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먼 7 - 갈지자 언덕길을 올라 일광암 정상에서 섬과 멀리 샤먼 시내까지 조망하다!
2025년 3월 8일 푸젠성(복건성) 샤먼(厦门 하문) 시의 페리 터미널인 “동두마토우 ( 东渡 码头)” 에서
예약한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니 직원이 티켓 발매기에서 이름과 여권번호를 입력해 티켓을 발급해
바다를 건너 10여분 만에 구량위 (鼓浪嶼 고량서) 섬의 산치우티엔 마토우 (三丘田 码头) 에 내립니다.
1인당 50 위안씩을 주고 표를 사서 전동차에 올라타니 섬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데.... 거의
3분지 2를 돌아 숙장원에서 내려서 갈지자 언덕길을 올라가 일광암에 도착하니
일광암과 숙장원등 4곳을 보는 연표는 90원인데, 65세 이상은 여권 확인후 무료표를 줍니다.
여기 일광암 (日光岩) 은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그야말로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리니....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지라 혼잡하기 이를데가 없습니다.
무이산과 토루에도 한국인 단체들이 많더니만 여기 일광암에도 여러 단체가 밀어닥치는데... 가이드는
정상에서 반대편 길로 내려가지 말고 꼭 올라갔던 길로 다시 내려 오라고 신신 당부를 합니다.
중국에서는 이런 복잡한 관광지는 거의 틀림없이 일방통행이니 올라갔으면 반대편에
다른 길로 내려가야 하는데, 저 가이드는 그럼 사람들이 서로 헤어질까
걱정이 되는지 반드시 올라갔던 길로 내려오라고 하니 그럼 혼잡을 야기하는 일인데....
여기 중국 발음으로 "르꽝이엔" 이라는 일광암 (日光岩) 에는 아래쪽 에서 부터 1층
전망대, 2층 전망대, 3층 전망대가 있는데 2층 특히 3층은 워낙 좁은지라.....
경비원이 올라간 사람들이 내려오면 그만큼만 다시 사람들을 올려 보내는등 통제를 합니다.
우리 부부도 남들이 다 그러듯 기어이 인파를 헤치고 3층 전망대에 이르니 가장 꼭대기이긴 하지만
너무 비족은데 사람은 많은지라 여기서는 사진은 불가능하고 전망도 좋지 않아 서둘러 내려옵니다.
그러니까 1층이나 2층 전망대가 여유도 있고 전망도 좋으니 차분하게 구경할수 있는데다가 마음편하게
사진을 찍을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기어이 최고 높은 곳 까지 올라가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 입니다?
그런데 일광암에서 아래쪽에 구량위 섬을 내려다 보니 서양풍 붉은색 지붕을 가진 우아한 옛
건물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샤먼의 구량위가 서양 각국의 조계지가 되어 녀기에
서양인들이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인데..... 이는 1840년의 아편전쟁 때문에 그리 된 것입니다.
몇 년전에 광주에서 " 海戰博物館 (해전박물관) " 을 본 적이 있는데..... 옛 포대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2층에는 원통 입체형의 거대한 그림이 있는 데,
당시 아편전쟁 이라 불리는 후먼해전 虎门海战 (호문해전) 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1840년에 영국이 일으킨 1차 아편 전쟁 은 중국으로 부터 비단과 차(茶) 에 도자기를 구입하기 위해서 은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니 영국산 방직물의 중국 수출이 부진하자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을 중국에 팔게 됩니다.
청나라 관리 임칙서는 1839년애 아편 2만상자를 압수해 불지르니...... 마약상들을 홍콩섬으로 쫓겨
났고 이에 반발한 영국은 1840년에 광주를 침략해 전쟁을 일으키니 “청나라가
무역의 자유를 침해하고 사유재산을 몰수했다” 는게 이유인데, 그래 "아편도 사유재산" 은 맞지요?
영국 함대는 우수한 무기와 화력으로 1840년 11월 청나라 함대를 격파하고 천진
까지 북상했으며..... 이후 홍콩을 점령해 영국 영토로 선포하며 1841년
1월 7일 후먼 虎門(호문)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둔후 영국은 제해권을 장악합니다.
영국함 대가 청나라 함대에 일방적인 전투로 대승을 거둔 이유는 여러 가지 이겠지만..... 가장
큰 전력 차이는 "대포의 사정거리" 이니 영국 배는 사정거리가 중국 대포의
2배가 넘는지라 중국 함대 대포 사정거리 밖에서 포를 쏘아 청나라 함선을 모두 침몰시킵니다.
임진왜란때 해전에서 연젼연승은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지휘력이 수훈갑이긴 하지만.
그때도 대포의 사정거리가 빛을 발했으니.... 한산도 해전의 조선군 사망자는
2명에 부상자는 8명이며 또 명량 해전에 사망자는 2명에 부상자도 2명에 불과합니다.
그 이유는 일본 조총은 사정거리가 100미터에 불과하지만 조선 대포는 600미터에서 1000 미터
에 달하니....... 20문의 대포를 실은 조선의 판옥선은 일본 세키부네와 300미터 정도
거리에서 대포를 쏘면 조선 수군은 배나 인명 피해없이 적선을 격침시킬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명량해전에서 330척 왜선의 총대장은 도도 다카토라이지만 명량에 출동한건 133척으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휘했으며 선봉은 2만석 소 다이묘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자기배 6척에 배속된
배를 포함 33척으로 오는데 해협이 좁고 물살이 거세 저 33척이 2~3줄로 늘어서서 진격해 왔습니다.
그런데 저 33척과 처음 한두시간 동안 싸운건 이순신 장군의 배 단 한척에 불과했고 나머지 12척은 멀리 뒤쪽에
쳐져 이제나 저제나 도망칠 기회만 엿보았으니.... 칠천량 해전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의 12척은 칠천량으로
들어가지 않고 거제도 바다를 돌아 도주해서 살았던 까닭인데 이순신 혼자 버틸수 있었던게 대포의 사정거리라?
"영화 명량" 은 거짓투성이이니.... 명량해전에서 배설이 거북선을 불태우는데 배설은 사전에 달아났으니 당시 없었고
또 거북선도 아예 없었으며 이순신 장군의 배에 적선이 달려들어 장군의 배에 올라타서 육박전을 벌이고 우수영
어민들이 밧줄로 배를 끌고가는데 이 장면도 모두 거짓이니 왜선은 포격으로 우리 배에 접근하는게 불가능 했습니다.
다만 이순신 장군이 초계기를 올려 급하게 부르니 중군장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다가오자 죽이겠다고 호통치니
안위가 넋이 나가 앞뒤 분간없이 앞으로 나간지라 적선 2척에 포위돼 노꾼이 몇명이 물에 빠졌지만 왜군은
크고 높은 판옥선에 단 한명도 오르지 못했고 멀리서 이순신 장군이 포격해 저 왜선 2척을 격침한게 전부 입니다.
나무위키를 비롯 수많은 기록들도 사실과 다른게 너무 많은데..... 첫째 조선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했다, 둘째
정유재란의 흐름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셋째 왜 수군은 당일 후퇴한후 다시는 전라도 바다로 진격해
오지 못했다 넷째 전라도 바다는 안전해졌고 도민들은 위험에서 벗어났다, 다섯째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한 왜군이 명량해전 패배로 바다를 통한 진격이 불가능해져서 후퇴했다고 하는데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음력 9월 16일 명량해전 대승리후 왜군이 후퇴하자 이순신 장군은 우수영으로 돌아와 하루종일 굶으며 싸워 탈진해
녹초가 된 병사들에게 밥을 먹이고 재워야 하는데 다급하게 재촉해 노를 젓게해 우수영을 지나쳐 멀리 당사도
에 이르러 상륙도 못하고 배에서 지샌후 다음날 다시 노를 저어 어의도에 이르러 비로소 섬에 상륙해 밥을 먹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당일 다급하게 후퇴하신 이유는 적은 아직 300척 가까이 남앗으니 일부가 진도를 우회해 포위
되면 포탄과 화약이 많이 소진된 조선 수군은 싸우지도 못하고 전멸당할 것을 염려해 멀리 금강하구
군산의 선유도 까지 후퇴한 것이며 왜군은 다음날 바로 진격해와 우수영과 나주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살륙하며 불을 지르면서 이순신 장군을 추격해 영광까지 북상하니.... 전라도 바다는 지옥으로 바뀌었습니다.
명량해전 대승리 7일 후인 9월 23일 형조좌랑 강항은 식솔을 배 2척에 태우고 바다로 피란했다가 영광
에서 이순신 장군을 추격해 올라온 도도 다카토라의 수하 이요(伊豫) 국 오즈 성주 사도(佐渡)
의 부하 노부시치로 (信七郞) 에게 잡혀 무안과 순천왜성을 거쳐 시코쿠 오즈성으로 잡혀가 그후
교토에서 일본에 주자학을 전하게 되며 돌아와서는 선조에게 간양록을 지어 바치니 조용필이 노래합니다.
정유재란 직산 전투도 모리와 구로다 4만이 천안 까지 북상할 때 맞선 조선군은 초기에 황석산성에 5백명과
남원성에 1천명( + 명군 3천명) 뿐이고 모두 도주하니, 명나라 파새와 해생의 4천 기병이 9월 7일
직산에서 하루 싸우고는 수원으로 물러났고, 승리한 왜군은 3~4일간 약탈후 9월 12일 물러갔는데
직산 전투 보다 4일 후인 9월 16일 에야 벌어진 명량 해전 패배 때문에 바닷길이 막혀 후퇴했다고 말합니다?
정유재란때 일본군은 장기전으로 음력 10월 2일까지 남해안 28개 왜성으로 물러간건 겨울을 나기 위함이니
이순신 장군은 직산처럼 영광의 왜군이 스스로 물러간 10월 3일 군산을 출발해 우수영 에 돌아온 날은
후퇴한지 24일째인 10월 9일로.... 성 안팎에 거주하던 그 많던 조선인들이 단 한명도 나타나지 않으니
영화 명량에서 응원하던 조선 백성들은 전부 학살되거나 포로 로 잡혀 끌려간 것이라? 매우 비통해 하십니다!
그해 5월에 광저우(광주)에 상륙한 영국군은 약탈과 폭행 사건을 일으키자 민중이 봉기하지만
1842년 8월 영국군은 광저우를 포위해 조약을 강요하고는 배상금
600만 달러를 받은 후에도 양쯔강 요충지를 차례로 함락시켜 난징 조약을 체결했던 것입니다.
1842년 영국이 승리하면서 배상금과 홍콩의 할양 및 광둥, 샤먼(하문), 푸조우, 영파, 상해 등을 개항
하였으며..... 그외에도 치외법권, 관세 자주권 포기, 최혜국 대우 등의 강요를 받게 되었습니다.
2차 아편전쟁 은 1차 아편전쟁 이후에 자급자족에 능한 청나라의 개방수준이 기대에못 미치자 애로우호 사건을
구실로 1856년 프랑스와 함께 청나라를 공격한 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광저우를 침략해 방화와
살인을 저질렀고 동시에 러시아군도 청나라로 진격하니 이후 연합군은 텐진을 점령해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됩니다.
텐진 조약은 청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고 개항 항구를 확대하며 아편
무역을 합법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때 청나라는 기독교 공인도 약속
했는데, 하지만 청나라의 후속조치가 미진하자 영국과 프랑스군은 북경으로 진격합니다.
1860년에는 황제의 별궁인 원명원을 약탈하는등 베이징 함락후 베이징 조약을 맺게됩니다.
서양의 침략 앞에 속절없이 무느져 갔던 아시아의 맹주 청국의 몰락을 돌아보면서
이제 G2 로 굴기하는 중국을 생각하노라니 "세상에 영원한 강국은 없다" 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해서 동아일보에 '이준식의 한시 한수' 칼럼에 실린 한시 "경이로운 발견" 이 떠오릅니다.
산 아래 난초 싹 오종종히 개울에 잠기고, 솔밭 사이 모랫길 흙도 없이 정갈한데,
쓸쓸한 저녁비에 소쩍새 운다. 그 누가 인생은 다시 젊어지지
않는다 하는가, 문 앞 개울물은 외려 서쪽으로흐르거늘,
백발이 다가와도 제발 ‘누런 닭 새벽을 재촉하네’ 라 노래하지 마시라.
(山下蘭芽短浸溪, 松間沙路淨無泥, 蕭蕭暮雨子規啼. 誰道人生無再少, 門前流水尚能西, 休將白髮唱黃雞.)
― ‘완계사 (浣溪沙· 산 아래 난초 싹 오종종히 개울에 잠기고)’ 소식 (蘇軾 · 1037∼1101)
이 노래에는 ‘기수 (蘄水) 청천사(淸泉寺) 로 놀러갔더니 절 곁 난계 (蘭溪) 의 물이 서쪽으로 흐르더라’ 는
서문이 달려 있다. 예부터 중국은 지형이 서고동저 (西高東低) 라 모든 하천이 동류 (東流) 한다고 여겼다.
한데 이 개울은 뜻밖에도 서쪽으로 역류하고 있다. 오호, 이 반가운 경이! 세상 이치가
이럴 수도 있구나. 인생이 꼭 늙어만 가는 건 아닐지니 새벽 닭의 울음에 탄식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시인으로선 ‘소쩍새 우는 쓸쓸한 저녁’이 홀연 상큼해졌을 것 같다.
‘누런 닭’ 의 비유는 당대 백거이의 발명. 그는 ‘누런 닭 새벽을 재촉하여 축시 (丑時·오전 1∼3시)에 울고, 밝은
해는 한 해가 저무는 걸 재촉하여 유시 (酉時·오후 5∼7시) 전에 사라진다’ (‘취가· 醉歌’) 라는 시구를 남겼다.
닭이 새벽에 울고, 해가 일찍 저무는 현상을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에 비유한 것이다. 동파는 역발상으로
닭과 해의 움직임에 조바심 치거나 백발을 한탄만 하지는 말라고 낙관한다. ‘완계사’ 는 곡명.
그러고는 우리 부부는 올라갔던 길과는 반대편으로 내려오는데.... 한참 계단을 내려오니 도로와
광장이 보이고 거기에 옛날 중국을 찾아온 서양인들이 보이며 또 청동 말이 서 있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너무나도 익숙하게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 또는 "올라가지 마세요"
라는 팻말이 세워질 법도 한데.... 하지만 서양에서는 잔디밭에 들어가서 뒹굴며 또
여기 중국에서는 저 말을 튼튼하게 만들어 누구나 말에 올라타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봅니다.
잔디밭을 만들고도 우리나라는 훼손이 걱정이 되어 기어이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또 저런 말들도 대충 만드니..... 구조가 너무 약한지라 올라타면 파손이 걱정되지만 중국
사람들은 견고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타고 놀수 있도록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