도 이별일까?
그럼 뭣하러 강조된 가짜를 이별이라고 말할까?
만나러가는 바람과
만나고 가는 바람은 뭐이 다를까?
시인이란 정말 성인군자일 필요는 없을꺼다.
아니 시인만 말고 사람들 모두 다 그럴꺼다.
성인군자가 되기위한 노력이외엔 누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그 심경을 가벼이 말해도 될까?
제주도시인이라는 오승철 시인의 글을 읽어보자.
제주도엔 자신들만 고생하고 힘들었다는 피해의식이 많다.
육짓것들은 모르는...
자리젓 / 오승철
이대로 끝장났다 아직은 말하지 마라
대가리에서 지느러미 또 탱탱 알밴 창자까지
한 소절 제주사투리 그마저 삭았다 해도
자리라면 보목리 자리 한 일년 푹 절어도
바다의 야성 같은 왕가시는 살아 있다
딱 한 번 내뱉지 않고 통째로는 못 삼킨다
그렇다, 자리가 녹아 물이 되지 못하고
온몸을 그냥 그대로 온전히 내놓는 것은
아직은 그리운 이름 못 빼냈기 때문이다
내겐 두양반의 글들이 다 변명처럼 들린다.
그러나 오승철의 시엔 자신이 피치 못하는 상황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것이 들었다.
그게 딱딱한 -자리란 보잘 것 없는 조그만 생선의 -뼈를 통해
피해자의 마음을 다독이는 진정성 강한 시가 되었다.
자리젓을 드셔보셨을라나?
죄다 흐물거리는데 머리부분같은 어디엔가
지독한 단단함이 하나 남아있다.
그얘기지요?
아직 두편의 시를 더 들려드릴꺼다.
어머니의 물감상자 / 강우식
어머니는 시장에서 물감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물감 장사를 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온갖 색깔이 다 모여 있는 물감 상자를 앞에 놓고
진달래 꽃빛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진달래 꽃물을
연초록 잎새들처럼 가슴이 싱그러운 그리움을 담고 싶은 이들에게는 연초록물을,
시집갈 나이의 처녀들에게는 쪽두리 모양의 노란 국화꽃 물을
꿈을 나눠 주듯이 물감 봉지에 싸서 주었습니다
눈빛처럼 흰 맑고 고운 마음씨도 곁들여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해종일 물감장사를 하다보면
콧물 마저도 무지개빛이 되는 많은 날들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색동저고리 입히는 마음으로 나를 키우기 위해
물감 장사를 하였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지상에 아니 계십니다
물감 상자속의 물감들이 놓아주는
가장 아름다운 꽃길을 따라 저 세상에 가셨습니다
나에게는 물감 상자 하나 만 남겨놓고 떠났습니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운 색깔들만
가슴에 물 들이라고
물감 상자 하나만 남겨 두고 떠났습니다
이 시 어떻습니까?
좀 삐딱해 보이지 않습니까?
자신의 어머니 쓰시던 물건 이야기 하며도
모성을 떠올리면 끈 처럼 따라 연결될 어쩜 추모의, 또 어쩜 슬픔이라는 감정을 보이지 않지요?
근데 그런 거칠고, 무감정한 글을 시랍시고 소개할까요?
그거 아세요?
물감장사라는 게 뭘 하는 건 지요?
예전엔 그런 장사가 있었다는 건 아시나요?
전엔 옷감이 지금처럼 알록달록 각색으로 나오지 못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대개 광목이나 옥양목을 끊어다
지어입으려는 옷에 맞춰 물감까지 사다가
집에서 그 옷감들을 물들인 후 옷을 지어 입었죠.
파란색 빨간색 시인말에 의하면 연두색 노란색 ....
근데 물감을 드리려면
그 옷감에 어떤색들은 잿물-양잿물 아닌 짚을 태운 재를 바쳐 만든 물- 이나
빙초산을 쳐서 물감을 드려야 색이 곱게 잘 듭니다.
그러니 물감 한번 들이려 하면 손이 잿물이나 빙초산으로 거칠어지고
물감까지 들어 흉해 집니다.
그러니 그걸 물감장사에게 맡기기도 했습니다.
몸과 집안이 엉망이 되니까요.
시인이 어머니가 물감장사를 했다지요?
그러면 다른 이에겐 아름다운 색깔로 꿈과 희망을 선사하지만
자신은 산과 알칼리 그리고 여러가지 색으로
아주 추하고 흉하디 흉한 손과 모습이 되셨을 겝니다.
이시인은 그얘기를 하는 겁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만 그런 추해지는 물감장사를 한 거 아니고
자신에게도 그 물감장사의 밑천을 남겨주었다.
즉 자신도 세상 누구보다 추한 모습으로 더렵혀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이에겐 꿈과 희망의 색을 나누어 주는 시인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다시 가서 시를 읽어보시지요.
그런 느낌 나시지요?
이니는 우리 시인들중 가장 정직한 시인중 한 분 일 겝니다.
어줍잖은 고우려는 모습으로 시를 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마음에 솔직한 모습입니다.
독자에게 고운 꿈과 희망을 주려 어떤 꾸민 형태 아닌
리얼, 추한 표현도 다른 시에선 서슴치 않습니다.
위 시는 그런 것에 대한 변명같은 글도 되겠고,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사이 업같은 끈을 보여주는 글도 될겝니다.
아주 조금 어려우면 힘들다고 깨갱거리고,
어줍잖은 자신의 모랄리티로 괴로워하고,,,
이게 보통 우리의 모습 아니던가요?
그럴 때 우린 어떻게 그 장면을 자기안에 견뎌 담아내실 수 있던가요?
이 시인은 둔해서 고통이 없어서 진실만으로 시를 대하는 게 아니지요.
자신의 어머니가 남겨준 물감상자,
즉 시인인 자신도 남의 꿈을 위해 노력해야 하기에 그렇다는 겝니다.
이글은 그래서 어머니와 어머니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정을 기리거나 모성에 감사함없이
그저 다른 옷감이나 사람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흉하디 흉한 어머나 모습들에 마음쓰이는 거 조차도
자신의 상황과 견주려니 다른 수사가 들어갈 틈 없는 글이 되는 거 아닐까요?
자신의 부모가 친구들에게 부끄러울 때 없으셨나요?
자신의 아내가 챙피했던 때 없으셨어요?
그러곤 그 부끄럼과 챙피함이 더견디기 어려웠던 때는요?
이토록 어머니의 물감상자를 부끄러움서 길어 올려
자신의 삶의 모습을 정의 하려는 시인의 마음만 읽히는 시입니다.
유방/ 옌 아이린
일종의 푸딩
일종의 치즈케익
한 송이 육감의 장미
한 떨기 신비의 구름
한 병의 주정없는 독주
자발적일 때는
욕망에 의해 토론되다가...
수동적일 때는
이미 입안에 있다.
시란 쉽다.
세상 어느 것도 행하기 전에
한번만 시로 표현 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보면 된다.
제주도서 난 식당엘가면 허튼 짓하고 있는 젊은 여행객을 보며 헛웃음을 흘린다.
그들은 식사전 그 음식을 사진 찍어 보관한다.
개 웃기다
그 시간을 음식을 차려준 식당 주인께 감사해보라.
그 음식의 맛을 글로 표현해보라
멋진 시를 탄생시킬 시인도 탄생되리라
그 감사의 마음
그음식에 대한 경탄을
감정 하나도 없는 사진 찍는 일에 낭비하고 있다.
저 뭔 헛된 짓꺼리인가?
그 가게 광고가 당신들의 고 누구도 표현 못한 느낌을
상술 한자락과 바꾸는가?
말라
그 당신들의 고운 생각을 글로 쓰려 노력하라.
허면 어느것도 시가 된다.
어느것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이 시를 소개드리자 늙은이가 주책이라고 했다.
헌데 난 필이 꽂혀 드려다 보고 드려다 보고 다시 드려다 본다.
유방
그러면 무엇부터 생각나는가?
섹스?
쾌감?
그래 그러구 나면?
모성.
숭고함.....
여인이 자신의 몸뗑이에 달린 그걸 표현 한다면?
모나리자 그림의 모나리자가 다빈치가 사랑하는 여인이었다면
절대 눈썹을 안그리진 못했을게다.
설령 미적으로 눈썹을 안그리는게 완성도가 높아지더라도 말이다.
자신의 사랑을 훼손시킨다는 건
아마 상상까진 아니 생각속에서조차 가능하려나?
다빈치는 안그렸다.
그러면 그건 사랑의 감정으로 추해질 머언 그이상으로 여인의 얼굴을
완성시킨거나 아닐런지
그리고 모나리자의 얼굴을 들여다 보라.
그 그림에서 성적인게 느껴지는가?
거기서 종교적 착색이 보이는가?
우리가 사랑이라부르는 정서에 천착하는가?
다시 조 위로 올라가
시를 읽어보라
유방에 대한 물질이나 육체적 소중한 감춤이 있는가?
모성으로 숭상되는 정신이 있는가?
없다.
유방이라면 틀림없이 거기 있어야 할 것들이 모두 지워져있다.
그리곤 올곳이 여자의 앞가슴에 달린
그 고깃덩이에 대한 표현만 있다.
이건 남자에게선 어렵지 않을까?
여성이 바라 본 여성들의 몸의 구조에 대한 본질적 적나라한 모습.
이게 이시의 맛 아니겠는가?
양념한 불고기 아닌
그저 불판에 살짝 구워져 피맛 나는 등심같은 시다.
이즘 많은 글들에서 난 너무
MSG같은 조미료 맛을 느껴
속이 다 느글거린다.
도덕이라는 조미료
종교라는 조미료
모성이라는 조미료
더해 강요까지하는 다른 독자의 이해를 벗어나지 못하는 시어와 그시의 맛.....
그러지 말 일이다....
그게 시를 쓰는 길이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 보고 느껴야 자신에게서도 다양한 이유로 수식되고변함이 없는
자아를 발견할 수 있지않을까?
그게 시인이 되는 길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누가 뭐래도 난 시로 벌어먹으려 할 일 없어서
시로 벌어먹고 사회생활 하는 이들보다.
더 그처럼 시의 정수에 다가 갈 수 있다 생각하며 살아왔다.
Andrés Segovia "Recuerdos de la Alhambra"
1927년 녹음된,프란치스코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세고비아 연주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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