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5 - 영국에 침략자 프랑스인들의 플란타지네트 왕조가 건국이 되다!
라틴화 된 켈트족의 나라 브리타니아는 6세기에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로마군이
본국으로 철수하니... 켈트족인 픽트족과 스코트족이 남하하자 브리튼왕 보티게른
(Vortigern) 은 급한김에 용병으로 게르만 색슨족의 족장 헹기스트(Hengist)
등을 불러들였으나 저들 색슨족이 배신해 브리튼인들을 학살하고 영국에 정착합니다.
게르만 색슨족은 남쪽에 에섹스, 서섹스 및 웨섹스 왕국을 세우고 앵글족은 북쪽에는
노섬브리아, 메르시아 및 이스트 앵글리아 왕국을 세웠으며 쥬트족의 켄트
왕국과 더불어 "앵글로 색슨의 일곱 나라" 인데... 이후 기독교로 개종한 일곱
게르만족 나라들이 서로 싸우는 중에 북쪽에서 바이킹 노르만족의 침입이 시작됩니다.
바이킹 노르만족의 시대는 8세기 후반 부터 11세기 후반 까지 서유럽에 바이킹
들이 약탈과 침략을 일삼던 시기였는데.... The Vikings 은 지금의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인들로 Vik- 'a bay/creek' 는 강가에 거주
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원래는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며 소박하게 살았습니다.
바이킹은 700년 중반 부터 노략질을 시작했으니 1차 약탈의 시기는 787년 부터 850년
까지를 말하는데, 역사적으로 바이킹의시대는 793년 6월 8일, 영국 북부 노섬브리아
에 있는 섬 Lindisfarne 수도원에 바이킹이 침략해 약탈을 했던 사건을 기점으로
하는데, 미국 히스토리 채널 TV 극“Vikings" 에서 라그나르를 주인공 으로 그렸습니다.
라그나르가 이끄는 바이킹들은 845년에 세느강을 타고 올라와서 파리를 공격했으며
111명의 포로들을 프랑크군과 파리시민들이 보는 가운데 교수형에 처했으며
부활절날 파리에 들어가자 샤를마뉴 대제의 손자로 프랑크왕 샤를 2세는 7,000
파운드의 은을 제시하는데 여기에 맛을들인 바이킹들은 이후에도 침공을 거듭합니다.
마침내 바이킹 노르만족이 885년에 세느강을 거슬러 올라와 파리에 육박
하자... 굴복한 프랑스 왕 샤를 3세는 911년에 조약을 체결해 세느강
하구에 땅을 떼어 주고 많은 금은과 공박직위를 내리니 저 바이킹
노르만족들은 프랑스 여자를 취한후 정착하니 "노르망디" 라고 부릅니다.
바이킹들이 프랑스 노르망디에 정착한지 180년 세월이 흐른후 영국왕 에드워드
사후에 헤럴드가 영국 왕위에 오르자 1066년 프랑스인이 다 된 노르망디공
윌리엄은 5천명의 기마병과 1만명의 보병을 모아 영국에 침입하여......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게르만 색슨족인 웨식스 왕국의 헤럴드 왕을 죽입니다!
영국 영토 전체를 완전하게 지배하는 사실상 최초의 영국 왕조인“노르만 왕조”
가 탄생했으니..... 잉글랜드를 차지하고 웨일스와 아일랜드 대부분을 점령
하였으며 스코틀랜드에 정착해 프랑스식의 봉건제를 지역에 정착시켜나갔고
본래 있던 앵글로색슨 지배계층들과 교류하며 섬의 엘리트층으로 자리잡습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잉글랜드의 노르만계의 왕들은 웨일스 지방을 정복하는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스코틀랜드를 합병하는 데에는 실패하여 1320년에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반강제적으로 인정하기도 하였으니 이후 스코틀랜드
는 1700년대에 합병될 때 까지 시시건건 잉글랜드와의 충돌을 반복하게 됩니다.
190년 후에는 영국에 플랜타지네트 왕조가 들어서는데 왕조의 창시자인 프랑스 앙주백작
앙리 2세는 영어로는 헨리 2세(Henry II)이며 독일어로는 하인리히 2세인데
앙주백작 외에도 노르망디 공작, 멘 백작, 아키텐 공작, 가스코뉴 공작, 푸아티에 백작,
낭트 백작, 브르타뉴 상위주군에 영국왕, 스코틀랜드 왕국 상위주군, 아일랜드 영주입니다.
헨리 2세의 아버지는 프랑스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이고 어머니는 노르만왕조 영국왕
헨리 1세의 유일한 딸인 마틸다인데, 헨리 1세의 외조카인 스티븐 영국왕이 죽자
1154년 12월에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라 플랜타지네트 왕조를 여는데.... 그 2년
전인 1152년에 프랑스의 왕비였다가 이혼한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결혼을 했습니다.
1137년 4월 9일 프랑스 서남부 아키텐의 공작 기욤 10세의 아들 기욤이 성지순례중 스페인
에서 죽자 공작은 15살난 딸 엘레오노르에게 땅을 물려주면서 후견인으로 프랑스
황태자를 골랐으니 7월 25일에 엘레오노르는 보르도의 상 탕드레 성당에서 프랑스
의 왕자 루이와 결혼하고 파리로 가던 중에 루이 6세의 죽음과 함께 프랑스의 왕비가 됩니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의 왕비로서 루이 7세와 함께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해서는
안티오키아공작인 숙부를 도우기 위해 시리아의 알레포를 공격하도록 요구
했으나... 남편이 거부하면서 사이가 틀어진후 귀국해서는 밤샘 기도에만 열중
하는 독실한 기독교도인 남편 때문에 남자아이도 태어나지 않으니 불화가 심해집니다.
엘레오노르는 숙부인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과의 관계에 대해 의심을 받기도 했는데
엘레오노르가 직접 2차 십자군에 참여한 것도 루이 7세는 예루살렘순례에
더 중점을 둔 데 반해, 엘레오노르는 숙부에게 군사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기
때문이었으니..... 원정이 진행될수록 둘의 사이는 급격히 나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녀의 고향 아키텐과 프랑스왕실간에 정치적 갈등이 심해지는 등 엘레오노르는 남편과
결혼생활이 파탄에 이르렀으니 교황에게 청해서 루이 7세는 10촌이니 근친상간이라는 이유로
혼인무효 판결을 받았는데 이후 재혼한 앙주 공작 헨리 2세는 이보다 더 가까운 8촌 이었습니다?
앙주 백작 헨리 2세는 9살 연상인 이혼녀 엘레오노르와의 결혼을 통해 프랑스
서남부의 보르도등 부유한 와인산지를 물려받아 잉글랜드의 영토를 크게
넓혔으며... 정력적으로 국사를 보살펴 플랜태저넷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등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니 아들은 리처드 1세 왕과 존 왕 등 10명이나 낳았습니다.
하지만 헨리 2세는 가정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왕비 엘레오노르 및
아들인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제프리 2세 등과는 사이가 무척 나쁜 편
이었으니, 그 때문에 말년에는 자식들의 반란으로 권력투쟁으로 얼룩진 가정사
를 겪다가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으니 콩가루 집안의 대명사라고 할 인물 입니다.
헨리 2세의 어머니 영국 "공주 마틸다" 는 잉글랜드 왕위를 놓고 사촌인 스티븐
왕과 무정부시대라는 오랜 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런중에 스티븐
왕은 자신의 상속자가 될 장자 외스타슈를 잃자 상심해서 다 포기하고는
마틸다와 화해하니....... 마틸다의 아들 헨리 2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합니다.
그후 스티븐왕이 실의로 일찍 죽자, 즉위한 헨리 2세는 어머니와 외당숙이 벌인 내전
탓으로 난장판이 된 잉글랜드를 다시 안정화시키고 혼란기 동안 잉글랜드를
넘보던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군주들에 보복을 하는데 그 2년 전에 헨리 2세는
19세에 9살 연상인 프랑스왕 루이 7세의 전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했습니다.
헨리 2세는 19세로 결혼하기 전 부터 정부가 있었고 결혼 후에도 늙은(?) 처에 만족하지 못하니
대놓고 바람을 피워서 왕비와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와의 사이에서
5남 3녀를 두었는데...... 그중 왕이 된 자식은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존 왕 모두 셋 입니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왕 보다 영지가 더 넓다는 아키텐 공작의 상속녀였는데 헨리 2세
와 재혼하면서 푸아티에, 가스코뉴 지방까지 영국으로 넘어왔으니 기존에 노르망디, 앙주,
잉글랜드 지방까지 합치면 영국 + 프랑스 서쪽 절반에 달하는 거대한 영토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비 엘레오노르와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여러 유럽 왕가에 혼인관계를 맺어
시칠리아, 독일, 카스티야의 영지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스코틀랜드
의 말콤 1세를 압박해서 충성서약을 받아내고 노섬벌랜드 등의 영토를 되찾았습니다.
토머스 베켓(Thomas Becket)을 등용해 행정과 사법 제도를 정비해 봉건 군주국에서
관료군주국으로 잉글랜드를 탈바꿈시키는데, 충신이었던 토머스 베켓은 헨리
2세가 주선해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자 그와 대립하니 이 시기는 잉글랜드
왕국 내 교회의 영향력을 두고 왕권과 교황권이 격렬하게 대립하던 시기였습니다.
결국 불화가 커져서 헨리 2세는 베켓과 크게 다투고는 "저 말썽쟁이 성직자를 내게서
없애줄 이는 없단 말인가?" 라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발언을 했고 즉시 부하
넷이 잉글랜드로 건너가 토마스 베켓을 죽여버리자 그것 까지는 미처 예상못한
왕은 당황하는 중에 교황청에서 토마스 베켓을 성인으로 시성하니 큰 낭패를 봅니다.
헨리 2세는 자신의 생각대로 왕국을 분할하고자 했으니 장남은 죽은지라 차남인
청년왕 헨리에게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3남 리처드에게는 아키텐을,
4남인 제프리에겐 브르타뉴를 물려줄 생각이었는데 아일랜드 정복 전
까지 5남 존은 상속분이 없었고 이것이 후일 '결지왕' 이라는 별명으로 불립니다.
헨리 2세는 청년왕 헨리를 잉글랜드의 왕위에 앉히고 공동으로 순회를 돌면서
후계를 탄탄히 하려고 했었지만 결코 아들에게 실권을 주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청년왕 헨리는 심지어 자신의 기사들에게 제대로 봉급 조차
주지 못했고 아버지의 간섭에 불만을 품기 시작해 점차 갈등을 빚기 시작합니다.
지국내에 존재하는 엄청난 영국령 영토를 시기하던 프랑스왕 루이 7세는 청년왕 헨리
를 꾀어서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려고 유도했고, 남편의 바람기에
분노한 어머니인 엘레오노르의 부추김은 한술 더 떴으니 엘레오노르는 헨리뿐만
아니라 리처드와 제프리에게도 권력 분배를 빌미로 반란을 일으키라고 부추깁니다.
그런 상황에서 루이 7세까지 끼어들자 3명의 불충한 아들들은 프랑스 궁정으로 갔고
원조 약속을 얻은후 아버지를 향한 반란을 개시하자... 헨리 2세는 충격을
받고 분개하면서도 노련하게 대응했으니 3갈래로 몰려오는 군대를 노르망디
에서 모두 격파하고는...... 오히려 세 아들 모두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헨리 2세는 아들들을 사면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제안했고 결국 3명의 아들들은 항복했으니....
프랑스왕 루이 7세는 입맛만 다실 수밖에 없었고 엘레오노르는 이 반란 중에 헨리 2세에게
붙잡혀서 감금당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후 헨리 2세가 사망하고서야 비로소 풀려나게 됩니다.
막내아들 존은 어린 탓인지 이 반란에 합류하지 않고 아버지의 곁을 지켰으니
헨리 2세는 마지막까지 존만을 편애하는데, 대반란 이후 청년왕 헨리는
여전히 권력 분배가 되지 않고 아버지의 간섭을 받고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에 불만을 품고 다시금 반란을 준비했으나 곧 병에 걸려 사망합니다.
그 전에 부유한 프랑스 아키텐을 둘러싸고 청년왕 헨리와 제프리가 각각 리처드와 싸우던 중에
헨리에 이어 제프리 또한 병으로 죽으니.... 3남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가 되지만 아버지 헨리 2세가 아키텐 땅을 둘러싸고 자식인 리처드와 또 다투게 됩니다.
리처드는 "아키텐은 어머니가 물려준건데, 아버지가 왜 간섭이냐" 라며 불만을 표했으며 또 리처드는
자신이 자란 고향인지라 이를 소중히 여기는 땅인데..... 헨리 2세는 이를 멋대로 동생 존에게
주겠다고 선언하자 리처드가 반발한 것이니 결국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헨리 2세는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수세에 몰리자 화해해 봉합하는데 그런 상황
에서 제3차 십자군 원정이 선포되자 프랑스왕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는
대립을 멈추고 십자군 참전을 준비했으나.... 의견 차이로 휴전은 결렬
되었고 아키텐을 둘러싸고 헨리 2세와 3남 리처드는 계속해서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헨리는 사랑하는 막내 아들 존에게 아키텐을 물려주려고 했고 리처드는 아키텐
의 지배권을 쥐고 헨리 2세의 후계자로 등극하려 했으니...... 리처드는
필리프 2세 프랑스왕과 동맹을 맺었고 헨리 2세는 협공에 쫓기며 패배가
기정사실이 되어갈 무렵 존 마저 휘하 기사들과 함께 리처드의 편에 선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내가 생고생하며 이 전쟁을 하는데? 실로 충격적인 소식에 크게 상심한
헨리 2세는 가뜩이나 궤양으로 건강이 나빴는데... 홧병으로 악화되니
죽기 직전에 사람들이 하느님께 기도할 것을 권하자 "어째서 내게 고통만을
안겨준 하느님에게 기도해야 한단 말인가?" 라며 버럭 화를 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정말, 정말 내 아들 존이란 말이더냐? 내 아들들 중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이란
말이더냐? 내가 지금까지 온갖 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던게 누구 때문인데,
그 존이 나를 배신했단 말이더냐? 더 이상 아무 말 말라. 이제는 모두 내려
놓겠노라. 짐은 물론,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이제는 마음 쓰지 않겠노라."
결국 1189년 7월 6일에 헨리 2세는 프랑스 시농성에서 사망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56세
였으니 죽어가는 헨리 2세의 곁을 끝까지 지킨 사람은 서자인 제프리와 충성스런 심복
윌리엄 마셜뿐이었다는데, 리처드 1세가 아버지의 시신을 보기 위해 방안에 들어서자
갑자기 헨리 2세의 시신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니 리처드를 저주하며 죽어갔다는 뜻이라?
자식들이 후레자식 웬수들이다! 하지만 “효의 나라 조선”의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죽었을 때
장례식 참석조차 안했으니 그보다는 나을라나? 다만 이는 아들들이고 딸들과는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는데, 국정을 열심히 하며 프랑스 등지로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잉글랜드에는 자주 오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들은 성장기에 아버지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보다못한 캔터베리 대주교가 "아무리 비정한 부모라도 폐하 보다는 나을 겁니다" 라면서
자식들 얼굴이라도 좀 보라고 권할 정도였으니 장성한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애정이 없고, 자주 보던 어머니와 친했던 것인데 가정에 무심하고 바람기로
아내와 사이가 나쁜데도 화해하지 않고 반란후 아내를 감옥에 가두고는 풀어주지 않았으니....
헨리 2세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아들들에게 직책만 주었지 권한을 주지 않았기에
아들들을 힘들게 만들었고, 영지 분배도 독단적으로 하여 불화를 커지게 만들었는데
청년왕 헨리에게는 노르망디, 리처드에게는 아키텐, 제프리에게는 브르타뉴, 막내
존에게는 아일랜드의 통치권을 주고 후계자 수업을 시켰다면 불만은 훨씬 줄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3남 헨리는 많이 사랑했었던지 반란을 일으켰다가 급사했을 때 "나를 많이 괴롭게
만들었지만, 나를 더 괴롭혀도 좋으니 그가 살아있기만 하면 좋겠다."라고 절규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4남 제프리의 급사 소식을 들었을때 슬퍼한 이유가 차남
헨리의 죽음을 다시 떠올렸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연회를 즐겼다고 합니다.
헨리 2세는 그야말로 영웅호색을 실감케 했던 남자로서 생전 '공공연한 간부' 로 불렸다는데....
개중에서 유명한 정부는 잉글랜드 출신인 미녀 클리포드의 로자문드로 아내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를 연금했을 때도 대놓고 염문을 뿌리고 다녔으며 머리칼은 붉은색이었다고 합니다.
헨리 2세는 평화로울 때의 눈빛은 정직하고 비둘기 같았으며 분노했을 때는 불길로 번들거렸다는데...
기수의 휜 다리, 넓은 가슴, 복서의 팔은 모두 그가 강하고 재빠르고 용맹한 사내임을 증명했으니
대머리의 조짐은 없었지만 머리를 짧게 깎았으며 얼굴은 크고 네모지고 사자를 연상시켰다고 합니다.
월터 맵은 안색이 붉고 거무스름하며 주근깨 투성이고 머리가 크며 눈은 회색에 충혈되었고 분노로
번들거렸으며, 표정이 강렬했고 목소리가 떨렸으며 목은 짧고 앞으로 튀어나왔지만 가슴이 드넓고
팔은 근육질이었으며 살집이 좋은 체구였는데 말을 잘타며 사냥을 좋아하는 사냥광 이었다고 합니다.
헨리 2세는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를 할줄 알았으나 영어는 거의 쓰지않고 주로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썼다는데.... 패션 감각이 없고 옷을 못입어 그가 입은 옷을 보면 악평을 듣었는데, 그가 옷입는
것을 scruffily (지저분하게, 멍청하게) 라는 말을 듣을 정도로 옷에 관심이 없고 잘 못입었다고 합니다.
헨리의 부친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는 프랑스왕 루이 7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장녀 마리
를 헨리 2세와 결혼시켜 프랑스왕으로 옹립하려 했지만 루이에게 거절되었으며, 헨리 2세는
딸이 아니라 루이와 이혼한 엘레오노르와 결혼하여 얻은 차남 헨리를 아들이 없던 루이 7세
와 카스티야 공주 콩스탕스의 장녀 마르가리트와 결혼시켜 다시금 프랑스 왕위 획득에 도전합니다.
여성은 영지를 상속받을수 없다는 게르만족의 살리카법은 상황에 따라 프랑스 왕국
에서 잔존했던 무렵이었고..... 잉글랜드 여군주 마틸다의 장남으로서 헨리는
앙주 제국의 힘으로 그쯤은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
가는데 루이 7세와 샹파뉴의 아델 사이에서 필리프 2세가 태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필리프2세가 태어났을 때 "파리 전체가 불바다에 휩쓸린 것처럼 보였고 파리 시민들은 종을
울리고 횃불을 들고는 '이 아이가 잉글랜드 왕가의 망치가 될 것' 이라고 소리쳤다."
는데... 1165년 8월에 2개의 혜성이 잉글랜드 서부와 북부 지역에서 관측되었고 잉글랜드
왕실 점술가들이 일제히 예언 하기를 헨리의 파멸과 앙주 제국의 패망을 뜻하는 것이라나요?
알려진 것과 반대로 필리프 2세 치세 초반부터 1188년 초까지 헨리 2세는 그의 오만방자한 언행을
참아주고 지혜와 정치적 비책을 전수해 주는등 도왔다고 여겨지니, 헨리의 이런 ‘새로운 태도’
는 노망이 의심스럽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수준으로 당시 대륙과 잉글랜드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웨일스의 제럴드는 헨리 2세가 루이 왕과 엘레오노르의 이혼 전 부터.... 상위 주군의 아내를 빼앗을
속셈을 품었다고 비난하면서도, 필리프 2세가 플랑드르를 중추로 한 북프랑스 반란을 종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국왕 헨리 2세의 지속적인 원조와 보호가 상당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헨리 2세는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해에 필리프 2세의 영지에 사냥터 마련을 돕겠다는
명목으로 선물공세를 아낌없이 퍼부었다는데, 2번이나 반란을 일으켰던 4남 제프리
2세가 3남 리처드를 제치고 필리프 2세와 끈끈한 동맹을 맺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판국에도
병에 시달리게 되자, 필리프 2세를 자신의 거처에 며칠 묵게 하고는 위로를 받을려고 했습니다.
헨리 2세의 치세 아래 잉글랜드는 부유해졌고 국민들도 안심하고 살 수 있었으며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탄압하거나 대대적인 숙청 같은 것들은 없었기에 귀족과
백성에게선 평이 좋은 왕이었으니, 파멸하게 된 이유는 가족관계에 신경쓰지 않고
다른 여자들과 바람이 나서 엘레오노르와 자식들과의 관계가 멀어졌기 때문 입니다.
헨리 2세는 34년 재위 중에 잉글랜드에 체류한건 14년 정도라니 훗날 아들 리처드 1세와
비슷한데... 마틸다가 헨리 1세의 임종 당시 잉글랜드 국내에 없었던 탓에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 자리를 놓친 것 처럼, 잉글랜드의 왕이 가지고 있는 프랑스
영지는 프랑스 왕의 신하라는 미묘한 입장 때문에 프랑스에 있던 시간이 길어졌는가 합니다.
헨리 2세는 아서 왕 전설을 정립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모계로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이니 영국
왕실에 다시 고대 웨식스 앵글로색슨족 왕의 피가 흐르게 되었는데...... 예루살렘 왕국 앙주
왕가의 초대 국왕 풀크의 손자인 보두앵 4세와는 나이 차가 매우 많은 사촌 지간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