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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15 - 요시노에서 고다이고왕(천황)의 남조 조정을!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6.06.20|조회수35 목록 댓글 0

 

나라 여행15 -  요시노에서 남북조때 고다이고왕(천황의 남조 조정을 생각하다!

 

 

2024년 11월 24일 사쿠라이역에서 긴테쓰 전철을 타고 야마토하기(大和八木역과  가시하라

진구마에 (橿原神宮前역에서 2차례 환승을 해서 모두 전철을 3번 타고는

남쪽으로 달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오후 1시 경에 종점인 요시노 吉野(길야)역에 도착합니다.

 

 

요시노 산에 오르는 방법은 3가지가 잇지만 오늘 우리 부부는 요시노역 吉野駅에서 3분 가량을 걸어

올라가  센본입구 千本口 에서 케이블카(로프웨이)를 타고 요시노산(吉野山에 도착해

시모노센본 千本 언덕길을 올라가  구로몬(黑門을 들어서서 양켠에 즐비한 상가를 구경합니다.

 

 

언덕길을 10분에 걸쳐 올라 나카노센본 中の千本 에 이르러 언덕 위에 장왕당(葬王堂)을 보는데 긴푸센사

金峯山寺 (금봉산사) 의 부속 건물로 둘러 씌워 놓은 것을 보니..... 보수공사를 하는 것 같습니다?

 

 

긴푸센사 金峯山寺 (금봉산사)  를 구경하고는 반대편에 계단을 내려가니 저만치

안쪽에 불당과 탑이 보이는데..... 여기가 바로 남북조 시대에 고다이고왕

(천황) 의 남조 조정 남조 궁궐터 길야조궁지 (吉野朝宮址) 가 있었던 자리 입니다.

 

 

예전에 왔을 때는 天滿宮(천만궁) 을 지나  南朝妙法殿 (남조묘법전과  吉野朝宮址

(길야조궁지라고 적힌 비석에 도착했었는데...... 이곳이 남조의 궁궐터

인데,  3층탐이 있고 또 국보 仁王門 (인왕문이라고 적힌 작은 절이 들어서 있습니다.

 

 

어느 집에 오래된 사진에서 초상화를 보는데 요시노에 그의 능이 있다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한을 품고 죽은 南朝(남조)  고다이고왕 (後醍醐天皇) 입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1185년에 수립되었는데 1221년 고토바 상황이 호조 요시토키를 몰아내기

위해 병사를 일으켰다가 오히려 막부의 압도적인 위세에 밀려 실패한 조큐의난 이후

무가가 우위에 서게되니..... 막부는 고토바쓰치미카도준토쿠 3명의 상황을 유배 시킵니다.

 

 

이후 가마쿠라 막부는 조정의 정치에 개입 하게 되는데.... 1272년 고사가원이 숨을 거두자 조정

에서는 후계자의 지위를 둘러싸고 형제 사이인 고후카쿠사 상황과 가메야마왕(천황)

사이에 누가 조정을 통치할지가 문제가 되자 막부가 개입해서는 가메야마왕의 손을 들어줍니다.

 

 

그러나 고후카쿠사 상황은 자신의 황자인 히로히토를 후시미 천황로 세워 즉위시키니 고후카쿠사

상황의 자손(지묘인 통) 과 가메야마왕(천황) 의 자손(다이카쿠지 통) 은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지묘인 통과 다이카쿠지 통에서 교대로 천황에 즉위하게 됩니다.

 

 

가마쿠라 막부가 중간에서 교대로 상속할 것을 조정한 것인데..... 이러한 형제 상속 은

우리나라에도 고구려에 전례가 있고 특히 백제는 오랫동안  개루왕의 두 아들,

장남인 초고왕 과 차남인 고이왕의 후손들이 번갈아 가며 왕위에 오른 사례가 있습니다.

 

 

5대 초고왕은 214년에 죽고  아들 구수왕에 이어 234년 7대 사반왕이 1년만에 죽자 왕위는 작은 할아버지 개루왕이

이으니 8대왕인데 286년 아들 책계왕과 298년 손자 분서왕이 이었으나 304년 왕위는 초고왕 계열의 비류왕이

11대가 되고 12대는 다시 고이왕 계열의 계왕이 그리고 346년 초고왕 계열 근초고왕이 이은후 장자상속으로 갑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의 원칙은 양통 사이에 대립과 항쟁을 격화시키고 공가 (公家사회의 정치종교,

예능등 각 부분에 분열 을 일으켰으니.... 공가 사회는 강력한 권한과 지도력을

갖춘 성주(聖主의 출현을 갈망하는 가운데 고다이고왕(천황은 이러한 변혁기를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고다이고왕(천황왕의 즉위와 함께 죽은 고니조의 아들 구니요시 친왕이 동궁으로 세워지는데 고우다 상황은

죽은 고니조왕(천황을 다이카쿠지 통의 적통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구니요시 친왕을 즉위

시킬 생각이었으니..... 고다이고 왕은 9세였던 구니요시 친왕이 성인이 될때 까지 한시적인 왕 이었던 것입니다.

 

 

고다이고왕(천황은 가마쿠라 시대 1318년 제96대 일왕(천황이 되었는데 귀족 사회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 학문을 장려하는등 조정 정치를 개혁하는

한편 비밀리에 가마쿠라 막부 타도계획을 진행하다가 발각돼 막부에 의해 오키로 유배 되었습니다.

 

 

그후 고다이고왕(천황은 무사들의 봉기를 이끌어내니 천신만고 끝에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했는데.... 친정 초기는

성군으로 평가가 좋았으니 기록소를 재흥하고 참신한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 쇄신에 노력 하였으며 조정은

유학적인 분위기가 강하여 중국에서 새롭게 들어온 송학(宋學)인 주자학이 논의되었으니 내외의 기대를 받았습니다.

 

 

중세 일본 귀족 사회는 가문과 관직이 밀접하게 연결 되어 있어서 특정한 가문에서 특정한 관직을

대대로  전승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고다이고는 종래의 관습을 무시하고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하였으니 1323년 하급 유자 관료 히노 도시모토를 조정 요직에 발탁합니다.

 

 

이런 충격적인 조치에 귀족들은 기겁을 했지만 하나조노 상황은 도시모토의 현명함에 대해

잘 모르지만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은 신분이 비천한 때문인데 문벌에 의해

고위직에 오르는 것은 난세의 풍조이니...... 현명한 인재를 중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 유행한 송학(주자학은 고다이고 천황의 가마쿠라 막부 타도 운동의 배경으로

지목되는데 그외에 황위를 자신의 아들이 아닌 다이카쿠지통의 구니요시 친왕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게 싫은지라 막부를 타도하고 황권을 세울려는 욕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1324년 제1차 막부타도 계획은 쇼추의 난’ 이라고 하는데 사전에 누설되니 밀고를 받은

가마쿠라 막부의 교토 로쿠하라 단다이 는 병사를 파견하여 거병을 준비하고 있던

주모자를 체포하니 고다이고 천왕은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는 진술로 난을 모면 합니다.

 

 

2차 도막 계획은 1331년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인 요시다 사다후사의 밀고로 가마쿠라

막부에 알려져서 주모자들이 체포되자 고다이고왕(천황)은 교토를 탈출 가사기로

피난을 가서 주변 무사들에게 봉기를 재촉했으나 이듬해 오키섬에 유배 당하고 말았습니다.

 

 

교토에는 지묘인통의 고곤 천황(일왕)이 즉위하게 되자 고다이고의 아들인 모리요시 친왕과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이 봉기하면서 전국에서 도막 운동이 불타오르니 고다이고왕은

오키섬을 탈출 센조산에 올라가 가마쿠라 막부를 칠 것을 명하는 선지를 전국에 발급합니다.

 

 

막부에 의해 교토로 파견되었던 토벌 대장 아시카가 다카우지 가 이에 호응하면서 1333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 하니 고다이고는 교토로 귀환하게 되는데  조정과

막부를 통일한 공무일통 정권을 목표로 지묘인통의 영지를 인정하고 공로자를 포상합니다.

 

 

고다이고왕(천황)은 절대적 귄위를 나타내기 위해 토지 영유권은 천황의 문서에 의해서만 확인

받을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토지 영유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법을 공포하는데  전대

부터 내려오는 관습을 무시한 처사 였기 때문에 전국 무사들의 맹렬한 반발을 초래하게 됩니다.

 

 

어쩔수 없이 법령을 변경하니 논공행상의 불공정 과 함께 신정권의 권위를 실추 시켰는데 게다가 무리한

궁궐 건설이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되자 가마쿠라에서 호조 도키유키의반란이 일어났으니 진압하기

위하여 가마쿠라로 내려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반기를 드니.... 여우를 쫓으니 늑대가 들어온다던가요?

 

 

고다이고왕(천황은 히에이산으로 도망갔지만..... 결국 교토로 돌아와 다카우지가 옹립한 고묘

일왕(천황에게 삼종 신기(거울구슬를 건네주고 요시노(吉野)로 도망 와서

조정을 여니 60년간 교토의 조정 북조와 고다이고가 있는 요시노의 남쪽 조정 남조가 병존 합니다.

 

 

이후 고다이고는 여기 나라현 남부 요시노에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닛타 요시사다 등 남조의 주력이 잇달아 전사하고 무쓰로 향하던

노리요시 친왕의 배가 폭풍우를 만나서 되돌아오는 등..... 남조의 세력은 급속히 쇠퇴합니다.

 

고다이고왕은 1339년 노리요시 친왕에게 양위하고 조적토멸 · 교토탈회 (조정의 적 다카우지를 멸하고 교토

를  탈환할 것)’ 의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52세였는데...... 저작 외에도 이화집’ 

신엽화가집’  에 일본 고유 형식의 시가인 와카가 몇수 전하는데 그의 능은 여기서 남동 2.5km 지점에 있습니다.

 

 

1392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요시노의 남조 고카메야마왕(천황)이 북조 고코마쓰왕(천황)

에게 천황 지위를 양보하는 대신에 남조측의 황자를 황태자로 삼는다는 조건을

제시하니 남조 고카메야마는 승낙하고 교토로 귀환하여 북조에 신기(神器

넘기고 퇴위하니...... 1336년 부터 1392년까지 60년 가까운 남북조 분열은 끝나고 통일됩니다.

 

 

남북조 분단 시기는 고려 공민왕(1351~1374과 우왕(1374~1388시기와 겹치는데,

이 시기에 왜구가 유독 극성을 부렸으니 공민왕때에 왜구는 경상전라도는 물론이고

함경도와  평안도에 출몰하며 황해도에 상륙해 개경을 노리니 수도를 철원등 내륙으로

천도 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는데.....  24년간 100회 가 넘는 침입으로 고려는 쑥대밭이 됩니다.

 

 

우왕때에는 15년간 왜구의 침략 횟수는 무려 370회 에 달했으니 1년에 25회 꼴인데 강화가

함락되고 수도 개경이 위협 당했으며 고려 강산은 산산히 찢어져 피로 얼룩지니

섬과 해안 지방은 사람의 자취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무인지경으로 변해 황폐화 되었습니다.

 

 

공민왕과 우왕 재위 38년간 왜구가 무려 470회나 침략했으며  또 병력도 대규모에 이른 것에 대해 일본과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요시노의 남조 조정이 북조와 전쟁 군비 를 확보하기 위해 대거 왜구의 대열에 참가했기

때문으로 보는데..... 조선조 들어서도 왜구침탈이 끊이지 않자 태종 임금은 울릉도에 공도령(空島令을 내립니다.

 

 

조선인의 울릉도 거주를 금하고 3년에 한번씩 순시선을 보냈는데,  1407년 대마도주 종정무는

평도전을  보내 비어있는 무릉도(울릉도에 왜인들이 이주하기를 청원하므로 불허했습니다.

 

 

 “종정무가  무릉도에  부락을 거느리고 가서 살고자 하므로  이를 허락한다면  일본 국왕이

반인(叛人) 을 불러 들였다 하여 틈이 생기지 않을까” 하니, 남재(南在) 가 대답하길

“왜인의 풍속은 반 (叛) 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따릅니다.”  해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끈질긴 대마도주가 광해군때인  1614년에 또 올린 왜인들의 울릉도 이주  2차 청원도 거부했으며 

1881년 이규원의 순시선이 불법 거주한 왜인 120명을 적발하자 놀란 고종은 공도정책을

포기하고는  경상도와 전라도 조선인 20호를 울릉도에 이주 시키니.... 현재 주민들의 조상입니다.

 

 

그러고는 산을 내려와 요시노역에서 긴테쓰전철 요시노선 기차를 타고 나라시로

돌아가는데....  요시노에키 吉野駅 에서  15시 37분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다가 우리 부부는 가시하라진구마에  2정거장 전인 아스카역에서 내립니다.

 

 

그러고는 역 광장에 자리한 인포메이션 센타로 들어가서는  아스카 지도를 얻어 밖으로

나오는데....  아스카는 일본 최초의 수도이니 4번째로 방문한 오늘은 해가

저무는 중인지라 유적을 보기는 어렵고 옛날에 마을에 들어가 구경한 일을 회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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