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릉. 남산

작성자이명근|작성시간26.06.12|조회수138 목록 댓글 0

2026.613 토요일 세종대왕릉

 

 

원래 세종은 아버지 태종헌릉 근처에 묻히고 싶어해서 먼저 세상을 뜬 소헌왕후를 태종의 능역 서북쪽에 장사지냈고, 본인이 승하한 후에는 그곳에 합장되었다.

 

그런데 세종의 수릉(壽陵)을 정할 당시 당대의 풍수가로 이름난

최양선이 이 묏자리를 두고

"여기는 후손이 끊어지고 장남을 잃는 무서운 자리입니다!

"(절사손장자)라고 반대해서 크게 논란이 되었다.

정인지 등이 헛소리로 치부하며 '이런 요망한 소리를 하는 자는

처단하소서!'라고 상소했지만, 세종은 그냥 자신을 향한 충언

정도로 받아들이며 기분 좋게 넘어갔다.

 최양선이 주장했던 것처럼 세종의 장남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승하했고,

문종의 장남 단종 또한 계유정난 이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면서

문종의 직계는 끊겼다.

또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예종의 장남 인성대군도 요절,

또한 말년에 피부병으로 고생하다가 승하했다.

이 때문에 예종은 할아버지 내외를 여주로 이장해서 오늘날에 이른다.

당시 영릉 자리에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의 무덤이 있었다.

야사에 따르면 무덤 자리를 양보해달라는 예종의 청을 받아들인

이인손의 후손들이 묘를 파자 '이 자리에서 연을 높이 날린 다음 줄을

끊어 연이 떨어지는 자리로 이장하라.'는 지석이 나왔고

후손들이 이를 따르자 연이 떨어진 자리도 명당이어서

가문이 계속 번창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장으로도 왕실의 장자 수난은 막을 수 없었다.

 조선왕실의 장자 수난은 숙종을 제외하고는 정말 유난히 심한 편이었다.

영릉 이장은 세조 때부터 정식 논의되다, 1469년(예종 원년)에

천장하여 현재 자리로 옮겼는데, 이 자리가 천하의 대명당으로

풍수가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아주 대단한 자리이다.

태조의 건원릉, 단종의 장릉과 더불어 3대 명당으로 손꼽히는 자리로,

일설에는 세종 같은 성인[聖人]을 이러한 대명당에 모셨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수명이 최소 100여 년은 연장되었다는 소위

'_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_'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판교역 에서 10명이 10:13분 출발 50분후 여주 도착

                                         신륵사

출렁다리 .신륵사 탐방후  세종대왕 릉 가는버스 기다림

                                        판교 가는 전철 

 

 

                                                                       6.9 일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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